|
출처: 의성김 원동파 원문보기 글쓴이: 김태원
[김서령이 쓰는 名門家의 자녀교육②ㅣ전주 류씨 박실 수정재 집안]
`집 앞 가죽나무 세 그루를회초리 삼았다`
공부 기본은 옷깃 가다듬는 ‘敬’…일기·독서·여행의 견문도 중시
▶경북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에 살고 있는 류해종 씨가 조상들이 지은 고문집을 읽고 있다.
경북 선산군 해평면 일선리 마을회관 앞에는 화강암 기단 위에 ‘수류우향(水柳寓鄕)’이라고 새긴 큼직한 자연석이 서 있다. ‘수류’란 풍산의 하회 류씨 하류(河柳)에 대응하는 이름으로 전주 류씨 수곡(水谷·무실)파를 가리킨다. 조선 중엽부터 경북 안동에는 두 류씨가 동서로 나뉘어 각기 터전을 닦고 살았으니, 하나는 무실의 전주 류씨이고 다른 하나는 하회의 풍산 류씨다.
이 두 성씨는 물론 동조이본(同祖異本)이어서 애당초 크게 다를 바 없었고, 마을을 형성한 역사도 비슷하다. 그러나 지리 환경이 달라지고 학문적 추구 또한 매양 같을 수는 없어 양쪽은 다른 문화권을 형성한다. 서애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하회문화권과 그 외가인 학봉 선생의 의법을 따르는 수곡문화권이 그것. 양쪽은 병호 시비를 거치면서 사이가 점점 멀어졌다. 벼슬과 경제력은 하회 쪽이 나았지만 수곡쪽도 문집 수와 학자의 명성으로 결코 하회에 밀리지 않았다. 안동 양반들에게는 경제력이나 지위의 고하보다 학문적 업적과 행신이 중요한 잣대였던 것이다. 그랬던 수류들이 20세기 말엽 임하댐이 생기면서 고향을 잃고 해평으로 집단이주한다. 고가옥 12동 24점도 같이 옮겼다. 그러면 수몰 이주민이 된 수곡문화권은 상처만 입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오래전부터 자녀교육에 각별한 비법을 지닌 명문가를 수소문해 찾고 있었다. 박실의 수정재 집안에 대한 정보가 잡혔다. 소문은 이러했다.
“큰 제사 지내려 한 번 모이면 도포 입은 사람의 3분의 1이 서울대생이라카더라. 카이스트나 포항공대 같은 이과는 다 빼고도 글타 카더라. 암매(아마) 박사 학위 가진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꺼로. 조상이 남긴 문집 수도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끼다.”
소문이란 원래 과장이 섞이지만 또한 전혀 근거 없는 말이 퍼지기도 어렵다. 특히 이런 류의 이야기일수록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 법’이다.
내친 김에 박실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는 류일곤(58) 씨를 만났다. 나는 류 선생이 펼쳐내는 찬란한 보학에 여러 번 혀를 내둘러야 했다. 내 족보는 물론 내가 모르는 조부의 아명까지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날더러 사람 이름 아는 데는 귀신이라 캅니다.”
맑은 눈빛과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그가 내민 명함에는 성균학 전학이라는 낯선 직함이 적혀 있었다. 먼저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박실 수정재 후손들을 그토록 여럿 수능시험 전국 석차 상위 1% 안에 들게 만들었는지를 캐묻고 싶었다. 그 비밀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내 일이었다. 류 선생은 손사래를 쳤다. 전래의 비전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3대 연이어 도천 받은 집안
▶수류들이 살고 있는 일선리 마을 입구에는 '수류우향'이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조상들 문집 많은 거야 이가원 선생 말대로 ‘수류지헌 전령지최(水柳之獻 全嶺之最)’라고 말할 수 있지요. 무실은 한 450년 되지만 박실(박곡, 무실에서 분가한 류씨의 한 분파)과 한들(대평, 박실에 자리 잡은 류씨의 형제 집안)은 역사라고 해봐야 300년밖에 안 되는 데 불과 6~7대에 걸친 저술이 30여 가에 200권이 넘어요. 박실은 한 40가구 되는 작은 마을인데 짧은 기간에 대과 다섯 분, 생원·진사가 열두 분, 일천(逸薦)이 세 분, 음직이 네 분 나왔거든요. 문집 수로는 전국 어느 문중에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맞을 거고, 서울대 졸업생도 많기야 합니다. 가까운 집안만 대강 세어 봐도 한 스무 명은 되는군요. 그러나 서울대 졸업이 무슨 성취가 되겠습니까? 남들이 박실을 ‘호유귀감(虎儒龜鑑)’이니 ‘용옹사대 유림장석(용와-노애-호곡-수정재 등 4대가 유림의 맨 윗자리)’이니 부른 것이 사실이지만 조상이야 그렇다 쳐도 크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공부 중에 있으니 말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류 선생은 아들이 쌍둥이인데 맏이 석종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해 박사 과정을 준비 중이고 아우 석창은 카이스트를 조기 졸업해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아놓은 상태라고 한다. 서울대 입학 자체가 성취의 잣대가 될 리야 물론 없다. 그러나 편의상 말해 본다면 3부자, 4형제가 나란히 서울대 동기인 경우가 박실에는 흔하다. 류 선생의 6대조 수정재 류정문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한 명은 요절했으나 문집을 남겼고 두 명이 진사 급제를 했고 한 명이 문과 급제를 했다. 류 선생은 집안 조상을 주르륵 쓰더니 이름 위에 줄줄이 동그라미를 쳤다. 류치명은 영남 학맥의 거봉으로 퇴계학 이어 “우리 집안에서 벼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어요. 지금 동그라미를 친 것은 문집을 가진 어른입니다. 한두 권은 말고 적어도 세 권 이상 되는 분만…. 글이라도 제문·만사·시 같은 ‘농월’하는 글 말고, 요즘 말로 평론과 철학에 해당하는 저서를 남긴 어른들만 꼽았습니다.”
