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시간)은 1950년대와 60년대 은막에서 활약하며 패션 아이콘이었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세상을 떠난 지 32년이 되는 날이다. 영국 BBC 라디오 4의 팟캐스트 History's Youngest Heroes는 세상을 바꾼 인물들의 젊은 시절 얘기를 들려주는데 지난 연말에 잘 알려지지 않은 헵번의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활동 전력을 전해 눈길을 끌었다고 방송이 지난 1일 보도했다.
헵번은 다섯 차례나 오스카 후보로 지명돼 '로마의 휴일'(1953)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청소년 시절 완전히 다른 역할, 나치 독일에 저항하던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활동에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발레 연기를 하기도 했다.
헵번은 1929년 네덜란드 여남작인 엘라 반 헤임스트라와 영국계 오스트리아 기업인 조지프 헵번러스턴의 딸로 태어났다. 런던에서 부모들은 과격한 반유대주의 집단인 British Union of Fascists (BUF) 지도자인 오스왈드 모슬리에게 흠뻑 빠졌다. 반 헤임스트라는 BUF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나치 독일의 영광을 목도했다고 적기도 했다. 조지프는 오드리가 여섯 살 때 집을 나가버렸다. 조지프는 나중에 "외국 파시스트들과 결탁한 자"로 체포돼 전쟁 기간 영국 교도소들을 전전했다.
헵번의 막내 아들 루카 도티는 어머니의 2차 대전 때 삶을 소개한 ' Dutch Girl' 저자인 로버트 맷젠에게 "여러분도 알듯이 어린 소녀일 때 그녀는 외향적이었다. 웃고 장난치며 연기를 곧잘 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녀를 '원숭이 퍼즐'이라고 불렀다"고 털어놓았다.
"오드리의 어머니는 갑자기 독일군이 프랑스에 밀고 들어오며 영국 침공을 시작하는 등 위협이 고조된다며 잉글랜드, 특히 켄트주가 오드리에게 걸맞는 곳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반 헤임스트라는 딸을 영국 기숙학교를 그만 두게 하고 네덜란드의 가족 영지로 이사했다. 오드리는 그곳에서 무용학교에 들어갔는데 네덜란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이름 Adriaantje 반 헤임스트라로 불리게 했다. 나중에 배우 활동을 시작하면서 성을 헵번으로 바꿨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하며 결코 자신의 조국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도티는 어머니의 네덜란드 생활에 대해 "네덜란드로 이사한 것은 결코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네덜란드어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즐겁게 해줄 새 친구의 말을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한 채 네덜란드 학교에 등교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1940년 5월 네덜란드를 침공해 점령했다. 맷젠은 "동부 전선은 자원을 충분히 빠르게 퍼낼 수 없는 용광로였다. 독일은 군대를 위한 식량을 필요로 했다. 군대를 위한 옷가지도 필요했다. 이 모두가 네덜란드와 다른 점령 국가들에서 빼앗은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헵번의 삼촌 오토 반 림부르그 스티룸 백작은 나치에 반대하는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1942년 레지스탕스 그룹이 로테르담 근처에서 독일 열차를 폭파하려고 기도했다. 반 림부르그 스티룸은 연루되지 않았는데도 반나치 저명 인사란 이유로 체포됐다. 나치 요원들이 숲에 그와 네 사람을 끌고 가 총을 쏜 뒤 시신들을 아무렇게나 무연고 무덤에 버렸다.
헵번은 삼촌을 아버지 대신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살해 소식에 격분했다. 나치의 수탈이 극심해져 반 헤임스트라 가족은 배를 곯는 신세가 됐다. 헵번이 열다섯 살이 되자 나치 쿨투르카머(Kulturkammer, 예술가 동맹)에 가맹하든지, 아니면 대중 앞에서 무용 공연을 포기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런데 헵번은 춤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도티는 "춤을 통해 어머니는 꿈꾸고 날며 잊을 수 있었다. 그녀가 현실에서 달아나는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헵번은 안전 가옥에 촛불 하나만 켜 캄캄하게 만들어 발각되지 않게 하고 춤을 췄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춤을 보여줬다. 갈채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공연이 끝나면 레지스탕스 모금통을 돌렸다.
