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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금번 통권 제18호 2023대구행정동우회誌에 기고된 '이종주 전 시장의 추모와 업적'에 대한 글입니다. '이종주' 前 대구시장님께서는 대구시가 대구광역시, 대구직할시로 승격 되기 전 경상북도 대구시 1960년대에서 1995년까지 36년 동안 처음 하급직원으로 채용되어 대구시에 대구광역시장까지 최고위층에 오르신 한분이십니다.
2023년 5월 17일 우리곁을 영원히 떠나셨지만 어려운 대구 살림을 책임지시면서 눈물겨운 고투를 이겨내시고 당당하게 대구시를 제3대도시로 이끌어오신 그 공적을 행여 동우회지에서 읽지 못하신 회원과 일반인들에게 알리고 비록 졸작이지만 행여 글 내용 중 수정이나 참고 사항이 있으면 알려주셔서 더욱 값진 마무리도 하겠습니다.
다소 긴 문장이지만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대구시를 빛나게 발전시킨 이 글을 존경하는 이종주 시장님께 바칩니다.
다시 한번 이종주 시장님의 명복을 비옵니다.
기고자 동우회 이사 이태희 드림
이종주 前 시장의 추모와 업적
금년 5월 17일 이종주 전 시장께서 별세 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 달여 전에도 행정동우회를 비롯하여 많은 주요 행사에 솔선 참석하여 훌륭한 축사를 해오셨 기에 우리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비보였다.
이 전 시장은 고성 이씨 28세손으로 안동군 길안 면에서 태어나서,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1960 년 대구시 하급 공직에 임용되어 대구광역시장에 이르 기까지 승승장구한 유일한 분으로도 유명하다. 36년의 세월 동안 지역과 나라 발전을 위해 헌신하면서 늘 화합 이종주 님 근영 정신을 강조해 오셨다. 그 중에도 업무 추진능력은 대단 하였으며 함께한 모든 공직자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80연대 대구시정을 훌륭하게 이끌어 오신 이상희 시장께서 지난해 8월 8일 90세에 타계하셨고, 이종주 시장역시 1년도 못 넘기고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다. 불과 한 달 전 4월 16일 모교인 대구상원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던 날 수천 명의 동문들이 운동장을 가득 매운 가운데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 중에도 이 시장께서는 ‘대상의 날’ 축제행사를 창안 하셨고, 이 날에도 어느 때 보다 큰 행사로 오전부터 오후 늦도록 VIP석에서 지켜보고 계셨다. 축제 열기가 한창 오를 때 이 시장께서 단상에 올라 감동적인 축사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는 소식을 함께 참석한 동우회 회원들이 전해주었다. 그러나 이날의 행사가 대외적으로 마지막이 되었으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Ⅱ. 이력 요약
● 출생 및 가족
이 전 시장은 고성이씨 28세손이다. 아버지 수기(守基)공과 어머니 평택 임씨 재원(在元) 님 사이 3남 3녀 중 3남으로 1935년 3월 27일 안동군 길안면 송사동에서 태어났으며,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있다. 학력은 1942년 안동군 길안초등학교 입학, 1956년 대구상업고등학교 졸업, 이 후 영남대하교 학•석사를 마쳤다.
공직 생활은 1960년 대구시 하급공무원으로 시작하여, 95년 대구시 총무국, 문화공보실장, 총무과장, 동•중구청장, 보건사회국장, 기획관리실장, 영주•구미•포항시장, 경북도 기획관리실장, 대구직할시 부시장, 1995년 27대 대구광역시장으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상훈은 녹지근정훈장, 대통령상, 장관상 등 다수이고, 저서로서는 ‘희년 문집 염평봉직’, 수상집으로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외 여러 편이다.
Ⅲ. 대구시정 당시 업적고찰
1. 70년대 문화공보실장
1972년 부임한 이규이 시장은 부임 즉시 시 본청 보직자 전원을 접견, 면담한 후 이종주 서무계장을 문화공보실장으로 승진 발령시켰다. 이 시장의 시책사업으로서는 시민들은 그를 ‘문화시장’으로 불리울 만큼 시정을 알리는데 주력을 쏟았고, 이 실장도 창의적인 업무추진에 적극적으로 앞장을 섰다.
첫 번째, 일본인이 발간하여 계속 유지되어오던 부분적인 대구약사(略史)에 불과한 대구부사(大邱府史)를 이종주 실장이 앞장서서 고대, 중세, 근세로 나누어 3권의 대구시사를 출간하였다. 출판기념회는 구자춘 경북지사를 모시고 문화인들과 함께 달성공원 문화관에서 성대하게 개최하여 큰 감회를 가졌다고 회상하였다.