그 동그라미는 종으로 8대가 나란히, 한 대도 빠지지 않고 그려졌다. 횡으로야 물론 훨씬 수가 많았다. 과연 학문 하는 집안 내력이 한눈에 훤하게 드러났다. “수정재 할배는 벼슬이 말단 참봉이었어요. 그것도 과거시험을 본 것이 아니라 경상감사가 추천해 내린 천참봉이지요. 수정재 할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윗대 호곡, 그 윗대 노애까지 3대가 나란히 ‘도천(道薦)’받은 경우는 전국을 뒤져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닐 걸요?”
▶(좌)조선시대의 학자 류승현이 1788년(정조 12년) 세운 종택인 침간정. ‘용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가운데) 무실마을 ‘근암정’ 현판. 대원군의 글씨로 전한다.(우)류해종 씨 집안 후손들이 읽고 있는 '논어'. 조선조 때 벼슬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우선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 둘째는 조상 덕에 음직을 받는 것, 셋째가 도천, 즉 주변에 학덕과 인품이 소문나 감사나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는 것이다.
영남의 선비들은 과일이 익어 절로 꼭지가 떨어지듯 저절로 벼슬이 내려오는 도천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다. 3대가 연이어 도천받은 집안이라면 요즘 말로 하면 뭐가 될까? 3대 연속 인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 국립대학 초빙교수? 아니면 명예박사? 나의 이런저런 궁리를 류 선생은 경박한 일이라는 듯 웃으며 건너다본다. 무실(수곡)에서 분가해 박실에 처음 터를 잡은 어른은 ‘관암위 할배(柳奉時·관암에 산소가 있어 후손들은 그렇게 부른다. 보통 택호는 벼슬 이름을 쓰지만 대가 높아지면 산소 위치를 호칭으로 삼기도 한다)’였다. 하회와 무실이 갈라지듯 무실과 박실도 1720년쯤 이렇게 갈라진다.
류봉시는 두 아들 교육을 위해 위동이라는 한적한 곳에 집을 짓고 집 앞에 가죽나무 세 그루를 심어 자식들 회초리로 삼았다. 터를 옮겨 분가한 책임감이 그만큼 컸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교육열에 자극받은 아들은 둘 다 문과에 급제해 현달한다. 이후 맏아들 류승현(용와)은 박실에, 둘째 류관현(양파)은 한들에 자리 잡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지은 집인 ‘삼가정(三?亭)’은 지금 해평으로 옮겼으나 자손 대대로 회초리 감이 되어줄 해묵은 가죽나무는 아깝게도 옮기지 못했다. 예조좌랑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무르던 류승현은 영조 4년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의 난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토벌하기 위해 안동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떠난다. 수괴인 이인좌는 곧 잡혔고, 노론이 득세하던 시대 중앙정치에 비판적이던 영남 남인들이었지만 이후 류승현의 정치적 진로는 그리 쓸쓸하지 않았다.
