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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날에 낙담말라
잠 24:10-14
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11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12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 24:10-14 / 위기에 직면하여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면 그것은 이미 너에게 그 일을 헤쳐 나갈 힘이 없다는 것이다. 11) 죽을 자리로 끌려가는 이를 그냥 두어서는 정말 안 된다. 모든 힘을 다하여 그 억울한 이를 구해 내야 한다. 12)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야' 하고 네가 말한다 해도, 사람의 속마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네 속생각을 모를 리 없다. 네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네가 무슨 생각을 품고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를 성싶으냐?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실대로 보상하신다. 13) 얘야, 꿀을 먹어라. 꿀이 몸에 얼마나 좋은지 아느냐? 송이꿀은 또 어떻고? 입에서 달콤하게 녹지 않더냐? 14) 지혜는 어떻더냐? 지혜가 너에게 꿀처럼, 송이꿀처럼, 그러한 줄 알아라. 네가 지혜를 얻게 되면 살아갈 앞날에 걱정이 없으리라. `어찌하여 내겐 이다지도 소망이 보이지 않는가' 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으리라.
환난을 맞이했을 때 담대할 것과 약한 이웃을 도와야 하는 이유, 지혜를 가진 사람의 밝은 미래에 관해 교훈합니다.
환난 날에도 힘을 내라(10) 원문을 직역하면 “만일 재앙의 날에 연약함을 보인다면 너의 힘은 적다”입니다. 모든 일이 평탄할 때에는 누구나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고 또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심각한 역경에 처하게 되면 낙담하기 쉽고 의기소침하여 용기를 잃으며, 일을 중단하고 절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 신앙은 역경의 때에 판가름이 납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전쟁의 상황에서 힘을 발휘합니다(5). 새번역성경은 “지혜가 있는 사람은 힘이 센 사람보다 더 강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기운이 센 사람보다 더 강하다.”(5)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환난 날을 맞이했을 때 무너지지 마시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를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약한 자를 건져주라(11-12) 인간의 행동을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것은 잠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동료가 생명을 위협받는 위험에 직면하였는데 모른다고 변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만큼 이웃에 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마 25:31-46). “마음을 저울질하신다”라는 말은 그 마음의 생각을 헤아려 안다는 뜻인데, 이는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악한 내면을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지혜로 준비하라(13-14) 송이꿀은 벌집에서 뚝뚝 떨어지는 꿀로서 세상의 공기로 인해 오염되지 않은 가장 순수하고 신선하며 달콤한 꿀입니다. 이 송이꿀이 ‘좋고’, ‘달콤하다’라는 것은 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맛도 좋아서 기쁨을 준다는 뜻입니다. 꿀을 먹는 것과 지혜를 얻는 것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지혜를 발견하면 그의 미래가 달콤하고 소망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인생, 지혜 있는 자녀, 지혜 있는 가정과 공동체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귀한 보배로 상징되는 넉넉한 생명과 풍요로운 삶을 주실 것입니다.
적용: 자녀들을 양육할 때 영혼을 망치는 이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이 아니라 영혼을 즐겁게 하고 밝은 미래를 열어주는 하나님의 지혜로 양육해야 하겠습니다.
평생을 고결한 성품을 유지하며 교육에 몸 바친 스승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승의 마지막을 예상한 제자들이 크게 슬퍼하자 스승은 미소를 띠며 말했습니다. "절대 슬퍼하지 말아라. 가치 있는 죽음은 삶에 의미와 사랑을 부여한다는 것을 너희들은 모르느냐?" 그러자 한 제자가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선생님께서 언제나 살아계셔서 저희와 함께하길 원합니다." 제자의 말에 스승은 제자들을 토닥이며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것은 죽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꽃들을 보아라, 플라스틱 꽃은 죽지도 않지만, 열매도 맺지 못한다."
< 설 교 >
잠언 24:1-34 / 정한조 목사
악인의 형통1(1-10절)
잠언 1-9장은 ‘젊은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솔로몬왕이 장차 나라의 지도자가 될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었던 말씀을 모아놓았습니다. 10-24장에는 솔로몬왕과 지혜자들이 전한 말씀을 모아놓았습니다. 그중에서도 10:1-22:16까지에는 솔로몬왕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의 은사로 말한 단편경구(어록) 375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22:17-24:34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잠언입니다. ‘솔로몬 제2잠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부분입니다.
(1-2)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파괴한다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윤리적, 도덕적으로 낮은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라(그것이 전부라면, 성경은 윤리교과서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하나님께 등을 돌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하게 되면, 가장 크게 여겨지는 죄는 하나님을 몰랐던 것과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깊이 후회가 되고, 참회가 됩니다.
‘부러워하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그 사람들에게 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부러워하면 “저 사람도 하는데 나는 왜 못해?”라고 생각하며 따라하게 되어, 자신도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함께 있으면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처럼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19-20)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그들이 가는 길은 결국은 멸망의 길입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쌓은 것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이 땅에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3-4)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집’은 ‘건물’을 뜻하기도 하고, ‘가정’, ‘가문’, 더 나아가 ‘국가’를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그리고 ‘지혜’와 ‘명철’, ‘지식’은 모두 비슷한 의미로 ‘말씀’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데 처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설계’입니다. 좋은 집일수록, 큰 집일수록, 높은 집일수록 설계가 좋아야 합니다. 설계가 좋지 않거나 없으면,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집을 지을 곳이 지진이 있는 곳이면 더욱 그러합니다.
집은 지혜와 명철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견고하게 된다’고 하고, 방들은 ‘채우게(채워지게) 된다’고 모두 수동태로 표현합니다. 가정과 국가를 바르게 세워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 지식이 아니라면, 인생에 비바람이 불어대고,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 더욱이 인생에 지진이 일어나면 우리의 힘으로는 이기거나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5-6)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힘이 센 사람보다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강하고, 기운이 센 사람보다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 더 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면 전략을 세워야 하고, 참모가 많아야 승리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의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인생을 바르고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출발이자 과정이며, 마침입니다.
