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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사두 썬다싱의 명상 2 >
101. 성령을 받는 일이 없이는 제아무리 전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랐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위대함과 신성은 이해할 수 없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3년 간을 생활했다.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파했으나 그리스도가 죽자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자 엄청난 힘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다. 지금시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그의 능력과 신성을 경험하지 못한 신자가 많다. 이는 회개와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102. 교만하게 되면 절로 자기도 의식치 못하는 사이에 멸망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남보다 진보하였다 할지라도
다이아몬드가 석탄과 같은 원소로부터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값비싸다 해도 석탄과 같이 완전히 타버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들 서로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103. 우리가 절벽 위에서 밑을 볼 때는 현기증을 느끼지만 하늘을 쳐다볼 때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위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밑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발견하고 마음이 안온하지만 얼굴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릴 때는 실재로부터 떨어져 내려가 산산이 부서질 위험이 있다.
104. 참된 시간 즉 실재와의 관계에 있는 시간 그것은 영원이다.
세상의 시간은 참된 시간이 지나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모두가 현재이기
때문이다. 지혜에 있어서 무한하신 실재자 앞에는 과거나 미래가 함께 그 앞에 서있다. 그러나 우리 감각에 있어서 현재는 존재치
않고 그저 미래에서 과거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모든 순간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미래에서 과거로 옮아간다.
(실재자는 변화를 모르나 피조물은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
우리는 현재에 산다고 하나 사실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지나가는
정점인 현재는 우리에게 잡히지 않으므로 인식되지 않고 과거나
미래도 또한 우리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범위에 있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제에 있어서는 실재가 아니다.
우리가 잠에서 깨었을 때에 잠 속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으나 실제로는 오랜 시간을 지낸 것처럼 느껴지며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에도 슬픔과 고통 중에는 하루는 1년과 같이 여겨지며 기쁨 속에서는 1년은 하루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면 시간은 이처럼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재가 아니다.
실재에 있어서는 모든 경우가 참된 현실이다.
우리는 영원한 실재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시간에 대한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실재는 시간이나 거리가 아니고 상태의 변화일 뿐이다.
105. 시간은 공간에서 생긴 일이나 사물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이것을 공간 속에 내어놓을 때 생기는 상태의 변화가 시간을 만들어낸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것이
실재다. 변화가 끝났을 때 그것은 과거다. 변화가 일어나려고 할 때 그것은 미래다. 사물이 변화할 때에 시간도 또한 그것과 더불어
미래나 과거 속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실재는 그 자신에 있어서나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영원에 있어서도 변화하는 일이 없다.
시간은 변화하고 망각 속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 속에서 행한 일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 속에 흘러들어 간다.
106. 그리스도의 능력과 임재는 이 세상의 철학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참된 기독자의 생활과 경험에 의해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 신에 의해 만들어진 자며 그 자녀이지만 양쪽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쪽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며 이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으로서 그의 모습을 닮아 동화되고 생명과 영원의 축복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불신자는 무지한 까닭에 진리의 암영 속을 걸으며 자기의 의지가 요구하는 것만
좇아 참된 것으로부터 떨어져 방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을 끊고 산다.
107.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그 종교적 성정의 요구를 채우기까지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심이 깨이기 시작하면 아무리 진정하려고 하여도 그 평안을 얻으려는 강력한 욕구를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마음의 요구를
죽이며 내적인 소리를 침묵케 한 자는 어느 정도 평안한 듯 하나
그것은 죽은 평화이다. 평화를 구하는 영혼의 욕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만족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108. 선다싱은 예수를 알기 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어느 날 주 예수께서 일순간에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으며 불안한 영혼에 참된 평화를 주시어 많은 사람이 자기 몸을 괴롭게 하면서 까지 얻으려 하다가 실패한 그 평안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세상의 논리를 초월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혜이다. 인간이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여 고행으로 육체의 요구를 억제하려는 것은 그 마음은 가상하나 그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필요한 때는 은혜로 얻은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육신을 훈련시키는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다.
109. 인도의 영적 지도자인 '간디' 조차도 고백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는 실패하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오직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실 뿐이기에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알 수 있는 분이다.
간디는 아직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러나 그를 구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자신이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그의 끊임없는 고민이라고 어느 날 고백하였다.
110. 어느 구도자는 동굴에 영원히 유폐하여 산다. 그는 말하기를 "제가 이렇게 사는 동기는 무엇을 얻고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제 모든 요구를 오히려 버리기 위해서 입니다. 즉 괴로움이든 평화이든 그 모든 것의 느낌과 요구의 멸절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이 종말이 올 줄 모르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제 부족함 곧 미완성의 부분은 재생할 때
전해져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요구와 감각의 기능을 가지고 출생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런 요구들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것을 없이하는 것이 신의 뜻이었다면 그는 그런 것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구를 죽이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자살이다. 하나님은 선의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괴로움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대신 평화를 얻기를 원하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화를 얻으려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화가 없는 상태로 우리 스스로가 처해진 상황일 뿐이다.
또 만약 요구를 버리려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요구를 죽이려는 자체가 벌써 하나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좋은 요구는 말살시키는 것보다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이 참으로 나에게 참된
기쁨을 주는 요구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111. 어느 기독교 단체에 속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그들 중에는 다름 사람보다 훨씬 큰 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보통 신자가 갈 수 없는 곳에 더욱
그러하다. 요한도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는 것을 보고 자기네들을 따르지 않기에 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라고 하셨다.