두 번째, 이종주 실장은 현대적 시민회관의 건립 필요성을 시장에게 건의하여 대구역 부근 공회당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큰 규모의 시민회관을 건립하였다. 설계는 향토건축가 김인호 작품이었고, 시공자는 서울 소재 한국건업회사였다.
세 번째, 관풍루(觀風樓) 복원사업이다. 경상감영은 일제 강점기 도청이 들어서면서 해체되어 방치되었던 관풍루를 당시 이규이 시장과 이종주 실장의 의지로 달성공원 내에 설치되었고, 현판은 향토서예가 죽농 서동균 선생이 썼다.
네 번째, 대구향교 정비 복원사업으로서 출입정문,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을 보수 재건하여 유교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외에도 대구시립도서관 건립, ‘능금꽃 피는 고향’의 대구찬가도 제정하였다. 이와 같이 문화사업, 문화재 복원 등은 이규이 시장과 이종주 문화공보실장의 행정적 인연을 통하여 시정의 주요시책에 기여한 것이 큰 보람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영광이었다고 자서전에 남겼다.
1975년 기획담당관 재직 시에는 전국 최초로 반상회(班常會)를 창설하여 홍보영화를 제작, 서울에서 내무부장관을 모시고 시사회도 열었으며, 1980년 동구청장 시절에는 고속도로 주변 취락구조사업, 산림 내 불법건조물 정비를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민원실 내 공무원과 민원인과의 칸막이를 없애고 민원대를 개선하여 ‘대좌식 민원실’을 설치하자 이 소식을 들은 이효상 국회의장께서 구청에 방문하였고, 내무부 관계직원이 현장을 확인한 후 우수사례로 선정 되어 전국으로 파급되었으며, 장관 표창까지 받게 되었다.
2. 대구시 보건사회국장 시절
1982년 2월 대구직할시 승격 후 두 번째로 부임한 제19대 이상희 시장 재임 당시는 시민들이 수준 높은 삶의 질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극심한 가뭄까지 계속 이어져 시정 추진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종주 국장은 시장의 시정추진을 위한 복안을 잘 읽고 시민들에게 맞는 행정력을 적극 추진하게 되자 이 시장께서도 뛰어난 참모로서 인정을 받아 많은 숙원사업들을 해결하였다.
보건사회국은 위생, 숙박, 청소, 의약 등 보건업무와 사회, 체육까지 소위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업무를 추진하였다. 1일 청소인부 3천 명, 쓰레기 처리 3천여 톤 등 1일 24시간 시민생활을 중심이라 조금도 쉴 수 없는 막중한 과업이었지만, 모든 난제들을 해결함으로써 능력 있는 국장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또한 대구문화방송 주관, ‘100만인 모금걷기운동’으로 시작한 어린이회관 건립은 15차례 이상 설계 변경 끝에 성공적으로 준공을 보게 되었고, 대일 차관사업 200억 원을 투자하여 국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건설 쓰레기 소각장을 7년 만에 완공하였으며, 정신질환자, 지체부자유자를 수용할 수 있는 시립복지시설 희망원을 천주교 교주 위탁운영으로 성공시켜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받아 우수 사례(1980년 위탁, 운영 정착)가 되었다. 이 외에도 시장 긴급 지시로 조직한 삼성라이언스 야구단 창단,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구미문화원 간첩 사건(1983), 초원의 집 화재(1983) 등 어려운 문제들도 수개월 동안 정성을 쏟아 마무리를 잘 하게 되었다.
3. 방촌동 대단위 쓰레기 매립장 건설
1981년 보건사회국장 재직 초기였다. 대구시 대단위 매립장 선정이 여의치 않아 고심 끝에 현 염색공단에 있는 "원대동 미나리깡"이라 불리는 곳에 2 동안 매립을 하였다. 다음은 앞산 수목원 천수답에도 쓰레기를 8개월 동안 매립하고, 그 후 이곳을 수목원으로 활용하자는 계획을 결정하자 주위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그대로 관철, 성공으로 이루어져 전국적으로 큰 각광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두류공원 내 음악당과 연결된 농지 창동에도 6개월 여 매립을 하였다. 현재 매립지 대구환경자원사업소가 위치하고 있는 달성군 다사읍 방천동 매립장은 이상희 시장이 재임한 1982년부터 공사를 추진하여, 지금도 매년 30만톤 이상 매립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30년 이상 가능하다고 하니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종주 시장은 대구행정동우회 2021년 회지(會誌) ‘이상희 시장과 나’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오늘날 매립하고 있는 방촌동의 대단위 쓰레기 매립장 역시 내가 현지를 답사한 다음, 건설부의 그린벨트를 해제를 득하고 관련된 민간인을 이주시키고, 토지를 매입하고, 현대적 시설을 갖추어 30년을 감당한다고 마련한 것이다. 그 때 이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대구의 쓰레기 매립은 어디에서 불평 없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그때 함께 고생했던 동료 직원들의 엄청난 노고에 다시 감사한다. (중략)
4.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와 수습
1993년 포항시장 재임 후 1994년 대구직할시 부시장으로 금위환향 했다.