(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우리의 인생에 환난이라는 손님이 찾아오면, 우리의 실상, 한 없이 약한 우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이 오기 전에 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에게 환난은 자신을 새롭게 하고 거듭나게 하는 출발이 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환난은 무너짐의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2(11-22절)
(11-12)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와 ‘살륙을 당하게 된 자’는 모두 ‘복수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죽을 죄를 지어서 끌러가는 사람이 아니라 무고함에도 유죄판결을 받았거나,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건져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자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지는 것이 당연하듯, 안식일일지라도 사람을 살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혹 외면하는 일이 있다면, 행위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상선벌악’, 선을 행하면 상을 주고, 악을 행하면 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큰 건물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사고나 지진과 같은 재난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구조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살아 있는 사람의 지위고하나 빈부귀천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으면, 그 어떤 죽은 사람보다도 우선해야 합니다.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사망자를 수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물보다 우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재해처리를 해야 합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13-14)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지혜와 명철인 하나님의 말씀을 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송이꿀’은 ‘최고 품질의 꿀’을 의미하기도 하고, ‘벌집에서 흐르는 꿀’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꿀을 예찬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러나 꿀이 얼마나 좋은 식품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꿀의 특징을 두 형용사로 표현을 합니다. ‘좋다’와 ‘달다’입니다. 꿀은 몸에도 좋고 먹으면 맛이 있듯이,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의 말씀도 우리의 영혼에 유익합니다. 그래서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에 좋을 뿐 아니라 달다고 합니다. ‘달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어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입으로 맛을 보아야 합니다. 과거 간장광고의 유명한 CM송이 있었습니다. “보고는 몰라요. 들어서도 몰라요. 맛을 보고 맛을 아는 00간장”이라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맛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단맛이 있습니다.
(21-22)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하나님과 왕을 나란히 세우며, 경외해야 함을 말씀하는 것은 그 왕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합당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는 왕을 바르게 섬기는 사람은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도 바르게 섬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반역자와 사귀지 말아야 함은, 왕정시대에 최고의 죄는 ‘역모’입니다. 역모는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죄가 없기에 역모를 저지른 사람은 물론이고, 가족과 친인척들까지 함께 참수합니다. 눈에 보이는 왕에 대한 역모가 그러하다면,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역모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짓는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잠언(23-34절)
22:17-24:34의 잠언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혜자의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22:17-24:22의 지혜자와 23-34의 지혜자는 다른 사람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23절이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로 시작됩니다.
(23)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공정한 재판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만약 악한 사람(죄인)을 옳다고 하면 백성들로부터 저주와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재판을 할 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안 되고, ‘안면무죄 생면유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법은 법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26)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적당하다’의 원 의미는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는 알맞다’인데, 지금은 ‘대충하다’로 더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본문의 ‘적당’은 ‘올바름’, ‘공정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입맞춤’은 친밀함의 표현입니다. 서양에서는 친밀함의 표현으로 볼을 맞추는데, 그것과 유사합니다. 표준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성경은 26절을 ‘바른 말을 해 주는 것이 참된 우정이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언어에 진실함과 올바름을 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태하지 말 것을 강조하며 끝이 나는데, 30-34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30-34)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화장실을 보면 그 집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화장실’이 감추어진 곳, 드러나지 않는 곳을 정리를 하면 드러나는 곳은 당연하게 정리를 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른 곳은 정리가 되었음에도 화장실이 정리가 되지 않은 집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는 화장실보다 더 그 사람과 집을 알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밭’과 ‘포도원’입니다. 밭과 포도원은 농부에게 생명과 같은 곳이고, 관심과 정성의 초점이 되는 곳입니다. 그곳들이 가시덤불과 거친 풀(찔레)이 가득하고, 돌담이 무너져 있다면 들어가 돌보기도 힘든 상태인 밭, 완전히 황폐화된 밭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보고서 지혜자의 생각이 깊어졌고, 훈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혜 없고, 게으른 농부의 밭을 보며, 자신의 삶을 투영해 본 것입니다. 타인의 삶을 자신에게 타산지석으로, 반면교사로 삼은 것입니다. 깨달은 눈으로 보고, 깨달은 귀로 들으면 세상은 진리를 깨우쳐주는 교과서와 같습니다.
33절에는 ‘좀 더’라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조금의 잠’, ‘조금의 졸음’ ‘조금의 손을 모음’이지만, 그 ‘조금’이 합해지면 인생 전부가 됩니다. 빈궁(가난)이 ‘강도 같이’ 오고, 곤핍(빈곤)이 ‘군사 같이’온다고 합니다. ‘강도 같이’는 예상하지 못한 때입니다. 그리고 ‘군사 같이’는 방어할 수 없게입니다.
시인 바이런(G. G. Byron)이 말한,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집니다. 즉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의 삶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오늘의 삶의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형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보다 더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명철, 지식으로 집을 짓고, 꿀과 같은 말씀을 먹어야 하는 것도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게으르고 지혜 없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면,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지혜와 명철의 말씀을 통해서는 얼마나 깊은 깨달음이 있겠습니까?
오늘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악인이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소망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일터를 세워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버리고, 지혜와 명철, 지식의 말씀을 우리의 인생 집을 건축하는 설계도와 지침서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꿀과 송이꿀과 같은 지혜의 말씀을 날마다 먹어, 그 맛의 깊이를 평생 더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삶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신실하게 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매일의 생활 가운데 우리의 언어가 바르고, 지혜롭고, 따뜻하여 사람들을 세워주고 살리게 하시고, 언제나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며, 주어진 삶에 신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르게 살지 않으면서도 형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해 보신 적 있습니까?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2.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맛을 깊이 느낀 때는 언제이었습니까? 그 말씀의 맛을 이어가기 위해서, 또 그 맛을 경험하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을 결심해 보시겠습니까? 구체적으로 결심해 보십시오.
3. ‘좀 더’, ‘좀 더’, ‘좀 더’가 인생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좀 더 깨어 있고’, ‘좀 더 신실하며’, ‘좀 더 부지런’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겠습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지혜자의 삶
잠언 24:1-14
오늘 읽은 말씀은 지혜 있는 사람의 삶이 어떠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세요.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잔해를 말함이니라.” 잠언 3장 31-35절까지를 읽어보십시다.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하였습니다.
잠언 23장 17절에는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장 시험받기 쉬운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오히려 세상에서 잘 되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옛날 성도들의 한결같은 시험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경우를 보세요. 하박국 1장 13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하박국의 심정을 말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여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하박국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생활 철학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종종 어려운 시대를 당하게 마련이고 이처럼 어려운 시대가 올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고민이 깃들이고 고민이 있는 곳에 또한 그것을 견디어 나아갈 사상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선지자 하박국에 대하여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가지 방면으로 어려운 시대에 살았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유대 사람들의 전설에 의하면 하박국은 다니엘 때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다니엘이 사자 굴에 갇혔을 때에 자기 밭에서 일하고 있던 하박국을 천사가 데리고 가서 죽을 쑤어서 다니엘에게 먹인 후 또 천사가 유대 땅으로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하박국의 시대를 요시야왕의 침범하던 때, 그러니까 앗수르의 도성인 니느웨가 주전 612년에 멸망하고 바벨론이 권세를 잡던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 때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가장 어려운 때입니다.