112. 세상에는 드러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비록 대중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을 하지 않으나 자신들끼리는 고백을 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게 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은밀히 해야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몸을 보면 각 기관들이 있어 서로 한 몸을 위해 각자가 맡은 일이 다르다. 크리스천은 모두 소금과 누룩이어서 소리 없이 다른 것에 맛을 내고 불게 만든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라 부르셨다. 어부는 그물을 던질 때에 소리나지 않게 해야
고기가 도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주님의 일을 위해 소리 없이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113. 두 설교자가 설교하러 시장에 나아갔다. 먼저 설교한 자는
현명하고 웅변도 좋았다. 그가 말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사람이 질문하였다. 설교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대로 대답하였으나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자연히 사람들은 옆의 다른 설교자에게
눈길을 돌려 그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다른 설교자가 일어서
대답을 하려하자 그 질문자가 막으며 정중한 경의를 표하며 군중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나는 이 분에게는 질문할 것이 없다.
그것은 내가 그의 생활을 알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을 보고 그를 통해 구원의 도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설교자에게서는 이러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입으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난 그 웅변가는 조용히 돌아가 회개하여 그 후 참되게 하나님을 믿고 전하는 자가 되었다.
114. 구하는 자는 찾아내며 찾아낸 자는 다시 그 이상을 구하는 법이다. 파스칼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를
찾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을 이미 찾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임재에 대한 지각을 이미 주셨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사람이 찾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계시지만 그를 붙잡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주의하여 하나님께 연결이 되어야 한다.
공중에 전파가 아무리 많이 날아다닐지라도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115. 우리는 주님을 왜 믿는가. 우리가 헤어날 수 없는 곤경에 빠져있을 때 우리를 그곳에서 건져주었기 때문인가 아니 이보다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주님은 참된 우리의 구주시며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가.
116.
117.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기 전에 새로운 피조물로 고쳐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죄에 더럽혀지고 타락한 낡은 인생은 그를 알 능력을 갖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그를 알기 전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성질이 우리의 것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그를 참된 하나님으로
알게된다.
118. 인간은 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했을 뿐 아니라 또한 죽은 것이다. 마치 공기를 보지 못하듯 그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죽은 자는 공기 속에 누워 있으면서도 호흡도 하지 않고 감각도 없듯이 죄로 죽은 자도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지 못하고 기도의 호흡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담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을 때 그는 생령이 되었으나 죄로 그 생명은 죽었기에 주님이 다시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셔야 할 필요가 생겼다.
119. 우리가 태양을 보려면 태양 자체에서 나온 빛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보는데도 그냥은 볼 수 없고
주님에게서 비쳐지는 영적 빛의 조명을 받아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보려면 영적인 시력이 열려야 한다.
부엉이와 박쥐가 눈은 있어도 낮에 비추이는 태양으로부터 도움을 얻지 않아 볼 수 없듯이 장님과 영의 눈먼 자도 보려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120.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 영적인 지식은 이 세상의 지식과
다르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과는 다르게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직관으로 더욱 환하게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상이나 지식은
때때로 어리석은 이야기가 되어 내적인 소리를 침묵케 하고 거기에 기교를 섞어 오히려 사람들을 어리석게 한다.
121.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만의 경험을 많이
해야한다. 또 참된 영적 지식은 오직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만 온다. 하나님은 마음의 은밀한 골방에서만 사람과 이야기하시며 우리는 거기서 조용하고 잔잔한 소리를 듣는다. 이런 때 그의 자녀에게는 숨기지 않고 계시하신다. 이 세상 지식은 귀납법에 의하여 얻을 수 있고 영적 지식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직관(논리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에 의하여 얻는다.
122. 해는 그 빛과 열로 수목의 성장을 돕지만 만약 나무에 병이나 결함이 있으면 같은 빛과 열은 오히려 그 나무를 죽인다.
이것은 태양의 잘못이 아니고 나무 자체의 상태에 따른 것이다.
그처럼 사랑의 하나님이요 생명의 빛 되시는 주님도 인간의 영적 발달을 위해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인간 자신의 성질에 따라 생명 주는 빛을 변하게 하여 자신의 멸망을 초래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과 같게 만든 인간을 상하게 할 자는 인간
자신밖에 없다.
123. 하나님 없이 인간이 생활한다는 것은 벌써 그의 영적 지각과 감각이 둔해지도록 자신을 손상시켰다는 말이요 이때부터 남도
손상시킨다. 내 영적 감각이 죽으면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124. 우리의 내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사물이나 장소는 이 세상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 욕구는 육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과 그 욕구를 만드신 자에게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재산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왕궁에 살지라도 행복이 없으며 그리스도인이 비록 빈곤과 곤란과 고뇌 속에서 가지는 것만큼의 행복과 평화를 가지지 못한다.
125. 물질의 특별한 용도는 우리의 영혼의 집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만큼 정당하게 쓰이는데 있다. 만약 그 용법에 적당한 용도를 넘어서면 영혼을 제 2의 위치에 놓고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된다.
126. 많은 사람들이 그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있으나 모두가 좋아서 지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어서 짊어지고 있는 것이며 이는 구레네 시몬이 진 것과 별로 다른 바가 없다.
이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127.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승천할 때는 자기 있는 곳에 모든
사람을 이끌 것이라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은 마치
자석과 같이 속에 끌리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들인다. 주님의 요구는 그가 있는 곳에 그를 섬기는 자도 있게 하는 것이다. 세상 전체가 골고다 주님의 좌우에 선 강도들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한 편은 주님을 시인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천국에 들어가지만 다른 편은 회개하지 않고 도움도 구하지 않아 멸망으로 간다. 이 강도들의 모습이 바로 세상의 양편으로 갈라진 사람들의 운명이다.
128. 물이 가득 있는 통 속에 컵이 담겨져 있고 그 컵 속에 또 물이 담겨있다면 물과 컵 중 어떤 편이 어떤 편 속에 있는 것인가.
이 관계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이다. 컵은 엎드려져도 자빠져도 통 속의 물 안에만 있다면 컵 속의 물은 쏟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 안에 살며 주님도 우리 안에 사신다. 또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129.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지만 은총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게 될 수 있다. 구원도 우리가 현재 온전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얻은 후 그 토대에 서서 드디어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육체, 무능력한 허약의 육체, 이미 죄에 의해 썩을 대로 썩은 육체 속에 유폐되어 있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체에는 매일 많은 먼지가 끼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일 목욕을 하면 그것은 우리를 손상치 못한다.
