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찬포럼
김정은 집권 후 뇌물 수수 2배…대남 강경 발언, 북한 체제 약화 방증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52호(2024.03.15)
김영호 (외교78-82) 통일부 장관
北 주민, 한국 포함 외국에 관심
단일 체제 맹신 인식 깨지는 중
“김종섭 회장님께서 오늘 모교 배지를 가슴에 달고 나오셨습니다. 동문 여 러분들 모두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교훈이 새겨져 있죠. 이는 진리를 사랑하고 끊임없이 추구해 나간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나 북한에선 진리를 소유한다고 생각해요. 민족 문제든 민생 문제든 주체사상이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이죠. 진리뿐 아니라 세상을 보는 자세와 이념에서도 남과 북은 극단적인 차이를 띠고 있습니다.”
본회가 3월 14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조찬포럼을 개최했다. 김종섭 회장, 이희범 명예회장, 김인규 수석부회장, 성기학 부회장 등 동문 2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포럼에서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북한의 경제사회 실태와 정부의 통일정책 방향’을 주제로 연단에 섰다.
김영호 동문은 모교 졸업 후 보스턴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를, 버지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통령실 통일비서관 등을 지냈다.
이날 강연은 최근 통일부에서 발간한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 보고서’ 를 기초로 했다. 2013년부터 10년간 탈 북민 6351명을 설문한 결과를 분석한 책 으로 본래 3급 비밀로 분류됐으나, 우리 국민에게 북한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고 정부의 통일정책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자는 취지에서 전격 공개됐다. 본회는 이날 참석한 동문 모두에게 이 보고서를 증정했다.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사회주의 배급제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북한에서 식량을 배급받은 적이 있는가’ 라는 물음에 72%가 못 받았다고 답했고, 일해주고 돈 못받았다는 응답도 과반이 넘습니다. 김정은 집권 후 협동 농장에서 수확한 농산물 중 농장원에게 돌아가는 몫이 21%에서 12%로 감소했고요. 생계를 당국에 의존할 수 없게 되자, 1990년대 중반 북한 주민의 자구책으로 발생한 블랙마켓 ‘장마당’이 더욱 팽창합니다. 김정은 집권 전엔 장마당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80%가 북한 원화였는데, 집권 후 36%로 급감했어요. 중국 위안화는 12%에서 57%로 급증했고요.”
자국에서 외화를 더 활발히 쓴다는 건 주민이 그만큼 정부 당국을 불신한다는 뜻. 더욱이 북한 주민들은 2009년 화폐 개혁이 단행되면서 갖고 있던 돈이 모두 휴짓조각이 되는 비극을 경험했다. 당국의 계획체계 바깥의 경제활동, 즉 사경제 활동이 장마당의 팽창과 함께 북한 주민의 중요한 소득원으로 자리잡았다. 북한은 노동당 1당 체제인데, 그보다 더 힘센 당이 장마당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널리 퍼질 정도다. 김정은 집권 후 사경제 전업 종사자의 비율이 24.9%에서 33.5%로 늘어났다.
“자유시장 경제체제와 유사한 성격의 장마당이 번성하자, 사유재산 및 개인주의적 성향이 북한 주민들 사이에 생겨났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싹 텄죠. 그러나 탈북민들은 돈보다 권력을 더 선호해요. 권력으로 돈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죠. 돈이 있어도 권력이 없으면 빼앗길 수도 있고요. 실제로 김정은 집권 후 뇌물을 준 적이 있다고 답한 북한 주민이 두 배 늘었습니다. 노동당 간부들 중 부자가 많아졌다는 응답도 김정은 집권 후 68.7%에서 77.2%로 증가했고요. 권력의 힘과 시장의 힘이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김 동문은 “북한은 ‘평양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계층 뿐 아니라 지역 간 빈부 격차도 극심하다”며 “이번 보고서를 통해 북한은 평양 주민 약 300 만명을 먹여 살려 체제를 유지하는 시스템이라는 게 확인됐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 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김정은이 내놓은 ‘지방발전 20×10’ 정책은 지방에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조차 원만히 공급하지 못하는 북한의 실상을 자인한 것. 김 동문은 이 정책에 대해 “북한 주민을 상대로 한 또 다른 희망 고문”이라고 꼬집었다.
탈북민 중 계획체계 바깥에서 장사해야 돈을 번다는 응답이 93.4%, 국가의 배급이 아닌 장마당에서 식량을 산다는 응답이 70.5%에 달했다. 장마당에서 번 돈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들이 많아졌고, 자연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는 응답도 많아졌다. 조선중앙 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속 아내는 ‘장마당에서 돈을 안 벌면 우리 식구는 뭘 먹고사느냐’며 남편에게 호통친다. 북한에서도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는 옛일이며, 우리나라처럼 이혼율이 늘고 출산율이 줄었다. 한국 드라마의 영향력도 막강하다. 탈북민 거의 100%가 한국 드라마를 본 적이 있으며, 한국와서 처음 한 게 북한에서 보던 드라마를 마지막 회까지 시청한 거라고 할 정도.
“더디지만 확실히 북한 주민의 의식이 변하고 있습니다. 줄기차게 집단주의적 사고를 강요해도 정권을 위한 희생 보다 개인사를 중시한다는 응답이 53%에 달하죠. 우리나라를 포함해 외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북한의 유일 체제를 맹신하는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뜻이죠. 의식의 변화는 곧 행동의 변화를 이끕니다. 북한의 최근 무력 도발과 우리 나라를 제1 적대국이자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한 김정은의 과격한 언행은, 역으로 그만큼 북한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우리 정부가 국제사회와 공조해 수십 년 동안 이어온 대북 제재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요. 억지 (Deterrence), 단념(Dissuasion), 대화 (Dialogue)의 3D 전략으로 평화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