유대 왕국의 소망으로 믿던 현군 요시야왕은 므깃도 전쟁에서 주전 608년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동에서는 이스라엘의 숙원인 앗수리아와 바벨론이, 서에서는 애굽의 세력이 노리는 틈바구니 속에서 허덕이던 때였습니다. 니느웨가 함락 당하고 원수의 나라 앗수리아가 멸망당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통쾌한 일이지만 그들은 새로운 폭군 바벨론의 멍에 아래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던 뜻 있는 선지자 하박국의 가슴에는 시대적인 고민으로 찼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의 별명이 ‘구약의 도마’라고 까지 하리만큼 여러 가지 의심에 꽉 차 있었습니다.
하박국 1장 2-4절에 하박국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의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왜 의인이 고통을 받습니까? 왜 악한 사람이 세상에서 번영합니까? 이와 같은 의심은 가슴에 간직한 채 하박국은 그의 파숫대에 서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떤 해답을 주시나 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주신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의인의 고생도 잠깐이요, 악인의 번영도 잠깐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장구한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고 의를 행할 때 나라는 왕성하며 사방의 원수들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수한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에 빠질 때, 불의가 이스라엘 사회를 뒤덮을 때 이스라엘은 쇠약해지고 결국 나라는 외적에게 침범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의는 흥하고 악은 망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주를 섭리하시고 역사를 주장하시는 변함없는 철칙입니다.
그러나 인류역사를 통해 보노라면 가끔 그렇지 않은 일시적인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런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있는 그대로 악한 사람이 오히려 흥왕하고 하나님의 말씀 법을 따라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은 오히려 고생을 하게 되니 문제는 있는 것입니다.
가령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생애를 보세요. 요셉은 소년 시절에 그 자신 하등의 잘못이 없었지만 그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가는 상인들에게 팔리게 되었고 애굽에 가서도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으면서 일을 잘 보았습니다. 그저 충성스런 종으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 장군 집에서 총무로 일보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기 위해서,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 애썼는데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를 당하여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감옥에서는 술 맡은 관원장에게 배신당해서 여러 해 동안을 말하자면 옥중에서 고생하게 된 것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아 어떻게 하나님이 같이 하는 사람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고생할 수 있을까?’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자기 동족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모든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은 사람’입니다.
구약의 에스더서를 보세요. 악인 하만은 창성하고 의인 모르드개는 그 수하에서 구박을 받았습니다. 한 때는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대 사람 전 민족이 하만의 흉계에 의해서 풍전등화와 같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이르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필귀정이란 말도 있지마는 악인은 망하고 의인은 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서는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의인보다는 악인이 더 승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종국은 악은 망하고 의는 흥하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미국의 흑인 목사 로빈슨은 “악인에게는 최후의 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악한 것일수록 일시적이며 순간적입니다. 반면 선한 것일수록 미래가 분명합니다. 진짜와 가짜를 얼른 보아서는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짜가 진짜보다 더 좋아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두고 보세요! 그러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아도 안 그래요? 진실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얼른 보아서는 모릅니다. 오히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 대개 자기 선전을 잘 하기 때문에 더 좋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나보면 압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일 저런 일 겪는 동안에 그 진상이 나타납니다.
이 땅에서도 상선벌악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일시적으로 악인이 흥왕하고 오히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성 없는 흥왕을 바라지도 말 것이요 일시적인 고난 역시 성도들이 인내로써 견디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도 말라,” 누가 지혜 있는 사람입니까? 오는 본문이 말씀하는 것처럼 보통 사람 같으면 형통하는 것을 보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잠잠히 지켜볼 수 있는 지혜 있는 눈과 마음의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1-15)의 다윗의 시를 기억하시지요?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마음이 속시원히 그 의심이 가시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번영이 잠깐이요 의인의 고생도 잠깐이라고 하지만 왜 하필이면 잠깐이라도 그런 억울한 일을 하나님이 용납하실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회답은 주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악인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흥왕할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 의인, 지혜있는 사람의 마음은 믿음으로 내세에 기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너무 창성하면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그 신앙이 태만해지고 세상에 빠지기 쉬워서 그럽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어려운 고비가 있을 때 의인의 믿음이 밝아지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네가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과 의지하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잘 되면 좀 교만합니다. 그러나 어려워지면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환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담대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였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잠언 24장 16절에 뭐라고 말씀했어요?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물질과 신앙,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이 두 가지는 반비례하기 쉬운 요소입니다. 수학에도 유크릴의 원리를 따라가는 보통기하학이 있고, 유크릴의 원리를 거스르는 고등기하학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 세계에도 구약의 신앙인에게는 ‘여호와를 섬기면 복을 받을 것’ 즉 신앙과 물질 생활이 정비례하였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오히려 은혜받은 성도에게는 주를 위해 고생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깁니다.
참된 신앙의 가치란 어떤 물질적인 것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예수를 믿으면 당장 이 세상에서 즉각적으로 보응을 받는다면 교회의 성도의 모임이 아니라 사기꾼이나 모리배의 모임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가슴 아픈 일은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믿음보다도 물질을 앞세우는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했는데 먼저 물질의 번영을 구하는 것은 미신이지 참 신앙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지 마세요. 동요될 필요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있는 사람의 삶의 자세입니다.