우리에게 부족함과 약점이 무수할지라도 생명의 생명이요 영의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 이를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해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완전을 위한 싹을 가지고 있으며 장차의 완전은 이 위에 근거를 가지기 때문이다. 자녀로서의 모습으로까지 우리를 끌어올리신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때에 이르러 우리를
더욱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130. 위험은 항상 창조자에게 받쳐야할 마음을 피조물에 두기 때문에 생긴다.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사물 속에서 창조주의 뜻을 찾고 그에 모두를 맡기고 신뢰할 때 평화가 오고 이를 어길 때 불안이 생긴다. 불안은 신과 무엇인가 어긋났다는 표시이고 평화는
신과 조화한다는 표시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치 물과 같아
인간이 그 물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또한 그 물 속에 빠져도 죽게 된다. 이처럼 은총으로 주어지는 물과 같이 삶의 주류로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이지만 이것들에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욱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은 오히려 독으로 변해 우리를 죽인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불안의 끝이 보이고 평화가 온다. 이 하나님은 예수의 삶으로 표현되었다 자기를 사랑하기보다는 남을 사랑하고 내어주며 희생을 기쁨으로 여기며 낮아지고 겸손하며... 그분의 생애는 이와 같았다. 그분은 이러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은 존경받고 사랑 받고 자기를 높이며 모든 것을 가짐으로 평화를 누리려 한다.
131. 우리가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보이는 세계 속에 살기에 그들을 필요로 할지라도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진정한 목적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 가운데 배가
있을지라도 그 목적은 물을 싣는데 있지 않고 배를 물 가운데 띄운 자의 의중에 있는 것과 같다. 어찌하여 인생은 보이는 것만 그 마음에 퍼담는지 어리석기 짝이 없다.
132.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위에 표현하셨다. 그리하여 산이 있고 바다 꽃과 나무 이름 모를 새 여러 생물 하늘 구름 인간 등 보이는 것과 이 모두를 보호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셨다.
그리고 생기를 넣어 그 모든 것이 실제 살아나도록 하셨다.
이중에 인간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고 지켜줄 수 있도록 더한 뛰어난 색채와 부드러움으로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돌보고 섬기는 자의 위치에서 빼앗고 누리는 자의 위치로 자신을 스스로 올려놓았고 모든 것의 혀가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때
그의 혀는 침묵의 혀가 되었다.
133.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나타난다 면 자신도 바울처럼 변하리라 생각하지 말라. 인간의 속을 아시는 분은 인간 자신도 아니고 그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단지 인간 개개인의 여러 조건에 알맞게 그의 상태와 필요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신다.
134. 때때로 우리의 염원과 요구의 밑바닥에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난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사는 자만이 이 소리를 용이하게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의 종의 생애를 통해 세상에 빛나듯 성령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그릇으로 성화된 생명을 쓰시듯 인간의 영혼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두뇌처럼 아주 미묘한 기계를 쓴다.
135. 그리스도의 종은 달처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그것을
간접적으로 세상에 비춰준다. 또 달은 때로 세상과 태양 사이에
와서 일식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이처럼 주의 종이면서 옳은
삶을 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빛을 가리는 원인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 하는 자는 개인적으로 그 빛을 인식하고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다.
136. 어느 추운 겨울 날 한 장님이 점자로 된 성경을 읽으려 손을 움직였으나 손가락 끝이 얼어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화로 있는 데로 가서 손을 녹인 후에야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느끼고 알기 전에 이미 죽은 우리의 내적 감각이 새로운 생명으로 각성될 필요가 있다. 기도와 명상 중에 하나님의 불인 성령께서 우리의 얼어붙은 내적 감각을 따뜻이 한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듣고 볼 수 있다.
13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지식이나 말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지식이나 말은 외부적인 것이나 영의 말씀은 내부를 여는 것으로 이는 마치 어린이들이 쉽게 모국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다. 영적인 사람은 진리를 말이나 지식의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소경이고 귀머거리며 벙어리인 헬렌켈러는 인간은 인간의 지식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 전에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어디서 온 것인가?
138. 이 세상에는 밤이 불과 몇 시간 밖에 없는 곳과 몇 달 계속되는 곳이 있다. 그처럼 우리 생애에는 슬픈 때와 기쁜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필연코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생애에 있어서 십자가를 진 사람은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살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나무가 겨울에 잎사귀를 잃고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 잎이 피어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박해를 받고 자신을 낮출 때면 죽은 자처럼 보이나 그 후 몇 번이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고통 속에 있음에도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기워 있는 것이다.
139.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곤란 속에 허우적거려 쓰러지기를 수
없이 하여도 결코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통 속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 고통은 그대로인데도 불구하고 가냘픈 것처럼 보이는 기쁨이 솟아나며 그 엄청난 고통을 이기게 된다. 이는 고통이 끝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지난 다음에
기쁨이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도 아니다. 거기에는 이 세상의 이치로는 측량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이 세상의 기쁨과 같은 성질이라면 누가 그 기쁨을 흉내내보기도 하련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은 신비로워 세상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주신 짐은 그 외적인 모습이 너무나 엄청나고 혹독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참모습은
가벼우며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을 증거 하였다. 참된 평화가 오는 것은 그들의 어깨에 그리스도의 무거운 짐이 올려져 있을 때이지
그 짐이 벗겨졌을 때가 아니다. 세상은 이 놀랄만한 기적을 경험하지도 못하니 믿을 수도 없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술에 취해서 슬픔을 잊으려 하며 또 잠깐
사이의 흥분과 기쁨을 취하려 한다. 물론 그것도 기쁨임에는 틀림없으나 모든 사물을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 찾는 기쁨은 그보다
훨씬 우월하고 오래 계속되리라는 점에는 충분한 음미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기쁨을 한 번이라도 맛본다면 다시는 귀중한 시간을 피조물 가운데 있는 잠시동안의 기교적인 쾌락을 찾기 위해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140.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일한 한 신자가 병에 걸려 불구자가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그러한 상태에 있으면서 남을 돕던 자신이 오히려 남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어 있는 것과 더 이상 주님을 향하여 봉사할 수 없음을 슬프게 여기며 기도로 하루 하루를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자각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삶은 그가 건강할 때보다 더 많은 감화를 사람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는 불구의 몸으로 자리에서 감미로운 향기를 내뿜는
꽃처럼 누워있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의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맑고 아름다운 생의 환한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갔다.
