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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시선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치타의 빠른 속도는 오랜 기간에 걸쳐 피나게 노력한 결과다. 치타의 주 먹잇감은 가젤영양이다. 이 동물은 몸집이 작고 워낙 속도가 빨라 다른 동물들이 잘 사냥하지 못한다. 치타는 이 '틈새시장'을 주목했고, 가젤영양을 사냥하기에 적합한 구조로 신체를 진화시켰다. 최대한의 산소를 흡입할 수 있도록 폐를 넓혀 분당 호흡을 60회에서 150회로 증가시켰고, 좀더 많은 혈액 공급을 위해 간과 동맥, 심장도 확대했다. 더 빨리 더 유연하게 뛸 수 있도록 다리와 등뼈는 가늘고 길게 바꾸었다. 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턱과 이빨 크기를 줄이고, 몸무게도 40~50㎏으로 줄였다. 이런 '전문화'를 통해 치타는 세 걸음 만에 시속 64㎞까지 속도를 올리고, 1초에 7m씩 세 번 뛸 수 있게 됐다. 말 그대로 '바람의 파이터'가 된 것.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치타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모든 것을 희생해 원하던 스피드를 얻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생존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치타는 사냥 성공률은 높지만, 왜소한 체격 때문에 애써 잡은 먹이를 절반 이상 빼앗긴다. 가령 표범은 사자나 하이에나를 피해서 먹잇감을 나무 위로 갖고 올라가지만, 치타는 그럴 능력이 없다. 자신이 사냥한 먹이를 빼앗긴 채 물러나는 치타의 슬픈 표정을 상상해 보라. 더 심각한 것은 치타가 가젤영양에만 매달리다 보니 가젤영양의 숫자가 조금만 줄어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됐다는 점이다. 최근 아프리카 개발로 야생 공간이 감소하면서 가젤영양의 수가 줄어들고 경쟁자 간 먹이 다툼이 치열해져 치타는 멸종을 걱정할 위기에 처했다. 전문화가 가져온 부작용이다. 판다곰이 먹이를 대나무 잎으로만 특화했다가 중국 개발 붐으로 대나무 숲이 줄어들면서 멸종 위기에 처한 것과 비슷하다. 물론 전문화는 필요하다. 선택과 집중은 자연의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발등에 떨어진 불에만 신경 쓴다면 진정한 전문화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전문화란 헤르만 지몬의 '히든 챔피언'에 사례로 등장하는 세계적 강소기업들처럼 한 우물을 파되, 세상의 변화를 읽고 그 변화에 맞춰 우물을 파는 것이다. '우물을 깊이 파려면 넓게 파라'는 말이 있다. 빨리 팔 욕심에 좁게 파면 시원한 물은커녕 얼마 가지 못해서 삽이나 곡괭이를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비좁아지고 결국 자신이 판 구덩이에 갇히게 된다. 빨리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다.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면 달릴수록 돌아오는 길은 멀어진다. 애써 잡은 먹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치타의 슬픔은 결코 동물의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제 목 : 생명의 잠재력 본 문 : 요 14:6-18
미국의 서남쪽에 가면 한낮의 기온이 섭씨 45도 내지 50도까지 올라가는 아주 뜨거운 사막 지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더운 곳에서 살 수 있느냐?"고 물어 보면, 그들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밑에 생수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살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생명(life)' 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14:6)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를 가리켜서 '생명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생활 속에 역동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 채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온전한 신앙생활에 이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이 말씀으로만 머물러 있는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생명의 진리가 되시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풍성한 생명을 주는 종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진리가 내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라는 말입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기독교의 진리를 지성적, 논리적으로 인식하기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흔히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곧 지성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건실한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밖에도 지성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은 곧 말씀이 내 생활을 변화시키고 인격을 변화시켜 생명 있는 종교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생명의 잠재력을 개발하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마음의 문을 열고 믿으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말씀이 말씀으로만 머물러 있으면 생명의 역동성을 잃어버립니다. 깨달음에만 중점을 두게 되면 이성적이고 지성적이 될지는 모르지만 생활에 변화가 없습니다. 지성이란 때때로 인간을 이중적으로 만듭니다. 확신이 없고 불안해집니다. 남이 지성적으로 보이니까 자신도 지성인인 것처럼 허세를 부립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늘 갈등이 있습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분열과 교만을 가져오고 불순종을 가져옵니다.