시편 42편을 보세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말하여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
잠언 24장 10-20절 / 제임스 김 목사
여러분, 지난 주 유 권사님 옆에 앉아 있었던 꼬마 아이 기억나시나요? 그 꼬마가 유 선교사님 부부의 손주인데 아마 유 권사님께서 그 손주에게 집에 가셔서 나중에 아이가 잠들기 전에 성경책을 읽어 드리고 기도하시면서 아이에게 수요기도회 때 제가 설교한 내용 중 무엇이 기억나는지 물으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라고 말하더랍니다. 하하. 그 말씀은 우리가 묵상한 전도서 9장 18절 상반절의 말씀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묵상한 잠언 24장 1-9절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쉽지 않을 것 같아 잠깐 지난 2주 동안 우리가 잠언 24장 1-9절 말씀 중심으로 지혜 있는 자는 어떻게 행하는지 한 3가지로 이미 받은 교훈을 좀 복습하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지혜 있는 자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1절), (2) 둘째로, 지혜 있는 자는 자기 집을 견고하게 세웁니다(3절), (3) 셋째로, 지혜 있는 자는 전략으로 싸워 승리합니다(6절).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4장 10-20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한 6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이 6가지 교훈을 받으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깨달음을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라”[(현대인의 성경) “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면 너는 정말 약한 자이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 어려움이 우리 홀로 감당하기 너무나 힘들고 벅차므로 주위에 도움을 청해보지만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충분히 낙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의지할 분이 주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 간구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주님으로부터 응답이 없는 듯 해보일 때 우리는 더 큰 낙심을 할 수가 있습니다(눅18:1). 이렇게 낙심하고 또 낙심할 때 우리의 힘도 많이 약해져서 우리는 심신이 지쳐 자포자기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 사무엘상 17장 32절을 보면 목동 다윗이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여기서 “그”는 바로 “블레셋 사람의 싸움을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을 가리킵니다(23절).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24절) ‘그로 말미암아 낙담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32절). 여러분은 이 다윗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다윗의 말을 듣고 골리앗으로 인하여 더 이상 낙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골리앗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였는데 저와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하지도 않으면서 낙담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도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사울 왕에게 자기가 나가서 그와 싸우겠다고 말한 것일까요? 그 말을 들은 사울 왕의 반응을 보십시오: “…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33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용사인 골리앗과 소년인 다윗과의 싸움은 상대도 되지 않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대도 되지 않는 싸움은 아예 하려고 하지도 않는게 본능입니다. 그 이유는 싸움에서 질줄 뻔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낙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낙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골리앗과 싸우려고 한 것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37절 상반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 다윗은 구원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골리앗의 손에서 건져내실 줄 믿었습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다윗이게 있었기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낙심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다 보면 힘들고 어려움으로 인하여 낙심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선포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시 42:5, 11;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며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리고 우리는골리앗과 싸워 승리한 소년 다윗처럼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도 믿음으로 잘 극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엡3:12)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 하려고 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하며 살인자의 손에 끌려가는 사람을 구출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라”]. 여러분들도 뉴스를 통해서 이미 들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금년 4월 15일 나이지리아 북동부 보르노주 치복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보코하람이 여학생 276명을 납치했습니다. 이후 수 십명이 탈출하여 지금은 약 219명이 아직 붙잡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론 아직도 나이지리아 정부가 그 219여명의 여학생들을 구출해 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인터넷 신문(7월 9일)을 보닌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나이지리아 당국이 밝혔다고 합니다. 전직 대통령과 주지사, 의회 지도자 등으로 이뤄진 나이지리아 국가위원회의 고드윌 아크파비오 의장이란 사람이 기자들에게 "치안 요원들이 소녀들의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어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고 함. 그는 소녀들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구출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들 외에도 지금 이 세상에는 억울하게 악한 사람들에게 납치되서 감금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한 예로 지금 세상 여기 저기서 어린 소녀들과 소년들이 성노예(sex slave)를 팔리는 것입니다. 호주 시드니에 위치한 국제정의선교회 (International Justice Mission Australia) 호주 지부에 의하면 필리핀 세부(Cebu) 지역에서 어린 소녀들과 소년들이 성노예로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한 사역을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선교회는 성노예로 팔려간 아이들을 구출하는데 필리핀 정부와 경찰과 검찰에 도움을 주어 5년간 사역을 통해 성노예로 팔린 220명의 아이들이 구출되었고 아이들을 착취한 90명이 넘는 어른들이 구속되었다고 합니다(인터넷). 또 다른 예는 미국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2012년 5월 21일 미 언론에 따르면 미시간법대와 노스웨스턴법대가 법원 자료 등을 분석한 결과 유죄판결을 받은 뒤 복역 중에 뒤늦게 무죄로 확인된 사례가 최근 23년간 무려 2천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렇게 이 세상엔 억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4장 11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우리에게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을 구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속히 그들을 구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11절 말씀을 10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살인자의 손에 끌려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10절) 그들은 충분히 낙담(낙심)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10절). 만일 우리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낙심과 절망 속에서 다 포기하려고 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힘의 미약함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이 억울하게 죽게 된 미약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억울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 속히 구출해 주길 간절히 바라지 않겠습니까? 만일 저와 여러분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그저 낙심과 절망 가운데 자포 자기 하여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면 어느 누군가가 우리를 그 상황에서 속히 건져 주길 간절히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저와 여러분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보면 속히 그를 구출하고자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4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찌라도 네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 [(현대인의 성경) “너는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네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라. 네 마음을 살피시며 너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느냐? 그는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줘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그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회피하지 말아야 할 참으로 중요한 책임은 무엇일까요? 에스겔 33장 7-9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피를 우리 손에서 찾으시겠다고 하시는 것 같이 들립니다. 물론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고 자기의 죄악으로 죽으면 우리의 생명은 보전되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겔33:11).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죽음으로 향하는 자가 우리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그 죽음의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걸어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살피시며 지켜보고 계시기에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핑계나 변명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잠24:12하).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복음 전파의 책임을 충실히 잘 감당하여 주님께 칭찬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3-14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현대인의 성경) “내 아들아, 꿀을 먹어라. 이것이 좋다. 특별히 송이꿀은 더 달다. 이와 같이 지혜도 달콤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어라. 분명히 너에게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며 너의 희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꿀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가끔 아내가 인삼차를 타줄 때 설탕대신 꿀을 넣어서 저에게 줘서 마시곤 합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꿀이 몸에 어떻게 좋은지 알고 계십니까?