1944년 봄에 헵번은 레지스탕스 대원인 의사 헨드릭 비제르트 후프트의 비서 일을 자원했다. 헵번의 모친은 나치 협력자로 유명했던 반면, 비제르트 후프트는 나치의 마수를 피해 숨은 수천 명을 지원하기 위한 도움이 절실했다. 그는 헵번을 무척 신임해 받아들였다.
그 해 9월 17일 헵번이 교회에 있었는데 찬송가 소리가 엔진 굉음에 끊겼다. 연합군이 라인 강에 걸쳐진 아홉 다리를 장악하려는 마켓 가든 작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헵번이 밖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 보니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낙하산을 펼친 채 강하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중화기로 무장한 나치군의 두 사단이 그 일대에서 다시 결집했다. 나치 탱크들이 반 헤임스트라 집 앞에 몰려왔다. 헵번과 가족은 아흐레 이어진 교전 와중에 지하실에 숨어 있었다. 그들이 밖에 나오자 나치가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헵번은 나치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대원들에 보복하는, 고문하고 살해하며 내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독일로 향하는 연합군 공수부대원들이 네덜란드에 비상 착륙해야 했을 때 비제르트 후프트는 헵번을 숲으로 보내 암호를 대고 영국 공수부대원을 만나 양말 속에 감춘 비밀 메시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숲을 빠져나오다 네덜란드 경찰이 다가오는 것을 봤다. 그녀는 몸을 숙여 들꽃을 꺾어 경찰에게 선사했다. 경찰들은 좋아라 했고 그녀를 추궁하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뒤 그녀는 종종 레지스탕스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했다.
도티는 "어머니는 선과 악의 싸움이 있으면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 한다고 굳게 믿으셨다"고 말했다. 맷젠은 "독일인들은 아이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저 썩 비키렴, 꼬마야' 하는 식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어떤 것도 의심받지 않을 어린이들을 이용할 만큼 충분히 실용적이었다. 해서 레지스탕스들은 아이들에게 메시지 전달을 맡겼는데 아이들도 좋아했다. 재미있는 일, 위험했지만 그들은 레지스탕스 영웅이 됐다"고 덧붙였다.
1945년 2월에 매주 500명정도의 네덜란드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보도가 나왔다. 많은 다른 이들처럼 헵번네도 먹을 거리가 부족해 절망적이었다. 헵번은 빈혈과 황달, 부종으로 심하게 앓았다.
그들은 치열한 교전이 이어진 3주 내내 지하실에 갇혔다. 1945년 4월 16일 정적이 찾아왔다. 헵번은 담배 냄새를 맡았는데 전쟁 중 네덜란드에서는 담배를 구할 수 없었다. 지하실 계단을 기어 올라 문을 열었더니 캐나다 병사 다섯이 담배를 태우다 그녀를 보고 기관단총 총구를 겨눴다. 곧바로 헵번이 영어로 말을 걸자 한 병사가 "우리가 마을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네 – 우리가 영국 소녀를 해방시켰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헵번은 파시스트에 동조하는 발언을 곧잘 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중에 아들에게 털어놓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녀는 런던 발레 램버트에서 학위를 땄다.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은 영양실조로 망가져 있었으며,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스태미나 같은 것이 없었다. 대신 연기로 전향, 웨스트 엔드의 극장들과 '라벤더 힐 몹' 같은 영화들에서 작은 역할을 따냈다.
'로마의 휴일'(1953)로 첫 주연을 따내 평단과 흥행 모두 큰 성공을 거뒀고, 오스카 트로피마저 안았다. 뒤에 에미상, 그래미상, 토니상까지 휩쓸어 이른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또 연기 활동과 병행해 자선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해 유니셰프 친선대사로도 활동하다 1993년 1월 20일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맷젠의 말이다. "오드리의 본능은 전쟁과 그녀가 헤쳐온 모든 것들에 의해 아주 훌륭하게 연마됐으며 그녀는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