1995년 정책보좌관에 이어 3월 28일 제27대 대구광역시장으로 취임하였다. 그해 7월부터는 민선시장으로 임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임 준비와 지방선거 등 바쁜 일과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도 '앞산 순환도로 미군부대 구간의 착공'과 '반야월 경산간의 도로확장' 등의 큰 성과를 내고 있던 중이었다.
취임한지 한 달 되던 4월 28일, 달서구 상인동 영남중고등학교 앞 거리에서 대구시 사상 초유의 대 참사인 '상인동 가스폭발사고'가 일어났다.
대구백화점 상인동 사옥 신축현장에서 허가 없이 한 인부가 소방도로를 파 헤치다가 도시가스관을 파괴하고 말았다. 분출된 가스는 옆을 지나는 오수관을 통해 하수관으로 들어가 지하철 공사장을 가득 채워 대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지하철 1호선 공사장 400m가 부서지고, 사망, 부상 318명, 건물 피해 227동, 자동차 파손 149대 등 생각만 하여도 끔직한 대형 사고였다. 공사장 입구에 등교하던 영남중•고등학생 51명과 교사 1명까지 목숨을 잃었다. 당시 대구시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있던 이 시장은 사고 이틀 후 내무부장관에게 사표를 내고 난 다음 사고수습에 응하겠다고 하였다. 시민안전을 책임진 시장 입장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습이 문제라고 하면서 사표는 반려되었다.
며칠 후 눈물바다가 된 학생들의 장례식, 수많은 봉사자들과 봉사단체의 격려와 봉사활동, 전국에서 답지한 성금과 성품, 1만여 명의 헌혈과 헌혈증으로 언론과 여론들은 밤낮 뜨겁게 달구었다. 유족, 작업인부들을 위로, 격려하고 밤과 낮을 함께한 경찰, 소방, 군인, 공무원들, 수많은 봉사자들은 함께 울고 격려하면서 그 잔인한 시간을 시장과 시 전 직원들은 견디어 내어야만 했다. 한편 폐허가 되다시피 한 주변 주택과 상가, 부서진 차량, 상하수도관, 전기, 전화 등에 대한 복구는 비상수단으로 총동원하여 5일 만에 복구하였다. 이 모습을 본 이종주 시장은 어려울 때마다 슬기롭게 이겨낸 대구시 저력의 진면목을 확인되었다고 하였다.
이 시장께서는 사상자, 건물, 차량 피해 등 7백 건이나 넘는 산적한 과제 중에서 유족이나 피해자가 요구하는 보상금이 가장 힘든 문제였다고 했다. 우선 그 원인자가 대구백화점이기 때문에 선 보상 후 구상권 행사를 하기로 하고, 타 사건의 선례 참조와 협의를 거치는 동안 시장과 참여 직원들은 피해자들의 무리한 요구로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피해보상금 소요자금은 5년 거치 10년 상환의 장기 융자금을 이용 했다. 피해자들은 법정 배상금, 특별 위로금, 위령탑 등 요구는 봇물처럼 이어졌고, 국민 성금과 대백 성금 등을 감안하여 정부나 외부에서는 수개월 소요될 것이라고 추측하였지만 이 시장은 대책 본부장들과 협의를 거듭한 끝에 29일 만에 적정 금액으로 결정을 하였다.