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꿀은 혈당 농도를 조절해 주어 몸의 피로를 없애 주고 칼슘, 마그네슘이 있어 불면증 신경통 관절염에 아주 효과가 뛰어나고 각종 염증(고름)에 좋다’고 기록되있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리고 히포크라테스나 12세기 유태인 마이 모니드의 ‘무병장수론’을 보면 꿀은 최고의 보약이며 변비에 좋고 목욕한 뒤 목이 마를 때 마시면 좋다고 나와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꿀은 벌이 미리 소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흡수가 잘되고, 또 여느 당분과는 달리 신장이나 위의 내벽을 자극하지 않아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며, 또한 칼로리가 우유의 여섯배나 되고 칼슘, 아연, 구리 등 무기질이 많은 알칼리성 식품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어느 웹싸이트를 보닌까 벌꿀이 왜 좋은이 그 효능을 다음과 같이 12가지로 요약해 놓았습니다(인터넷): (a) “제독작용: 해독과 함께 종창에도 이용한다. (b) 조변작용: 설사나 이질에 좋고, 만성이 된 상습 변비에도 이용된다. (c) 진통작용: 가슴앓이나 근육통, 치통, 유방염 등의 통증에 이용된다. (d) 치해작용: 기침이나 기관지염 등에 이용된다. (e) 안신작용: 노이로제나 놀란 데에 응용되며 불면증, 야뇨증에 좋다. 어린이가 정서불안증을 보이고 눈꺼풀이나 입 가장자리가 경련을 일어날 때 이용된다. (f) 생기•소염작용: 새살을 돋게 하며, 종기나 편도선염, 중이염, 인후염 등 화농성 질환에도 이용된다. (g) 자음작용: 음위, 즉 발기부전을 치료한다. (h) 윤피작용: 얼굴을 윤택하게 해주고, 습진이나 소아단독(열기에 의한 독성으로 피부가 벌겋게 되면서 화끈거리고 열이 나는 병증)에 이용된다. (i) 부인과에 대한 작용: 난산이나 대하증 등에 이용한다. (j) 보위작용: 비위장 소화기의 기능을 좋게하고 위를 보호한다. (k) 장수에 대한 작용: 소련에서 110~120세의 고령자 200명을 조사해 보니 대부분 양봉을 하는 집안에서 자랐거나 늘 꿀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l) 살균작용: 박테리아, 디프스, 파라티프스 균을 살균하는 작용이 있다. 즉 꿀 속에서는 박테리아가 생존할 수 없으며, 디프스 균은 48시간, 파라티프스균은 25시간, 티프스 바이러스는 5시간, 만성 기관지염을 일으키는 균은 4일, 적리(급성 전염병인 이질의 한 가지)를 일으키는 아메바는 10시간 안에 모두 사멸된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3-14절 상반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꿀을 먹어라. 이것이 좋다. 특별히 송이꿀은 더 달다. 이와 같이 지혜도 달콤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어라 ….” 지금 잠언 기자는 꿀이 좋으닌까 먹으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송이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송이꿀이 더 달다”고 말하면서 지혜도 송이꿀 같이 달콤하니 지혜를 얻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송이꿀”은 다양한 종류의 꿀 중 벌통에서 막 흘러내리는 것을 채취한 꿀이라고 합니다. 이 꿀은 가장 달콤하고 순수한,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꿀로 통한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잠언 기자가 “지혜”를 “송이꿀”에 비교한 이유는 송이꿀이 가장 달콤하고 순수하고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것처럼 지혜도 가장 달콤하고 순수하고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어떻게 송이꿀과 같은 지혜는 순수하고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을까 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의하면 꿀은 반석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시편 81편 16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렇게 꿀이 반석에서 나오듯이 지혜도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 지혜는 가장 달콤하고 순수하고 티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잠언 4장 5-7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우리는 잠언 기자의 말대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지혜(깨달음)를 얻어야 합니다. 그 만큼 지혜가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지혜를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지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꿀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잠30:5)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평생 옆에 두고 읽고 또한 주야로 묵상할 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송이꿀을 먹듯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지혜를 얻어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언 24장 1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이것(지혜)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지혜를 얻어야 하는 이유는 지혜를 얻으면 분명히 우리에게 밝은 미래(장래)가 있고 소망(희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3장 17-18절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내세의 소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세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영접해 주실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시73:24). 그래서 성경 잠언 14장 32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송이꿀과 같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어 지혜를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넷째로,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5-16절을 보십시오: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얻는 저와 여러분은 악한 자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그들로 인하여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물론 악한 자들만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악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이리 저리 자빠지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죄악된 세상의 유혹으로 인하여 죄를 지므로 낙심하며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쓴 아삽의 경우는 악인의 형통을 보고 부러워하여 거의 넘어질 뻔했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인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악인들은 잘 먹고 잘 살고 돈도 잘 벌고 등등 그런 모습을 볼 때에 부러워하여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지난 번 교회 34주년 기념 말씀 집호 둘째날에 강사 목사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1-25절 말씀 중심으로 “구원의 증인”이란 제목 아래 설교를 하셨는데 그 말씀 내용 중 23절을 다시 보면 이렇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는 사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탄이 예수님만 넘어지게 하는 자인가요? 아니 잖습니까. 사탄은 예수님의 교회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넘어지게 하는 자입니다. 지금 사단은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바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사도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걷는데서 돌이켜 세상의 넓은 길을 걷게 하려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 사람의 뜻을 생각케 하여 주님의 뜻을 버리고 내 뜻대로 살게 만들려고 계속해서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뿐만 아나라 우리의 가정과 교회도 엿보아 어떻게 해서든 우리 모두를 넘어지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 여기 저기서 여러 교훈을 생각해 볼 수가 있겠지만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4장 16절 말씀에만 근거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넘어지되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일곱 번, 아니 무수히 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넘어지므로 말미암아 실망도 되고 죄책감으로 인하여 괴로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오뚜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오뚜기를 치며 넘어졌다가도 다시금 금방 일어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탄과 악인들이 우리를 쳐서 넘어지게 한다 할찌라도 다시금 일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오뚜기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오뚜기는 아래 부분이 가장 무거우므로 우연히 윗 부분이 아래로 기울어지더라도 중력의 영향 때문에 가장 무거운 부분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는 속성이 있어서 결국 언제나 똑바로 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게중심이 아래에 위치해야만 안전하고, 외부의 영향에 순간적으로 휘청거릴지라도다시 중심을 잡고 서게 된다는 점입니다(인터넷). 저는 우리 그리스도들로 하여금 다시 일어서게 하고 다시 중심을 잡고 서게 해주는 “무게중심”은 바로 반석이신 주님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수 없이 넘어진다 할찌라도 주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시되 수 없이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넘어진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주신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일으켜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완수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낙심한 영혼을 다시금 소성시키시므로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능력의 오른손을 우리에게 내밀어 주시사 우리의 손을 붙잡아 다시금 일으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우리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현대인의 성경) “네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말아라”]. 여러분,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본능은 우리의 원수가 넘어질 때에 속으로 기뻐하는 것임. 안 그렇습니까? 우리의 본능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한) 우리의 원수가 넘어질 때 마음 속으로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의 원수가 망할 때 그 모습을 보던지 또는 그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니 내 대신 복수해 주셨구나 라고 생각하며 기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고 마음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에스겔 33장 11절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오늘 본문 잠언 24장 17절에 적용해 본다면 왜 성경은 우리에게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좀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입니다(겔33:11).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원수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우리의 원수가 망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거나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잠24:17, 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은 우리의 원수가 넘어지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성경 본문 잠언 24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무슨 뜻입니까? 만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어기고 우리의 원수가 넘어지던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본 받지 못하고 우리의 원수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모습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의 넘어짐(망함)을 보고 기뻐하면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지도(돌이키실지도) 모른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잠24:18하). 무슨 뜻입니까? 원수의 넘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의 벌을 받아 그 자신도 넘어질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박윤선). 그래서 우리가 이미 묵상한 성경 잠언 17장 5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지니라.”
