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뉴기니아 전투 1 - 산호해 해전
출처: http://blog.naver.com/mirejet/110038071981
뉴기니아는 일본으로부터 남쪽으로 5,000km, 호주의 북쪽에 위치한 열대기후의 섬이다. 면적은 77만 평방km이며 그린란드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기도 하다. 뉴기니아엔 4,000m에서 5,000미터의 높은 산맥지대가 연결되어 열대지만 만년설이 쌓여있기도 한 곳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뉴기니아 서쪽은 네덜란드령, 동쪽과 북쪽은 독일령, 남쪽은 영국령으로 분할되었다. 그 후 1901년에 호주의 독립으로 구 영국령은 호주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 1차대전 후 독일령도 호주의 영역이 되었다.
1942년 당시 뉴기니아의 대부분은 열대우림과 습지대로 인구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미지의 섬이기도 했다. 해안에는 포트 모레스비라는 소도시가 있었지만 산악지대엔 수렵과 야자, 감자종류를 농사짓는 원주민만이 군데군데 모여살 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트랙 제도의 해군기지를 방어하기 위한 필요가 있어 뉴기니아 섬 라바울을 공략의 전진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라바울은 호주군와 미군의 포트모레스비 기지의 폭격범위 내였다. 일본군은 라바울을 방위하는 포트 모레스비의 중요성을 인식해 해상에서의 상륙작전을 기획했다. 작전은 이라 명명되어 뉴기니아 섬 북부해안의 라에와 샐모어에 항공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연합군에 있어서도 포트 모레스비는 호주 본토의 최후 방어선이며 절대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거점이었다. 또 필리핀에서 탈출해 호주로 거점을 옮긴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에겐 호주에서 뉴기니아 북부를 경유하는 루트는 필리핀을 탈환해 도쿄로 향하는 일본공격루트의 기점이기도 했다. 1942년 3월 7일에 일본군이 라에와 샐모어에 상륙하자 뉴기니아는 본격적인 전쟁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뉴기니아 공략을 위해 제 17군과 제 18군 및 항공대를 파견하기로 했는데 여기엔 정예부대가 대거 참여하였다. 당시 동원된 일본군의 수는 약 20만이었는데 부대는 아래와 같았다.
1. 제 17군(사령관 : 하쿠타케 하루요시) - 제 55사단 일부와 난카이(南海)지대가 참가. 2. 제 18군(사령관 : 아다치 하타조) - 야마가타(山縣)지대, 제 20, 41, 51사단이 주축. 3. 제 4 항공대 (사령관 : 테라모토 구마이치) - 제 6, 7비행단이 주축 4. 제 8 방면군 (사령관 : 이마무라 히토시) - 제 17사단 65연대 일부가 참가. 제 2방면군도 일부가 참가.
이에 맞서는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은 미 제 6군과 호주군으로 구성된 15만 남짓의 부대였는데 뉴기니아 전투는 1945년 8월 15일 종전때까지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1942년 3월 7일, 연합군의 거점인 포트 모레스비의 공략을 시야에 두고 일본군의 난카이 지대 일부가 샐모어에, 해군육전대가 라에에 상륙했다. 상륙엔 성공했지만 10일, 미군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기본으로 하는 미군항모기동부대가 일본군을 기습했다. 이 공격으로 수송선 3척과 구축함 야요이(彌生)가 침몰하고 수송선 4척이 대파되었다. 연합군은 이 지역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자 4월, 일본군는 을 발동해 제 1항공함대의 함재기부대 일부와 제 4함대, 난카이 상륙부대로 포트 모레스비 공략에 향했다. (산호해 전투)
연합군도 이에 맞서 항공모함을 파견했는데 5월 7일, 8일간에 걸쳐 산호해 해전에서 연합군은 렉싱턴을 잃었지만 일본군도 항공모함 쇼호(祥鳳)를 잃었다. 일본군에게 있어서 함재기 기동부대의 상실은 매우 커서 MO작전은 중지되었으며 그 후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바닷길로 포트 모레스비를 공략하는 계획은 사실상 불가능해져 버렸다.
아다치 하타조 (安達二十三) 1890년 6월 17일 생 - 1947년 9월 10일 사망
이시카와 현에서 아다치 마쓰타로(安達松太郞) 육군교수의 4남으로 출생. 23세때 하타조(二十三)라 이름이 붙여졌다. 형인 아다치 도로쿠(安達十六)와 아다치 도큐(安達十九)도 육군소장 및 중장을 역임해 대대로 군인집안이었다. 육사 22기로 졸업 후 육군대학 34기를 거쳐 보병 제 12연대장, 제 37사단장을 역임, 북지나방면군 참모를 겪은 후 1942년 11월 9일에 제 18군 사령관에 취임한다. 성격이 엄격하고 꼼꼼해 곤란에 처했을 때도 통솔력이 강해서 부하들에게 강한 신뢰를 받았다고 한다. 제 18군 사령관 취임때는 이미 뉴기니아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연합군에게 빼앗기고 보급도 절망적인 상태여서 예하의 3개 사단과 1개 여단은 이미 분열상태였다. 그러나 현지방어를 유지하며 야자 및 감자의 자급을 확보해 종전까지 제 18군을 전투태세로 유지시켰다. 1944년 12월부터 심해진 연합군의 공격에 한때 옥쇄도 결심했지만 종전을 알게 된 후 9월 13일에 제 18군은 호주군에 항복함으로 그는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부하들에겐 잘못이 없다고 변호해 휘하 8명을 변호해 방면시키기도 했다. 부하들이 무사방면되자 그는 안도했는데 그 날 아다치 중장은 자결했다. 제 8군의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에게 보낸 유서에는 <사람으로서 극한의 전투를 요구받은 후..마음속으로 젊은 장병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싶었는데..개전에 임해서 스스로 흔들린 것이 후회스럽다>라고 최후의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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