무실 류씨 집안은 영조에게 직접 궁시를 하사받고 종성부사가 된 뒤 욱일성장한다. 아우 류관현도 경성부사를 지냈는데, 형제가 똑같이 청렴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온갖 폐단과 굶주림을 없애려고 지성을 다했다. 류관현이 경성을 떠날 때 장정 수십 명이 길을 막아 “사또의 은혜를 갚고자 가마를 메겠다”고 자청하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울며 작별했다는 기록은 한박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미적 장관이다. 류관현의 현손인 정재 류치명은 영남 학맥의 거봉이 되어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경당 장승효→갈암 이현일→대산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퇴계 성리학의 봉우리가 된다. 박실 류승현의 아랫대인 노애-호곡-수정재가 바로 3대 도천받은 이들이다. 수정재는 잡저의 첫머리에 “한 자를 읽으면 한 자를 행하고, 한 구를 읽으면 한 구를 천(踐)하라. 나는 30년 래로 가정의 훈계에서 이것을 들었을 뿐”이라며 학보다 행(行)을 중시했다. 그 수정재의 맏집 후손이 박정희 시절 바른소리 잘하던 청와대 공보수석 류혁인 씨이고 다섯째집 후손이 시인 류안진 씨다.
혁인 씨의 아들 둘이 대학 선생이 되고 안진 씨 여형제 셋이 모두 교수로 있으니, 이 집안은 사위와 외손까지 합하면 박사와 교수가 하나 건너 한 명꼴이다. “그저 보고 듣는 견문이 제일” 셋째집안도 만만찮아 3형제와 그 아랫대 4형제가 모두 서울대 동문이다. 김천 교육장을 지낸 류직기, 주식회사 풍산의 부회장인 류목기, S오일 사장인 류호기가 그들이다. 류직기의 네 아들은 첫째가 암 연구의 권위자인 의학박사 영석, 둘째가 현 싱가포르 대사인 광석, 셋째가 한솔텔레콤 사장인 화석, 넷째가 부산대 교수인 지석이다.
안동 유림의 대표 격인 한학자 류창훈, 제도권 학력은 전무하면서 동양철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충남대 류정기 교수도 모두 수정재 후손이다. 족보에 실린 90명의 후손(25세 이상 남자) 중 서울대 졸업생만 20명이고 교수도 그만하다니 소문이 과장만은 아니었다. “영양 주실 조씨와 지례 의성 김씨에 박사가 많다고 자랑하지만 동네 역사와 규모를 놓고 비율을 따진다면 호학(好學)하는 측면에서는 우리 박실이 안 밑질 걸요.” 내내 겸손하다 호학 말이 나오자 소문난 한박(한들·박실) 특유의 자존심을 은근히 내비친다.
무실 류씨가 호학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학보다 행을 중시했으니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선비의 태도라는 가르침을 적극 실천할 줄 알았다. 그래서 무신난과 임진왜란, 일제 침략 등 나라의 위기 때마다 분연히 들고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나섰다. 개화기 항일운동에 투신한 사람이 무실·박실·한들 다 따지면 서른 명도 넘는다. 박실만 해도 10여 명이다. 독립운동사를 추적하는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최근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일경에 항거하다 무실 류씨 셋이 안동경찰서에 끌려가 둘은 맞아 죽고 한 명만 살아 돌아왔는데, 그 살아 돌아온 이가 바로 시인 류안진의 조부였다는 것이다.
▶전주 류씨 수곡파 고택이 모여 있는 일선리 마을 전경.
민족정신을 강조하던 협동학교 1회 졸업생이던 류주희(류혁인의 백부)는 일송 김동삼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서슬 퍼런 일경의 감시를 제치고 시신을 찾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 그때 류주희와 함께 나선 이가 만해 한용운이었다. 유치명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무실 류씨 문중 후진들은 후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과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당연히 일신의 호의호식을 내던지고 나라를 위해 투쟁했다. 파리 장서사건의 유림 대표였던 류필, 개화기 영남의 총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류시연, 구학문과 신학문의 접점을 모색하며 일제에 필봉으로 맞선 류인식, 독립운동가이며 아나키스트로 광복에 헌신했던 류림 등이 모두 이 집안 족친이다. 도대체 수정재 집안은 자식을 어떻게 기를까? 회초릿감 나무부터 심어가며 윗대부터 잘 조성된 교육환경의 영향일까, 아니면 DNA 자체가 특수한 것일까? 비전을 알아내려면 자꾸 파고들어 질문을 던져볼 도리밖에 없다.
“그저 견문이지요. 보고 듣는 것, 그게 제일입니다. 공부하는 부모를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절로 책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지요.” 진리가 늘 그렇듯 대답은 싱겁고 맨송했다.