여러분,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장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성경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맥락에서 오늘 본문 잠언 24장 17절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는 잠언 기자의 말대로 우리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마음에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섯째로, 우리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을 핍박하고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볼 때에 화가 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을 누군가가 눈물나게 만들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악한 사람들을 보면 매우 화가 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참으로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살면 화가 나지 않습니까? 화가 나면서 동시에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 부럽지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능적인 반응이라 생각합니다. 악인들이 이 세상에서 형통한 것을 보면 우리는 충분히 화가 치밀어 오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들의 형통함을 은근히 부러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잠언 24장 19절을 보면 성경은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잠언 24장 1절에서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또한 잠언 23장 17절에서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잠언 기자는 반복적으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오늘 본문 잠언 24장 19절에서는 그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언 24장 20절을 보십시오: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여러분, 악인들에게는 장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밝은 미래가 없고 희망의 등불도 꺼질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에 밝은 미래가 있을 것 같고 또한 평생 그들의 등불이 꺼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일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장럐가 없겠고 그들의 등불은 꺼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3장 18절을 보면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정녕히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잠언 24장 14절을 보면 송이꿀과 같은 지혜를 얻는 자에게는 정녕히 장럐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다 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소망이 끊어지지 않고 분명한 장래(미래)가 보장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지혜를 얻은 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는 행악자들로 인하여 분을 품지 않고 또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도 행악자들에게 분을 품지 말고 장래의 소망이 없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길 기원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얻은 저와 여러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11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since God so loved us, we also ought to love one another)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4장 10-20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 6가지를 배웠습니다: (1) 첫째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둘째로, 우리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출해야 합니다. (3) 셋째로,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4) 넷째로, 우리는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5) 다섯째로, 우리는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6) 마지막 여섯째로, 우리는 행악자들로 인하여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이 해야 할 일들을 행하므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삶에 희망을 주는 믿음
잠 24:10-16
세상 사람은 물론, 우리 믿는 성도들도 실패하여 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과 분명히 다른 것은 '삶에 희망을 주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다시 일어날 힘과 용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이 올 때 낙심부터 할 것이 아니라, 낙심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슬기를 배웁시다. 성경은 이를 해결할 수 있도록 흔쾌히 답을 주셨습니다.
Ⅰ. 환난 날에 미약함을 보이지 말라
환난이란 '궁핍, 재난, 고통'에서 유래했고 「생명의 위협을 받음」을 의미합니다. '미약'은 '용기를 잃음'에서 유래하여 「기울다, 떨어뜨리다, 낙심하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위 둘은 사람이 겪는 환난이라고 지적했고 다양성을 갖습니다. 가령 가난과 궁핍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중병을 앓거나 시험을 받을 때, 무고히 핍박을 받을 때, 그리고 IMF는 6.25사변 이후 가장 큰 환난이라고 합니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잠 24:10) 고통과 슬픔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을 불신하는 것이 되며, 난관 극복을 위해 인위적 수단 방법을 쓰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에 희망을 주는 믿음'이란 현재의 상황을 고려해서 신앙의 가능성인 믿음을 발휘하여 기도를 통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막 9:23,29). 또한 하나님의 연단 후 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기대해야 합니다(히 12:8). 가령 바울의 경우 다메섹 사건 후 아라비아의 3 년간 연단으로 그로 하여금 위대한 선교사로 거듭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행9:3,15, 갈 1:17, 행 13:2). 또한 다윗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하더니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삼하 2:4).
우리의 주변과 이웃, 그리고 집안의 현주소를 살펴봅시다. 환난과 시험을 한번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무지와 미련의 한계 때문에 속 시원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주위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엄습하는 시련도 있고, 성장과 축복을 예비해 놓으시고 환난으로 연단을 주시는 경우도 있으며(롬 5:4), 자신이 뿌린 씨앗일 수 있습니다(갈 6:7).
이때 우리는 증인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잠 24:11).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에겐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고, 살육 당하게 된 자에겐 다윗의 열쇠로 멸망을 분쇄해야 합니다(계 3:7,8). 말하자면 환난 때문에 가분수처럼 문제가 커지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하실 예수님께 갖고 와서 간구하면 모두 다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마 11:28,29, 7:7,8)
Ⅱ. 중심을 통찰하시는 하나님께 보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저울질하십니다(잠 24:12). 저울질이란'숙고하다, 평가하다'에서 유래했고 「하나님의 표준치에 의해 비교 측정함」을 의미합니다. 갈대아 왕 벨사살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 즉「저울질하여 부족하므로 끝나다」라는 의미인데,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단 5:30). 언행심사간 일치 여부와 행위 자체를 저울질하시고 통찰하셔서 반드시 행위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떨며 범죄치 말며,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하고,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하여(시 4:4,5)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성도가 다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행 13:22)
하나님은 삼권을 행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인 동시에 아버지와 목자가 되시며(시 100:3), 사랑이 많으셔서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원죄를 제거해 주셨고(요 3:16, 엡 2;8,9), 선민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지 않고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보호해 주십니다(시 121편). 그러니 우리는 눈을 돌려서 약한 자와 구원받을 자들에 대하여 도와야 하겠습니다. 이웃을 돕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이 의무를 게을리하면 저울에 달린 바 되어 벨사살처럼 치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행악자는 장래가 없으나(잠 24:20) 지혜자는 말씀을 지켜야 상이 큽니다(시 19:11).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중심을 쏟아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을 발휘하여 이웃을 주께로 가까이 하도록 합시다. 그리하면 정녕히 장래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잠 24:14).