이 조용한 감화력이 주위에 퍼져 많은 불신자들이 그의 삶 속에는 어떤 깊고 진한 진실이 있을 것이라 여겨 그에 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결과 그들도 점차 그의 신앙의 진실을 발견하고 감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설교와 철학적인 논증과 이론을 들었으나 그의 삶 속에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생애를 보고 배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감화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건강이 필요했다면 건강을 주었을 것이나 현재와 같은 정도의 영향은 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연약한 가운데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봉사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누워있는 자리는 슬픔과 절망의 자리가 아니고 많은 사람을 향하여 지고있는 십자가의 자리인 것이다.
141. 선다싱은 보통 시크족이라 불리 우는 집에 태어나 인도교의 가르침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를 신봉하는 산 모범이요 충실한 대표자였다.
어머니는 매일 일어나 목욕한 후 '바가밧트 기타'와 다른 인도 경전을 읽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그 순결한 생활과 교훈에 감동되었다. 아침에 행할 제 일의 의무는 먼저 영적인 양식과 축복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야 비로소 조반을 먹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마음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때로 이를 어길 때는 어머니는 사랑으로 또는 벌을 주면서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그 뒤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을 마음에 새겨 주었다. 그 시절에는 그가 아직 어려서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으나 그 뒤 깨닫게 되었다. 그가 그 일을 생각할 때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심어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품속은 가장 좋은 신학교였다.
후에 그의 어머니는 그를 한 인도 철학가와 시크족의 사두에게
맡기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그는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참된 평안을 얻지 못해 이에 대한 갈구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영혼이 허덕이며 구하는 진리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야 어찌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그는 한 밤중까지 경전을 읽을 때가 보통이었다. 영혼의 평화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는 그를 즐겁게 할만한 많은 것들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의 고민은 새롭고 이상한 것이다. 그 고통은 그가 좀더 성장하여 영적 생활에 대해 보다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으면 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충고를 그는 들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기를 어린이가 당장 빵이 없어 굶주리거나 물이 없어 고통 할 때 커서야 비로소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어린이에게 무슨 도움이 있을까 반문하였다. 그들은 또 이 같은 영적인 깊은 진리는 하루아침에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성급히 굴지 말라고 권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어린 그가 아는 작은 지식이 그만큼의 갈증과 욕구를 일으키는데 커서 그 지식을 알수록 점점 그의 갈증과 욕구는 더하게 만들 것이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고 영혼의 갈증과 굶주림을
해소할 영적인 물과 빵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사두는 그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경전을 통해서 이제껏 네가 지닌 것이 불완전한 유한의 지식 때문이며 계속 정진하여 완전한 지식을 얻는다면 그때
이 욕구라든가 염원이 단순한 미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네 자신이 신의 일부분이므로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무런 욕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만약 신이거나 신의 일부라면 그에게는 당연 어떠한 미망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미망이 있다면 그는 이미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신이
미망에 종속되고 미망이 신보다 강하여 미망이 실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는 인생의 심한 비애를 느끼고 어느 날 새벽 세시에 일어나 만약 하나님이(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님) 계시다면 자신에 나타나 구원의 길을 나타내 주기를 기도하고 이 응답이 없다면 날이
밝기 전에 철길에 나가 자살하려 하였다. 기도 중 그는 인도의 여러 신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였으나 그들 중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나의 빛이 실내에 비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문을 열고 그 빛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살펴보려 했으나 밖은 어디나 어두웠다. 안을 바라보니 빛은 더욱 밝아지며 아주 강하게 지상에 임하여
둥근 모양을 이루었으며 그 빛 가운데 나타난 것은 그가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였으며 그는 자신이 죽은 자로 알고 있던 분이었다. 그때의 그 모습은 그가 죽게 된다해도 그 영광과 사랑이 가득 찬 얼굴과 말씀하신 몇 마디의 말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는가 보라 나는 너를 위해 또 전 세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이다" 이 말씀은 영광처럼 그의 마음을 불태웠으며 그는 주님 앞에 쓰러졌다 그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였으며 전 생애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가족과 친족에 의해 죽음에 임박할 정도의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그 박해는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을 때에 가졌던 서글픈 불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42. 기독 신자가 아니면서 진리를 탐구하려고 하는 자들은 고행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견디고 있으나 실제 기독인들은 주를 위해
그들처럼 고난을 겪으려 하지 않고 그들의 사랑이 참된 것이 아니라고 비난하기만 한다 이 점에 있어 기독인들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143. 그리스도를 알고 또 그의 구주로 믿기 전에 주님은 마치 눈 속의 안약처럼 역사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몰랐다. 눈은 그 속에 있는 안약으로 밝아지게 되므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으나 그것을 볼 수는 없다. 그의 불안한 영혼은 그를 찾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가까이 계셨으나 그의 눈의 시야에는 숨어 계셨으며 그를 이끌어 오게끔 시도하셨다.