이 시장은 당시 사월 초파일 모 사찰 스님을 찾아뵙고 이 어려운 난제를 풀어갈 수 있는 좋은 말씀을 주실 것을 부탁하자 스님은 '세상사란 언제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고 치유되는 법인데 큰일은 반드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자에게 일어나는 것이니 끝까지 용기를 저버리지 말라'라는 격려를 듣고 용기를 내어, 내 몸을 불살라야겠다는 각오로 아픔을 짊어진 시민들과 고통을 함께 했으며, 전 국민, 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중앙정부와 대구시, 시의회 노력 등 그 저력에 힘입어 치유가 될 수 있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대책본부가 있는 달서구청에서 수개월 동안 유족반 파견근무에 임하였는데, 신태수 총괄반장 밑에 10여 명이 밤낮 유족을 위로하고 눈물을 함께 하며 최선을 다한 기억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시장께서는 부친께서 공직 초기에 당부하신 '염평봉직(廉平奉織)'의 교훈을 끝까지 지키셨으며, 70세 희년((稀年) 문집 488P에 달하는 자서전을 만들었을 때 이상희 전 시장은 축사에서 "이종주 시장은 창의력, 친화력, 추진력을 갖추고 철두철미한 책임의식과 사명감으로 공직을 훌륭히 수행했다" 는 글을 남겼다.
5. 사회봉사활동과 동우회 행사 적극 참여
자서전에 '인연록'이라는 이름 짓고, 가장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던 단체는 1위 대구행정동우회, 2위 경상북도 도시행정동우회, 다음은 목우회, 고성 이씨 종친회, 대구상고 총동창회 등이고 모두 수십 개 모임에 회장, 이사, 원장을 역임하면서 봉사활동에 앞장서서 참여하였다. 특히 수년 전부터는 석주 이상용 선생과 관련된 안동 임청각 복원 추진위원으로 적극 활동하였다.
대구행정동우회는 새해가 되면 신년회를 시작으로 이사회, 간담회, 문화답사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이때에도 이 시장께서는 빠짐없이 참석하여 회원들과 환담하면서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서울에서 이의익 시장께서도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었고, 어려운 일에는 조언도 해주면서 회원들과 자주 만나 동우회는 해가 갈수록 큰 발전을 하게 되었다.
6. 문학, 그림, 서예 등 수준 높은 작품 제작
이종주 시장의 업적 중 이면(裏面)에 놀라운 생애사 한 페이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릴 적부터 문학, 서예, 그림 등에 특출함을 들어내었고, 퇴직 이후에는 화가로서의 놀라운 재능으로 단독 또는 출품작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고성 이씨 재실, 동창회, 기관단체, 선후배들에게 훌륭한 작품들을 기부하였다. 또한 글씨에도 뛰어나 모교 상원고등학교 상징탑, 대구상업태극단 학생독립운동 기념탑, 각종 비문, 자작 글, 병풍, 부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 예로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대통령) 석주 이상용(石州 李相龍) 지사의 추모비를 1960년 달성공원에 건립하였을 때 이은상 선생이 지은 비문을 이 시장이 썼다. 그 때 대구시 총무과 하급 직원이었지만 후손이면서도 문필가로 인정받아 썼던 대작(大作)은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2012년 8월 21일, 이 시장께서 79세 때 "아름다운 대구" 서양화 달구벌 전을 중구 봉산문화회관에서 개최하였는데 총 39점이 전시되었다. 그림들은 달성공원, 신천, 팔공산, 대구상원고(구 대구상고) 등 한결같이 정다운 대구의 옛 풍경으로서 평생토록 고향사랑을 그림으로 표현한 수작들이었다. 이날 절친한 친구들, 선후배, 전 시장들과 대구경북의 원로, 정계, 재계 인사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전시를 축하했다.
2012년 당시 김병권 대구행정동우회장과 하종성 사무국장이 진행하는 축하행사에서 주인공 이 시장의 인사말과 김무연 전 경상북도지사, 이상희 전 내무부장관의 축사, 이의익 전 대구시장과 윤순영 중구청장의 축배 선창이 있었다. 이종주 님께서는 친구분들과 가까운 선후배들의 두루 만남을 목적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필자도 이 행사에 참여하여 영상촬영을 하면서 전시기간 동안 안내도 하였다.
Ⅳ. 백중천도법회 – 이종주, 이상희 전 시장 두 분을 추모
이상희, 이종주 전 시장 두 분이 작년과 올 봄에 갑자기 떠나셨기 때문에 가족들과 지인들은 많은 아픔이 있었다. 그래서 양 가족은 지인을 통하여 영험이 있는 분에게 천도재(遷度齋)를 지내줄 것을 요청하여 8월 30일 팔공산 좋은 곳에서 영생불멸의 '백중천도법회'를 올리는 뜻깊은 행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 날은 음력 7월 보름 백중(百中)으로 조상의 사당이나 묘에 차례를 지내는 속절(俗節)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불교에서는 조상들에게 기도와 설법을 통하여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치르는 날이라고 한다. 이 날 오전 10시부터 세찬 비가 계속 쏟아졌다. 일행 10여 명은 함께 모여 두 분의 이름을 적어올리고 엎드려 축원을 하였다.