Ⅲ. 삶에 희망을 주는 믿음을 활용하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잠24:16)라는 의미는 믿음으로 의인된 우리로서는(롬5:1) 영생은 물론이거니와 금생적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도록 믿음을 활용해야 함을 교훈한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의인은 믿음적 삶을 계속 견지하기 때문에 정녕 장래가 있으리니, 즉 「훗날, 미래」를 보장받고 끊이지 않는 소망인 「영속적인 생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김(경외)으로써 입니다(잠 1:7).
의인이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물리치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욥의 인내가 돋보이고(약 5:11) 베드로의 승리가 귀감이 되며(마 26:75, 벧전 1:9, 5:4) 다윗의 위대함이 하나님께 인정되었습니다(행 13:22). 미국의 죠지 워싱턴은 독립 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실패를 거듭했지만(1775-1782년) 마침내 미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뿐 아니라(1789-1797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국가 기본 확립에 노력한 결과이었습니다.
삶에 희망을 주는 믿음을 활용하려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재기의 힘을 얻으며(마 10:16),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의뢰하면 우리의 큰 도움이 되십니다(시 46:1,7, 렘 16:19), 또한 질병, 가난, 고통에 묻혀 있어도 세리처럼 주님께 무릎을 꿇고 애통하며 회개하면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눅 18:13,14) 주님께 쓰여지기 위해 준비하면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크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마 21:3).
성도 여러분! 승리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확신과 미래 지향적인 소망을 갖고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서 뛰면(롬 13:10) 주님이 세상과 죄악을 이기신 것같이 우리도 '삶에 희망을 주는 믿음'을 따라 그 역사에 동참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요 16:33).
결 론
현대사를 보면 지도자의 잘못이나 우리의 실수 때문에 IMF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업이 실패하고 육체가 병들고 신앙에 의욕이 없고 장래가 막연합니다. 문제는 단순한 잘못이나 실수라기 보다 까닭 없는 저주는 이르지 않느니라(잠 26:2)고 했으니 회개하고 강단에 엎드리며 강력한 인도를 요구하면 하나님께로부터 긍휼과 자비가 뒤따를 줄로 믿습니다.
의인에겐 고난과 환란이 많습니다(시 34:19). 분명한 것은 그 환란이 재앙이 미치지 못하게 하시고 모든 고난에서 건져 주신다는 사실입니다(욥 5:19). 우리는 넘어지거나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환난 날에 미약함을 보이지 말고 기도로 승부하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보여서 승리하심을 받고, 삶에 희망을 주는 믿음을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만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꿀처럼 좋아할 지혜와 성경
잠 24:13, 14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칠 즈음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표현이 구약 성경에 22번 정도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땅에 꿀이 흐른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벌이 나뭇가지나 바위틈 사이에 집을 짓고 거기에 꿀을 만들어 놓습니다. 심지어는 꿀이 벌집에서 넘쳐 흘러내리는 때도 있습니다(신 32:13). 성경은 이런 환경을 놓고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신 11:0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이 말씀만 보면 이스라엘은 살기 좋은 나라로 연상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역을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곤란합니다. 신명기 11장에서 모세가 광야 생활 여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들어가려는 땅은 전에 살던 애굽 땅과 같지 않다.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았지만, 곧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다(신 11:10, 11).
이런 척박한 땅을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 지형을 보면 이런 표현이 부분으로는 맞고 전체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지형이나 정신세계 지식 세계 인간관계를 가끔 꿀로 비유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도 무엇이든지 꿀로 비유하면 단번에 이해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오늘 말씀에서 지혜와 성경을 꿀로 비유합니다. 왜 꿀로 비유합니까? 그 이유를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꿀처럼 좋아할 지혜와 성경」으로 정했습니다.
1. 지혜를 꿀처럼 좋아해야 합니다.
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 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13절을 시작하는 첫 부분 내 아들아(בֵּן) 라는 문구를 보십시오. 여기 아들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입니다(왕상 11:43). 좀 더 뜻을 넓히면 스승이 제자를 부를 때도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의 교육 관례상 실제 생활 지침(훈계)은 아버지 몫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아들아 이렇게 부릅니다. 무엇을 가르치려고 합니까? 꿀을 먹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꿀 정말 좋은 식품입니다. 형편만 되면 많이 먹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사십 년을 넘게 꿀을 먹고 있는데 좋습니다. 솔로몬은 이왕 먹을 바에야 송이 꿀을 먹으라고 합니다.
송이(נוֹפֶת 노페트) 꿀. 흘러넘친다는 의미로서 목청이나 석청을 의미합니다. 이런 꿀은 팔레스타인 산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약재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점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아들에게 굳이 꿀을 먹으라고 할 필요가 있느냐 말입니다. 솔로몬이 꿀을 먹으라는 뜻은 식품으로서의 꿀이 아니라 하나의 비유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지혜를 꿀로 비유합니다.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좀 더 설명하자면 식품으로서 꿀은 육신 생활에 필요한 것이고 지혜는 신령한 생활에 필요합니다.
지혜를 몸에 유익을 주는 꿀에다 비유하는 것은 이 지혜야말로 성공을 보장하는 안내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구해야 할 성공의 기초입니다.
잠언을 기록한 저자가 누구입니까? 지혜의 왕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당대의 지혜자로 그 명성이 뛰어났습니다. 이는 어렸을 때 아버지 다윗과 어머니 밧세바로부터 지혜에 대한 교육을 단단히 배웠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지혜를 배웠던 일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깁니다.
잠 04:04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05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어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솔로몬은 삶의 우선순위를 지혜 구하는 일에 두었습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 마리의 번제물을 드린 후 꿈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너는 구하라. 그러자 솔로몬은 국가를 잘 다스리고 백성의 송사를 잘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부귀영화를 제쳐 놓고 지혜를 구한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상 03: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솔로몬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지혜에 대한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지혜를 우선순위로 여겼습니다. 그 결과로 뛰어난 인물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특별히 귀하게 여기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혜와 신념입니다. 유대인은 지혜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김삼일 가족은 교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건강입니까? 지혜가 제일 중요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지혜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회자 되는 지혜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 동화 가운데 하늘 나는 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그만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왕에게 살려 달라고 탄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제게 일 년의 여유를 주시면 왕께서 애지중지하는 말에게 하늘을 날도록 가르쳐 보이겠습니다. 일 년이 지나도 말이 하늘을 날지 못하면 그때는 저를 사형에 처해도 좋습니다. 라는 탄원입니다.