그는 마치 어린이가 뜰의 나무 그늘에 숨었을 때처럼 이 세상의
화원 속에 있었던 것이다. 어린 아이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으며 정원 가꾸는 사람이 달려와 과일을 주며 그를 달래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과일은 아랑 곳 없이 엄마를 찾아 울기만 했다. 드디어 어머니는 나무 사이로부터 나와 애를 들어 올려 입을 맞추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평안해진 어린애는 그가 요구하던 것을 찾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우주적인 어머니는 때때로 그 모습을 이 세상의
동산에서 숨기는 때가 있다. 이 어린 아이처럼 어머니의 사랑 외에 아무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자에게는 어머니도 그를 지켜보고 그를 안아주며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143.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을 때에는 희망이 없고 미래 생활에 대해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앞에 있으며 주님은 공포를 사랑으로 바꾸셨다. 공포는 잠깐이며 사랑은 영원하다. 신앙과 사랑은 영혼의 넝쿨이 되어 태양이신 하나님의 빛과 열을 받으면서 사랑의 주님께 매달려 하늘을 향하여 성장한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지 않을 때는 절망과 암흑 가운데 시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144. 주님은 양쪽 세계에 거하신다. 주님은 이전에 육의 세계에
계시면서 동시에 영계에 계셨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섰을 때에는 창조자의 음성으로 나사로여 나오라고 말하였으며 그의 친구의 영을 육체로부터도 아니고 영계로부터 불러내신 것이다.
따라서 이 명령을 듣자마자 영은 영계로부터 무덤에 또 육체에
돌아온 것이다.
145. 그는 배고픔과 추위로 지치고 고통스러울 때 오히려 그의
마음은 놀랄만한 평화와 기쁨으로 차 있으며 유혹을 이기고 한밤중이 되도록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는 가정을 가지고 안락하게 지낼 때 이 놀랄만한 평화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화를 찾아냈다. 그것은 세상이 주거나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46. 하나님의 약속이 채워지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약속을 등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에 결함이 있거나 주님이
그들을 위하여 더 좋은 일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147. 우리 속에 굶주림이나 갈증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물과 물이 있다는 증거다. 이 세상의 길고 긴 세월 속에서 단순히 상상만으로 주림과 갈증을 만족시켰다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직 영의 기갈을 창조하신 자 안에서만 영구히 누릴 수
있다.
148.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배의 형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교파가 생겨나고 있는데 그것들의 하나 하나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참다운 요구는 새로운 형식을 채용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수가 신자 속에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산맥 속에서는 물이 절로 길을 만들며 흘러가기에 운하를 만들 필요가 없지만 계곡을 흐르는 물이 평원에 이르면 사람들은 물이 흐르도록 운하를 판다. 이처럼 물이 여러 종족 사이를 흐를 때 여러 개의 운하를 만들 듯 여러 형태의 교회를 만든다. 그러나 때가 되면 교파는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149. 칭찬은 영적 진보를 방해하나 비평은 이런 위험이 없다.
참됨은 지나친 칭찬 속에도 또 지나친 욕설 속에도 없고 그 중간에 있다. 성자와 평범한 자와 다른 점은 성자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이는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자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다.
150. 만약 속의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
눈동자가 병들면 눈 속에 어두움이 생길 뿐 아니라 온 누리가 캄캄하여진다. 잠수부는 물 속에서는 호흡을 멈추고 죽어있는 상태가 된다. 또 숨을 쉬기 위해서는 공기 관을 통해 공기를 호흡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 또 기도의 관을
통해 성령을 호흡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으면 물을
벗어난 고기와 같고 물 속에 들어간 새와 같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사랑의 대양 속에 있게 되고 이 세상에 있지만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이다.
151.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보이지 않고 숨겨진 실재다.
외부에 나타나는 생명은 생명의 활동이며 그 한 부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생명의 본질을 이해 못하고 그저 물질에 귀착시켜 버린다. 생명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근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누구도 피조물은 참된 내적 생명을 자연적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다. 이유는 생명이 그 물체 자체의 부분적인 표현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진상은 물질계에서는 표현하기가 불충분하고 영계에서만 가능하다.
152. 우리는 동물을 알아도 외적으로만 알뿐이고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다. 짐승은 온도와 운동과 성장 그리고 생명의
외면 현상을 가지고 있으나 이는 외부에 나타난 표시에 불과하다. 그것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저 밖에서 보고만 있다.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우리의 필요와 수용에 따라 그 피조물의 정체를 알게 된다. 하나님을 앎으로 그 모양에 닮게
만들어진 우리 자신과 그 성질을 알게 된다.
153. 모든 만물을 하나님을 벗어나 자신에 고정시킬 때 이는 실재를 알게 되는 것을 방해한다. 신과 그를 경험하는 깊은 부분은 설명하기 참으로 곤란한 일이지만 그것을 즐기며 행위 속에 넣을 수는 있다. 명상과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면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이 세상에서도 하늘 나라의 큰 기쁨의 광맥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를 경험한 사람도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기에 세상은 이를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다.
154. 그는 하늘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바랐으나 육체는 병들어 영과 육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영은 가는 것을 요구하고 육체는 뒤로 끌어 다녔다. 그러나 영으로 육을 이겼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 속에 무슨 큰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처럼 그는 말로는 그 무엇을 설명할 수 없었으나 몸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알려줄 수 있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바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한 의미이다.
155. 곤충이 그들의 안테나를 가지고 주위의 것을 느끼며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구별하듯 영적인 사람은 그들의 내적인 감각을 가지고 판단한다. 영혼이 그 자신에게 돌아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으로 거꾸로 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많건 적건 간에 내적인 수용력이 있어 진리를 지각할 수 있으나 그들은 이것을 모르고 오히려 이를 어떤 특수한 사람들의 일로 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것은 논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직관을 필요로 한다. 알게 하는 이로 말미암아
그냥 터득하는 것이 직관이다.
156. 살고자 하는 의지는 생명을 완전한 상태로 촉진시키려는 하나의 충동이며 그 목적을 위해 합당한 상태로 만들어 간다. 그 의지를 통해 생명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 때 그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 이른다. 하나님 안에 있지 못한 자에게 생활은 무거운 짐이 된다.
