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신 주님, 당신의 사랑이 그들을 지켜주소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소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어 세상을 행복 속에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마태 5,27-32 또는 루카 10,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태 5,27-32)
◆어느 문예지에서 엽편소설 하나를 본 적이 있다. 불륜에 관한 이야기다. 목욕탕을 빠져나가는 수증기처럼, 사라져 가는 환영과도 같은 남자. 그 허무한 존재를 붙들고 살아가는 한 여자의 씁쓸한 아픔을 그린 이야기다. 하긴 요즘 이야기치고 불륜 아닌 게 있나? 드라마도 소설도 현실도 그렇다. 내가 하면 낭만이고 남이 하면 불륜인 사랑, 망상의 극치. 그런데도 그 미망을 좇아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 인간일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 <화양연화>가 있다. 같은 날 이웃으로 이사 오게 된 두 남녀가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자 동병상련의 처지로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항상 좁은 아파트 복도에서 계단에서 그리고 골목에서 스쳐 지나간다. 퇴근할 때도 국수를 사러 갈 때도 서로 눈길만 나눈 채 스쳐간다. 격정적이거나 열정적이지 않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도 절절하고 애틋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영화는 ‘스쳐 지나감’과 ‘절제’로 인해 고뇌하며 망설이는 기혼 남녀의 심리묘사를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고 애틋하게 표현했다고 해도 두 사람의 사랑은 불안하고 순간적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다.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아름다운 꽃같이 스쳐 지나가는 시절일 뿐이다. 미망이다. 하느님 외에는 그 무엇도 온전한 것이 없으며, 인간은 그 누구도 죄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 간음한 여자에게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지라.”고 하셨던 예수님. 사랑의 표징인 그분께서 왜 이렇게 질타하신 것일까? 제자들에게 더 확실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경고였을까? 하느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 인간도 온전하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신 것일 텐데, 그 온전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치졸하고 못난 존재인지…. 예수님은, 단순히 간음행위를 피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정결하지 못한 생각과 욕망까지도 몰아내라고 하신다. 간음을 금지하는 계명은 행위나 말 또는 생각에서조차 육욕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도 용납하지 않는다. 계명의 완전한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명 앞에서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박혜원(경남 거창고등학교)
대나무와 갈대
양창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대나무와 갈대의 교훈을 듣고 자랍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대쪽 같다고 하면 높게 사는 반면, 갈대 같다는 말은 싫어합니다. 물론 갈대라는 단어에 대한 통념이 좋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은 유연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갈대가 낫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대쪽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자기를 가두고 사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요. 대나무가 상징하는 지조와 기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좀더 유연하게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유연성은 곧 창의성과 통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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