이 탄원이 받아들여져서 왕은 그가 사랑하는 말이 하늘을 날지 못하면 그를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동료 죄수들이 말이 어떻게 하늘을 난다는 말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이 죄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 년 내에 왕이 죽을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그 말이 죽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일 년 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나? 일 년 뒤에는 말이 정말 날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거든. 이 이야기는 인생은 숱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절대로 체념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지혜입니다.
2. 성경을 꿀처럼 좋아해야 합니다.
시 19:0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조금 전 솔로몬은 꿀을 지혜로 비유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은 시편 09:09, 10절에서 꿀을 성경 즉 하나님 말씀으로 비유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섯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 표현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율법입니다(시 19:07). 둘째 여호와의 증거입니다(시 19:07). 셋째 여호와의 교훈입니다(시 19:08). 넷째 여호와의 계명입니다(시 19:08). 다섯째 여호와의 도입니다(시 19:09). 여섯째 여호와의 법입니다(시 19:09).
이 중요한 성경 말씀을 우리는 얼마나 가까이합니까? 얼마나 묵상하며 곁에 둡니까? 교회를 출입하는 사람이 타락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말씀을 듣고 이해하였으면 그 순금 같은 말씀이 머리에서 심장으로 내려오게 하십시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순금의 의미를 압니까? 금은 순도가 높을수록 가치가 있습니다. 순금을 24 carat이라고 하는데 순도로 말하면 99.9%입니다.
18금은 75%, 14금은 58.5%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금에 비교하는 것은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완벽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 말씀과 견줄만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거북이가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예, 굶어 죽는 일이 있습니다. 중앙일보 2019년 7월 12일 자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 거북이는 해파리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데 물에 떠다니는 많은 폐비닐이 거북의 눈에는 마치 해파리와 같아 보입니다. 당연히 거북이가 착각하여 먹습니다. 문제는 거북이의 뱃속에 들어간 비닐이 소화되지 않은 채 머물므로 배고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비닐을 먹은 거북이는 제 몸에 필요한 먹이를 먹지 않음으로 결국은 굶어 죽게 됩니다.
실제로 1년간 국립생태원 등이 제주 앞바다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푸른바다거북과 붉은바다거북 등 6마리를 부검한 결과 비닐 등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2018년 9월쯤 제주도 중문에서 새끼 거북이를 방사하였습니다. 그런데 11일 만에 폐사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뱃속에는 비닐과 각종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도들도 세상에 있는 것들로 배가 불러서 정말 먹어야 할 생명의 양식, 영의 양식에 대한 갈급함이 없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꿀맛 같은 성경 말씀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다른 복음에 길들여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정욕 거리에 마음을 빼앗겨 살다 보니 당장에는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런 달콤함은 결국 믿음의 병이 납니다. 많은 사람이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꿀맛 같은 성경 말씀을 먹지 못해서입니다. 성경 말씀을 먹기보다는 후 순위에 속한 것을 더 좋아하다 보니 말씀에 대한 입맛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믿음 생활 원리에 진리의 말씀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말하라고 할 때 말하고, 성경이 가라 할 때 가고, 성경이 멈추라 하면 그때는 멈추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와 비진리, 정통과 이단을 나누는 기준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든 표준이요 기준입니다. 성경 말씀을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진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망치와 같고 칼과 같습니다. 굳은 돌과 같은 고집을 깨뜨립니다.
성경 말씀은 송곳입니다. 죄를 찌르고, 무디어진 감각을 일깨워줍니다. 성경 말씀은 불입니다. 가슴을 뜨겁게 하고 가슴이 활활 타오르게 합니다. 성경 말씀은 물과 같습니다. 영혼이 목마른 사람의 목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성경 말씀은 사람과 죄, 우주와 운명,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현미경과 같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목회자요 시인으로 크게 활동하였던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12.19.~1889.7.31.)가 쓴 성경예찬 시가 있습니다.
내가 피곤할 때 성경은 나의 침대가 되고, 내가 어둠 속에 있을 때 성경은 나의 빛이 되고, 내가 굶주릴 때 성경은 나의 떡이 되고, 내가 무서울 때 성경은 나의 갑옷이 되고, 내가 병들었을 때 성경은 나를 고치는 양약이 되며, 내가 적적할 때 성경에서 친구를 찾는다. 내가 일하려면 성경이 나의 기구요, 놀 때는 성경이 나의 즐거운 풍류로다. 만일 내가 무식하면 성경이 내 학교요, 만일 내가 빠지게 되면 성경이 나의 굳은 땅이로다.
만일 내가 추우면 성경이 나에게 열이 되며, 만일 내가 떠오르면 성경은 나의 날개로다. 성경은 나의 지도자, 의복, 피난처, 꽃동산, 태양, 샘물, 신선한 공기로다. 아 위대한 책이여.
유대인 가정에서는 성경의 가치를 높여주기 위해 특별 교육을 합니다. 영아(嬰兒) 때부터 동판으로 성경 모형을 만들어 거기에 꿀을 묻혀 놓고 혀로 핥게 합니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은 꿀과 같다는 인식이 들게 합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을 꿀과 같이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영과 정신과 육신이 건강하여 세계 각처에서 머리가 되어 항상 상위를 달립니다.
시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꿀과 함께 젖이 지혜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종종 사용됩니다. 복 있는 사람, 즉 지혜가 나의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입니까? 나의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의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 이 순간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지혜와 말씀을 사모하는 일입니다.
지혜를 꿀처럼 좋아합시다. 성경을 꿀처럼 좋아합시다(아멘).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됩니다(잠 16:24).
순금보다 더 사모할 지혜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한 자리에 이릅니다. 성경 말씀은 온갖 더러운 것과 추한 것, 상한 것과 지저분한 것을 씻는 영혼의 세척제입니다.
성경 말씀은 모든 죄를 깨닫게 하는 각성제 역할을 합니다. 성경 말씀은 거듭나게 하는 생명의 씨앗입니다. 성경 말씀은 고달픈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진정제 역할을 합니다. 성경 말씀은 거룩하게 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지켜주는 요새와 산성입니다. 성경 말씀은 인간의 내면과 영혼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벧전 02:02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