157. 고생과 근심 때문에 피곤한 삶을 보내는 자가 '살려고 하는
의지'를 억제하여 자살할 수는 있다해도 그는 '믿으려고 하는 의지'로부터 놓여날 수는 없다. 그들은 영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것이라 믿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 우리는 우리가 확실하지 못하다는 것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인간의 불확실성을 고백한다. 내적 생활이나
사람의 인격은 너무도 확실한 것으로 이는 장소를 옮기거나 죽는다 해도 변하게 할 수 없다. 오직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음으로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으로만 변하게 할 수 있다.
방황하는 자들은 그들의 내적 요구를 창조자 가운데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삐뚤어진 방법으로 채운 결과 행복과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불쌍한 존재가 된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행복에 대한 수용량 까지 잃고 죽게된다. 만약 그가 범죄의 감각을 잃어 양심이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영적인 자살을 행한 자이다. 그는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죽였을 뿐 아니라 가능성을 가진 영혼마저 죽인다.
158. 참된 기쁨과 만족이 물질에 있다면 세상의 모든 부자는 행복하고 만족해하며 살았을 것이다. 또 불타와 마하비라 등의 귀족은 그들의 왕국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참되고 영원한 것은 우리가 새롭게 거듭날 때 마음 속에 모셔진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축복에 찬 생활의 비밀과 사실은 그 속에서 받고 살며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 누가 지식에 의해서만 이를 이해하려 한다면 죽기까지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이 나라이다. 한 과학자가 새를 붙잡아 그 속 어디에 생명이 있는 가를 알려고 새를 해부했으나 허사였다. 이처럼 내적인 것을 단순히 지식만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분석의 결과 있던 생명까지 꺼져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 해부 당한 새는 죽어버린 것이다.
159. 이 큰 세계에 비하여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그처럼 큰데도 작은 인간의 마음 하나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에서 눈을 돌려 언제까지나 성장해 가는 영혼과 그 수용량을 위해 무한하신 하나님께로 달려가야 평화를 얻는다. 물질적인 육체는 영혼과 영구히 함께 있을 수 없으며 어느 기간 동안 세상의 일을 위하여 영혼의 그릇으로 그 목적을 다한 후 육체는 그 연약함과 노쇠 때문에 쇠태 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는
영혼과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한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을 수는 없다해도 함께 있던 기간 동안 이룬 업적은 영원히 남는다. 이 일을 주의하여 육체로 거하는 동안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자유는 인간이 그 마음으로 선과 악 어느 것이든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에 악에 끌려가는 것은 그것의 노예가 됨을 뜻하고 결과 자유와 생명을 잃어버린다 죄를 버리고 진리를 추구할 때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맛본다.
160. 주안에서 죽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은 죽는 자의 주님이 아니고 산 자의 주님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 또한 주님의 일 가운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를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다.
161. 선한 생애와 악한 생애는 금강석과 석탄과 같은 상이점이 있다. 그들은 동질인 탄소로 되어있지만 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금강석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햇빛을 반사하지만 석탄은
햇빛 속에서도 칙칙하고 어두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같이 의의 태양은 선인이나 악인 어디든지 빛을 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반사하는 것이다.
162. 인간의 상태는 지구와 같다. 우리는 해가 저물어 우리로부터 사라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지구가 움직여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만약 지구가 태양에 의해 끌리지 않는다면 지구는 공간 속에 잃어졌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도 또한 그 사랑의 인력으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끌고 계신 것이다.
163. 몸 안에 있는 한 지체가 아플 때 전신이 그것을 고치려고 분주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는 신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의 죄와 상처를 고치고 영적 건강의 기쁨으로 우리를 충만케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받은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는 고난과 유혹으로부터 해방을 받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은 이 생명을 받음으로 이제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벗어난 것뿐이지 이전보다 더 많은 싸움과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전에는 그 고난이 고통으로 느껴졌으나 지금은 그것이 축복이요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 싸움은 우리의 숨은 능력과 상태의 진보와 완성을 위하여 필요하다. 주님은 이 거룩한 싸움에서 우리가 이기도록 도울 것이며
세상과 사탄과 죽음을 이김으로 그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사물의 큰 것은 작은 것의 연속이고 그 집합체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 되야 이미 그 작은 것의 승리 속에 큰 것에의 승리도 놓여있는 것이다.
164. 이 세상에서는 외적인 생활과 내적인 생활의 차이가 근소한 것 밖에 보이지 않으나 이에 답답해 하지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때 얼마 후에는 내외의 생활이 영구히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가 올 것이다. 외부는 바르게 내부에 응하며 내부는 바르게 외부에 적합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될 것이다.
165. 1921년 히말라야 산 중에 큰 산불이 일어났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와중에 물건을 꺼내기 바빴으나 몇몇 사람은 우두커니 서서 나무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리의 새가 아주 괴로워하며 둥지 위를 분주히 떠돌고 있었다 몇 초 후에 불은 더욱 번져 새 둥지에 옮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미 새는 그때까지도 날아가지 않고 오히려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덮고 있었다 한 순간이 지난 다음
불쌍한 새들은 불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사랑이었다.
사실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그의 사랑이 보이는 것이다.
그 어미 새의 사랑은 하나님께 있던 그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 놀라운 사랑을 하찮은 새에게까지 부어주셨다.
이 무한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게 하고 우리를 구원키 위해 우리의 죄 속에서 생명을 내어
죽게 한 것이다.
166. 어느 나이 어린 소녀가 불교 노승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했다. 그러나 노승은 그가 어리기 때문에 그 믿음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소녀는 이에 아랑 곳 없이 말하였다. "나는 나의 부모를 알기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도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내 밖에 살아 계시나
그리스도는 내 속에 살아 계십니다. 부모는 내 외적인 것을 기쁘게 하여주지만 그리스도는 내 속을 기쁘게 하여줍니다.
참된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노승은 그 어린 소녀로 24시간 동안 고난을 겪게 한 후 다시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 소녀는 마음 속으로 일어나는 참된 평화 속에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조금도 피로하거나 미움과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노승이 소녀에게 고백하였다.