따로 왕도 같은 것은 없다는 대답이겠다. 그렇다면 비법이 아니라 경험담을 들어봐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말과 글을 동시에 배웠어요. 말을 배울 때 벽에 글자를 써 붙여 줬지요. 아이들이 단어를 처음 배우면 집의 선친이 그 말을 붓글씨로 단정하고 아름답게 쓰셨습니다. 글자를 금방 배우더군요. 우리 집안 새아지매 하나는 아들이 외무고시 공부할 때 일본에서 교재를 구해 직접 번역해 책으로 묶어 줬지요. 그 사람이 지금 싱가포르 대사로 나가 있습니다. 다른 집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앉아 하루를 점검하는 일기를 썼습니다. 아이들에게 일기가 곧 역사라는 것을 가르쳤어요. 개인의 역사가 집안의 역사이고, 나아가 곧 국가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 자각했을 걸요? 자랑 같지만 우리 집안은 증조부, 고조부는 물론이고 5대조부터 9대조에 이르는 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술국치 때의 일기, 병인양요 때의 일기를 조상 문집에서 골라 읽어 줬으니 개인사가 곧 국사라는 것을 저절로 깨달았을 겁니다. 그날 신문에 나온 사건들을 늘 이야기해 줬어요. 그래야 시대를 알거든요.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적어 보라고 했어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일요일마다 데리고 도서관에 갔습니다. 아침 일찍 등산하고 내려와 김밥 하나 싸들고 물 한 병 담아 무조건 정독도서관에 자리 잡고 앉았어요. 나는 내 책을 보고, 우리 아이들은 각자 저 좋은 책을 읽는 거지요. 예나 지금이나 혼자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제일 큰 공부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래야 문리가 터지거든요. 해마다 아이들 생일 선물로 책을 사 줬습니다. 어디 아무 책이나 막 고르겠습니까? 아이들 자라는 과정에 맞춰 꼼꼼히 골라, 그냥 주지 않고 반드시 맨 앞장에 한마디씩 써 줬지요. 방학 때는 식구들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계획을 미리 짰지요. 3학년 때는 서해안, 4학년 때는 동해안, 남해안, 내륙 해서 4~5년을 잡으니 국사와 지리책에 나오는 전국 각지를 거의 둘러볼 수 있겠던데요?” 요약하면 일기·독서·여행이다.
새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싱겁게도 해답은 이렇게 상식 속에 들어 있는 법이다. 알아내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따라 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남들에게 권하기는 어렵지만 이 집안은 아이들 어렸을 때 <명심보감>과 <소학> 정도는 한문으로 가르친다. 이 공부는 조부와 손자를 맺어 주는 끈이 되기도 했다. 외출할 때는 그저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만 하지만 며칠 나갔다 들어오면 반드시 부모 앞에 예를 갖춰 절을 올리고 드나든다. 배냇저고리 간수하는 정신이 敬의 핵심 “절이 말이에요. 그게 묘합니다. 절을 하면 저절로 옷깃을 가다듬게 돼 있어요.
나는 공부의 기본은 한마디로 경(敬)이라고 생각합니다. 옷깃을 가다듬는 것. 책을 펴놓고 옷깃을 가다듬을 줄 안다면 학원, 그거 안 보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배냇저고리를 몸에 지니고 시험을 보면 과거급제한다는 속설이 있다. 나 또한 노랗게 낡은 배냇저고리를 부적처럼 배꼽 위에 얹고 대학 본고사를 치르러 갔고, 아이들의 배냇저고리도 나중을 위해 보관했다. 그러나 그 정도에 그쳤지 류일곤 선생댁처럼 성장 기록을 모조리 파일에 담아 보관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배냇저고리를 간수하라는 뜻은 아직 미숙한 부모에게는 제 아이에게 그만큼 공력과 정성을 들이라는 가르침이었을 테고, 당사자에게는 손바닥 만한 첫 저고리를 보며 제 탄생과 성장의 의미를 명상하라는 뜻일 게다. 그게 바로 ‘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경을 가르치려면 부모가 먼저 경을 몸에 익혀야 할 것이다. 경이 무엇인가?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면 침착하고 담대하게 스스로 풀어 나가야 할 숙제다. 그게 우리가 수정재 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고 비전(秘傳)이다.
2005년 05월호 | 입력날짜 2005.04.22
첫댓글 영남 양반의 일면을 볼 수 있어서 카페에 옮김니다.
여포선생 같은분은 관심이 있을것 같아서...
김위원 잘 읽었습니다. 명문가 라함은 학식과 함께 높은 수준의 도덕적의무감이 따라야 하는것 같네..
류씨문중에서 많은 분들이 임진왜란과 일제때 의병과 독립운동했다니.집안이 힘들었겠지.
일부양반들은 일신을 위해 배운자가 나라를 파는자도 있으니 말이네..
영남 양반들은 오랜동안 정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신분의 척도를 권력에 두지 않고 학문에 두었답니다.
일부분 자기합리화인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상이 후대에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