성경은 '머리로 깨닫고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 말씀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사는 생명 있는 삶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생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주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동물은 바로 인간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는 태아가 탯줄을 통해서 영양을 공급받다가 세상에 태어나면 폐로 숨을 쉬고 입으로 영양을 섭취하게 됩니다.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또 영적인 동물이므로 영적 분위기에 쉽게 변화되어야 할 텐데,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자연인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인간의 편견과 교만과 부정적인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는 무기력한 신앙은 우리가 반성해야 합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교회 문밖에 나가면 진리를 다 잃어버리고 마는 가증한 생활도 반성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신앙의 새로운 변화로 풀어 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들이 전적으로 믿는 마음의 신앙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무한한 잠재력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 구절을 대하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당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팔레스틴의 지역적 환경과 문화적 제한 속에서 열두 제자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제가 베드로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 이후 복음을 전하자 3천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개발하여 지리적, 문화적 한계 속에 계셨던 예수님보다도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대학 UCLA의 조사에 의하면, 인간의 두뇌의 능력은 배우면 배울수록 한없이 무한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련의 과학자인 「이반 예프레무프」라는 사람은 "우리는 일생 동안 생각하는 기능의 일부분만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어려움 없이 40개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고 백과사전을 A에서 Z까지 모두 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전공 분야를 우수하게 공부할 수 있는 두뇌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백 사람의 일을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가능성을 믿고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자기 가족도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난 할 수 없어. 나는 배우지도 못했어"라고 하며 자기의 잠재력을 믿지 않고 배워서 개발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또 자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파괴시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 마약 복용자,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 적개심을 가진 사람, 의기소침한 사람, 상상력이 없는 사람이 그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시키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여 훈련시키고 믿게 하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사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가장 큰 정신적 질병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려고 하고 파괴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지성인의 모습인 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우리 모두를 망하게 합니다.
썩어지는 한 알의 밀 알에서 많은 결실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아주 작은 겨자씨에게서 많은 열매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흰 바탕에 검은 잉크가 묻은 천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넓은 흰 바탕은 볼 줄 모르고 까만 점만 보고서 그것이 문제라고 얘기합니다. 왜 넓은 흰 바탕은 볼 줄 모릅니까? 그런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잠재력도 개발하지 못하고 항상 뒤떨어지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짧은 시간을 보지 마시고 긴 시간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담에 바늘 허리 매여 못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급하게 서둘러 생각하고 일을 하면 잘못되는 수가 많습니다.
요즘 우리는 새벽에 요한계시록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16장을 보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의 7대접의 재앙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 짐승의 표시를 받은 자, 세속적인 권력과 돈과 우상 숭배에 지배되는 자들이 받는 무서운 형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무서운 마지막 하나님의 진노에서 제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얻음에 대한 무한한 감격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에 지배당하게 되지만 부정적인 것만을 보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부정적인 생각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자주적이지 못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소망 가운데 날마다 개발하고 노력할 때에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3. 믿는 대로 생활 속에 활용하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기도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삶에 옮길 때에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온전하고 건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①, 이것이 참인가? ②, 이것은 내가 믿고 행할 만한 것인가? ③, 내가 말하는 것이 내 행위와 일치되는 것인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삶 속에 활용하고 있는가를 항상 물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에 옮길 때에 깜짝 놀랄만한 기적이 일어나게 되고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개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순종하는 일을 가정과 교회에서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서로 보살펴 주고 의지하고 사랑의 교제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낙심되었을 때 서로 격려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도장이 가정과 교회입니다.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고 순종하면 축복하신다는 믿음만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반쪽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생활에 적용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을 책임져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형제에게 사랑과 용기를 주는 보람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4.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 세상은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 노력과 지혜가 아니라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놀라운 가능성을 개발하고 활용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강한 것 같지만 실상은 넘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뒤에서 도우시는 분이 계셔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뒤에서 보호해 주시는 부모님이 있을 때에 아이들의 잠재력이 개발되고 능력이 커지는 것처럼, 우리는 부족하지만 보혜사 성령이 뒤에서 지키실 때에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이라는 말이 52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람 같은 성령, 불과 성령, 기름 같은 성령, 물과 같은 성령, 비둘기 같은 성령 등입니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평화롭게 합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성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역점을 두고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칼뱅 (J. Calvin) 은 성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핵심을 두고 신앙을 다지며 신학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레(J. Wesley) 선생은 특히 성령을 강조하면서 체험적인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증거한 것입니다. 영국 옥스포드(Oxford)의 이성주의자로서, 자신은 심판 받을 죄인이라고 하는 개념 속에서 무기력했던 웨슬레가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에서 뜨거운 체험을 한 후 지구를 두 바퀴 반이나 돌만큼 역동적인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성령 충만함을 받았고?"라는 것이 웨슬레의 인사였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무기력해졌을 때에 보혜사 성령이 여러분 곁에 계셔서 인도하시는 영으로, 확신을 주시는 영으로, 변화시키는 영으로 여러분의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주신 하나님 앞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역사에 동참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