"너는 나의 선생이다 나는 늙었고 너는 13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너의 제자이다. 너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소녀는 설교는 할 수 없었으나 노승이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다.
167. 어느 추운 겨울 날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밤새도록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지샐 때 사단은 따스한 집과 그리운 가족 생각으로 그를 유혹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였으며 기도 중에 깨어 기도하라는 영음을 들은 후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평화와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동굴에서 나와 한 나무에서 약간의 잎새를 뜯어먹었다. 그 잎은 딱딱하고 맛도 없는 것이었으나 실제 느끼기에는
아주 맛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였다는 증거다. 그는 사단에게 그리스도는 항상 내 안에 계셔
나와 함께 하신다고 체험적으로 확신 있게 외쳤다.
168. 그는 가정에서 편한 환경 속에 있을 때는 결코 편안하지 못했으나 이제 주님을 알고 주님을 따라 고난 중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해 보임을 그의 아버지는 이상히 여겼다. 그것은 이전에 모르던 주님과 그 나라를 보고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알기를 원하면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알려하는 자는 기도를 해야한다.
많은 무신론자들과 이교도들도 성경을 읽으나 기도 없이 지식으로만 깨달으려 하기에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 진리(지식)은 필요하나 이 문을 여는 것은 기도이다. 잃어버린 우리의 구주를 찾는 것이 인생의 급선무이다. 그를 찾아 당신만이 지금과 과거와 미래에 나의 구주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한다.
169. 많은 사람들이 천부에게 이런 저런 일을 구한다.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건만
우리는 그와 달리 기도하여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한다. 또 우리는 혓바닥을 통해서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만 실제 우리의 마음과 행한 일은 그 반대를 기고하고
있던 것이 우리의 마음의 깊숙한 본질이었다고 마음의 위장을 증거 한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금방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입장이시다.
170. 어떤 이가 죽으면서 말을 남겼다. '내 일생은 외적으로 보면 고난과 괴로움의 연속이었으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감사한다. 긴 세월 동안 고난 속에서도 나는 놀랄만한
행복을 지속해왔다. 이 기쁨은 왕이 그의 화려한 궁전 속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아주 쇠약해 보였으나
그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고 그 눈에는 하늘 나라가 비치어 나왔다. '아마 잠시 후면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죽은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참된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을...'
171. 날 때부터 앞 못보는 장님이 추운 겨울 날 양지에 앉았다.
그는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을 받고는 그 열은 자신의 상상의
결과 몸 속에서 열이 순환하기에 생기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동안 그 따스함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어도 그는 태양을 본 적이 없어 불덩이가 허공 중에 걸려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신자들이 맛보는 기쁨과 희열은 마치 이와 같아 그것을
겪은 자 외에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경이로움을 알 자가 없다.
172. 어느 사람이 문둥병자를 위문하였다 '참 안되었습니다.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사뭇 아픕니다' 그런데
그 문둥병자의 대답이 이러했다. '당신이 내게 대해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신 마음이 선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하지만 세상은 신비로워 저와 같이 몹쓸 병을 얻은 자가 반드시
괴로움 속에서만 일생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놀랄만한 평화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문둥병이 오히려 내게 친근하고 삶의 기쁨이 이 속에 있다면 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만약 내가 건강해 있다면 나는 살인을 했거나 도둑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문둥병으로 인해 영혼의 문둥병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이 육체의 병이 낫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는
내 영적인 문둥병이 고침을 받아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이 다른 모든 고통과 슬픔을 오히려 감사로 바꾸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저를 위로하러 오지만 저보다 더 큰
즐거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173. 이전에 사막을 여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피곤하고
갈증을 느끼다 서편 먼 곳에 호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척 기뻐했다. 그는 희망을 걸고 그곳을 향해 장시간 걸었으나 그는 호수를 찾을 수 없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신기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실제 아무 것도 없었는데 태양 빛의 반사에 의해 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영혼도 만족을 위해 세상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다닌다. 그러나 신기루와 같이 보이는 샘물이 있어
사력을 다해 그것을 움켜쥐어 보면 그것에는 영혼의 갈증을 풀어 줄만한 참된 샘물은 아니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이곳 어디에도 그의 갈증을 풀어줄 한 방울의 물도 얻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갈증으로 죽으려 하였을 때 그의 영안이 열려 생명수가 샘을 이루며 주님의 옆구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제 이 세상이라는 사막을 지날 때 이 물을 마시고는 결코 목마르지 않는 자가 되었다. 이 주님과 함께 있다면 감옥도 지옥도 그 어느 고통스러운 곳도 우울한 곳도 다 하늘로
변하여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174. 벙어리가 과자의 단 맛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구원을 받은 자라도 그 입으로 주님이 계시다는 존귀한 사실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 이 천적평화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말이 아니고 하늘의 말뿐이다. 바다 물이 아무리 짜다해도 그 속에 사는 고기의 살맛까지 짜지는 않는다. 이는 그에게 생명이 있는 것 때문이다.
만일 그 고기가 짠맛이 난다면 그것은 죽어 짠기가 배어있음에
틀림없다. 세상은 죄와 악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살아있다면
영혼이 그 가운데 빠져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한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아도 세상 것이 아니고
이 세상과 하늘나라에서 어느 곳이든지 우리는 늘 주님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175. 그리스도 신자가 이 존귀한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성경과 두뇌 속에서만 살아있고 그 마음 속에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 마음을 주님께 받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은 왕의 왕인 주님의 보좌이다.
하늘의 주부는 주님이 통치하시는 마음인 것이다 그의 사랑을 얻으면 세상을 향한 사랑이 쫒겨난다.