이종주 님! 이상희 님!
오늘 존경하는 두 분을 아직도 그리움으로 못 잊어하면서 아픈 마음 가눌 길 없어 다시 한 번 생생한 님의 말씀을 듣고 못 다한 사연을 말씀드리고자 가족들과 지인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오늘 님들을 모신 백중날 뜻깊은 행사에 세찬 비까지 쏟아졌으니 비를 타고 오셨는가 봅니다. 행사를 주관한 분께서 훌륭한 설법이 끝나고 선녀 같은 예복차림을 한 분이 청아한 음성으로 '회심곡(回心曲)'을 읊어 드렸는데, 틀림없이 저희들을 반갑게 맞이하시고 가족, 지인들의 간절한 기원을 받으신 후, 차려드린 음식 많이 드시고 편안히 잘 가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저희 지인들은 엎드려 말씀 올립니다.
그 큰 그늘에서 사랑과 은혜 입은 여기에 모인 저희들은 잘 모시지 못한 자책감과 아쉬움에 눈물을 삼키고 님을 불러봅니다. 낳고 길러주신 그 은공 헤아리지 못 하고 무심하게 보냈으며, 위급한 님 보호에 소홀했던 어리석은 저희들을 용서해주시고, 근심 걱정 없는 좋은 곳에 가셔서 편안히 계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고뇌를 겪으시며 열정으로 이룩해 놓으신 업적과 교훈, 저희들은 잊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드리고, 우리 자손들에게도 길이 보존토록 명심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님의 크고 위대했던 생애와 업적을 다 같이 돌아보면서, 바라옵건데 여기 많은 사람들과 부족한 저희들에게 영험한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Ⅴ. 결언(結言)
이종주 시장께서는 60년대부터 36년 간 공직근무를 하는 동안 많은 업적과 화려한 경력을 쌓고 공직에서 물러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 소박한 생각, 많은 사람들에게 인연을 맺고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자서전에 남겼다. 동우회 회원들이 보는 그 분에 대한 인상은 각기 여러 가지 면을 얘기할 수 있겠으나 공통적인 몇 가지가 있다.
먼저 공직 입문 후 맡은 바 임무 수행에 최선을 다하고, 아이디어를 접목시켜 우수사례를 남긴 업적에 대하여 많은 후배들은 본받아야 할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조상, 부모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이어받고, 태어난 고향 안동과 제2 고향 대구를 위한 지극한 애향심, 모교 사랑 등 본인의 성장을 크게 만들어준 뿌리 깊은 근본적 사랑에 보답코자 온 몸으로 바친 산 증인임을 보여주었다.
세 번째, 이종주 시장께서는 60연대에서 현재까지 이르는 동안 대구시, 대구행정동우회원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평생 동안 대구 발전에 이바지함으로서 우리 모두의 훌륭한 표상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우리들은 오늘 발전하고 있는 대구시 역사를 뒤돌아보고 이종주 시장님의 업적을 후배들에게 알리면서, 남은 생애에 값진 삶이 되도록 크게 다짐을 해보는 것이 우리들의 책무가 아니겠는가.(끝)
<참고 문헌>
● 重山 李鐘宙 稀年文集, 廉平奉職(염평봉직), 2004년 발행
● 대구행정동우 (이상희 시장과 나) 2021년 발행
● 대구행정동우 (이규이 시정과 나) 2017년 발행
<참고 사항>
이종주 전 시장님의 업적과 사진 일부는 행정동우회 사무처와 김제학, 김성길 이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重山 李鐘宙 稀年文集, 廉平奉職(염평봉직), 2004년 발행
대구 팔공산 입구 식당 정원에서 (2014. 6. 10, 촬영 이태희)
첫댓글 이 국장님, 중산 이종주 시장님에 대한 장문의 글을 구구절절이 실감은 물론 애절한 사연 까지 잘 보았습니다. 그 전 해 돌아가신 범사 이상희시장님과 함께 고인의 명복을 다시한번 빌니다. 이런 많은 내용의 글을 작성하기 위하여 자료를 모으고 훌륭한 원고로 탄생시키느라 본인의 건강이 손상되는 줄도 모르고 강행을 하였지요. 이제는 자신의 건강괸리에 최선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