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가 많이 커졌다.
오징어는 秋夕이 지나면 맛도 좋아지고 크기도 커진다.
昨年은 오징어가 한 마리 이만원까지 갔었다.
오징어는 묵호를 먹여 살려왔다. 예전 화려했던 묵호는 오징어 때문에 걱정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넘쳐서 처치 곤란할 지경이었다.
지금처럼 급냉동 시설이 없어서, 덕장을 비롯해 빨래줄 담벼락 나무가지 울타리 가로수에 내다 걸었다.
오징어가 눌눌하게 말라야 하는데, 비라도 맞으면 내다 버렸다.
내다 버려서 오징어 썩는 냄새가 진동할 지경이었다.
묵호 시내는 石炭 가루 냄새와 오징어 明太 냄새가 섞여 묘한 냄새가 항상 퍼져 있었다.
지금은 신시가지인 천곡에도 늘 오징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천곡의 농민들이 농산물을 팔려고 묵호에 갔다가 늘 오징어 몇 두름씩 사와서 빨랫줄에 걸어서 말렸다.
먼 마을 사람들은 겨우 반찬용으로 몇 마리 사오지만, 시골 알부자들은 손수레나 달구지로 오징어를 사와서 미루나무 사이에 새끼줄을 쳐서 오징어를 널었다.
논 밭에서 일하면서도 항상 신경은 오징어에 가 있었다.
제대로 건조하면 농산물 파는 것 보다 목돈이 되었다.
이런 묵호였는데, 오징어가 안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었다.
묵호항에는 전국에서 유명한 방석집도 많았다. 오징어 배 선주들과 오징어 노가리 건조업자와 석탄 매매에 관여한 업자들이 주로 이용을 했다.
특히 유명한 곳이 백화원이었다. 아가씨가 백명도 넘었다.
백화원에는 그 당시로 보기 드믄 전자오르간이 있었다. 한곡에 300원 세곡에 500원, 술상은 한상에 삼만원, 특별상은 오만원이었다.
술 상 옆에는 전국에서 이쁜 여자들이 모여 앉아 술을 따랐다.
그녀들의 젖가슴과 깊은 계곡은 사내들 차지였다.
돈 없는 인간들이 마시던 곳도 즐비했다.
특히, 보영 백화점과 묵호극장 뒤편은 막걸리 진땡이와 아가씨들과 질펀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마실 수 있었다.
화물 선박 선원들은 향로동의 무교동 쪽으로 많이 갔다. 그곳 역시 질펀하기는 매 한가지 였다.
새벽에 배를 타야 하는 선원들은 어판장 뒷골목에 있는 텍사스촌이라 불리우는 곳에서 개다리 소반으로 술을 마셨다. 다음 날을 위해 주로 따끈하게 데운 정종이었다.
다음 날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묵호극장 뒤편처럼 질펀하게 놀지는 않았다.
나는 늘 묵호의 거리를 걸으면서 묵호의 과거, 오징어와 석탄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 시켰던 그녀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