176. 그가 히말라야의 한 고산에서 길을 잃어 방황할 때 적의를
가진 사람들이 그에게 고의로 위험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방황하다가 강을 만났을 때 밤은 오고 사방에 맹수는 들끓어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그때에 강 건너에 한 사람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고 있다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구해 줄테니
걱정 마시오' 그 사람은 아무 두려움도 없이 강을 건너와 그를 등에 업어 날랐다. 강을 다 건너 그가 감사하려 하니 그는 그곳에 없었고 모닥불도 흔적조차 없었다. 아아! 이는 주님이시다. 그는 어제도
오늘도 변함 없는 사랑으로 그를 지키고 계셨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변하는 것이다.
177. 주님의 십자가에서 사람들은 죄의 용서만을 바라보고 이를
구원이라 여긴다. 죄가 용서된 후에도 우리는 자신의 죄에 의해서 죽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죄가 용서된 후에도 그들의 죄 가운데 죽어간다 구원은 단순히 죄의 용서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용서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빌어 죄를 씻는 것만이 구원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의 피를 믿노라 하면서 자꾸 죄를 범한다면 그 죄 가운데 죽게 될 것이다. 범한 죄의 사함 받음이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된 성질이 고침을 받는 것이 주께서 주시려는 구원인 것이다. 이를 위해 성령이 오셨다.
하나님은 우리 죄의 용서라는 한 사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의 참된 본질 여하에 따라서 이에 맞는 삶을 하늘에서 보내도록 하신다. 죄의 성질이 고쳐지지 않은 상태는 저곳에서도 변하여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형성된 영혼의 아름다움의 상태에 따라
그 영혼의 본질 그대로의 삶이 위에서도 계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바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곳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의미이다.
178.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번뇌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크다. 그것이 죄의 결과라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며 준비된 내적 평화를 주실 계기를 마련하신다. 고통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적 생활과 진보와의 사이에 본질적이며 필수적인 요소이다. 참된 신자라면 그 길을
반드시 가야한다는 뜻이다. 고통과 번뇌가 피조물 누구에게든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없애버렸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정도가 지나치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자가 세상에 없다. 지금의 고통이라 보이는 것이 먼 후일의 참된 축복의 전조였던 것을 유한한 인간은 미리 계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알의 종자가 성장하여 햇빛을 받고 아름답게 자라기 전에 한 참을 어두운 곳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 정해진 시기에 싹을 나게 하고 열매를 맺는다.
179. 하늘나라는 미래의 나라가 아니며 이 지상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하나의 죄라도 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다. 작은 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마치 작은 세균이
병을 일으켜 덩치큰 사람을 죽게 하는 것과 같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균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고 있듯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죄 때문에 화를 입고 있다. 우리가 평화를 경험하는 것은 죄 가운데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때이다.
만일 그러하지 못하고 늘 긴장과 불안 속에 산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내 편에 영혼의 고장난 부분이 있다는 경고이다. 구원의 증거는 과자를 먹으면 단 맛을 느끼듯 내적인 신비로운 평화를 지니며
산다는 것이다. 열대에 사는 사람들이 겨울에 내리는 눈을 알지 못하여 눈이나 얼음에 상하여 동상에 걸린다는 사실을 모르듯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죄가 고통의 근원이라 생각지 못한다.
180. 전도를 위하여 여러 마을을 돌 때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은
신비하게도 고통이라기보다 기쁨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지옥 속에 있지 않고 천국 속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의문을 남길 수 없는
명백한 방법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기 전에는 모든 것이 고통이었고 지옥의 느낌 속에 살았으나 회개한 후부터는 고통은 여전히 역사 하였으나 그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지상의 천국 속에 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181. 1914년 7월 7일 험한 여행으로 지치고 극도의 굶주림과 강풍 속에 언덕길을 오를 때 무서운 돌풍이 불어 그를 언덕 밑의 한 동굴 속으로 처박아 넣었다. 그는 그 높은 곳으로부터 떨어졌는데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 동굴은 하나님의 애무로 변하였다 그곳에 상처 따위가 있을 수 없는 낙원이었다. 돌풍은 사랑의 큰 여울이 되었고 폭우는 은혜의 비로 변하였으며 기갈은 만족으로 피곤은
평화로 변하였다. 또 십자가를 진 예수의 여러 모습이 환상으로
그 앞에 나타났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는 모습과 굶주리고 목말라 하시는 모습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이 씌워져 피를 흘리시는
모습 그리고 그런 고난에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골고다 길에서 넘어지시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오! 이에 비하면 자신의 십자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은 오히려 감춘 만나였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는 그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십자가는 고통이 가득 찬 곳에서
평화의 물결 속으로 인도해 가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자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182. 그는 투옥되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그의 그리스도는 그를
감옥 속으로부터 해방하지 않지만 죄와 사탄으로부터 놓여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라도 또 감옥 속에서도 자유로웠다.
비록 그의 발에 족쇠가 걸리었다해도 그는 자유였다.
183. 한 수렵가가 사냥을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나무에 꿀 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총을 밑에 두고 올라가 꿀을 핥기 시작했다. 꿀의 단 맛 때문에 그곳에 위험이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호랑이가 다가왔다. 이제야 그는 자기가 위험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조금 있으면 호랑이가 가버리겠지 하며 또 호랑이가 덤비면 옆의 강으로 뛰어내리면 되겠지 생각하며 계속
꿀을 핥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강에는 악어가 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궁지에 빠진 것을 인식할 때 구원의 길이라고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위험은 곧 닥쳐왔다.
내려다보니 들짐승들이 나무 뿌리를 갉아먹어 이윽고 그 나무는
옆으로 쓰러졌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입장이다.
184.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행위가 생명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으로 우리는 저 세상에서도 살게 된다. 착한 생명은 천국에서 악한 생명은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게 된다. 인도교에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만사가
잘된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우리가 먼저 착한 사람이 되어야 착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착한 일을 할 수 있다.
185. 자연을 넓게 보면 자연의 몸짓거리와 그의 얼굴이 보이고
그의 소리가 들리고 그의 기쁨과 신음을 느끼고 그가 하나의 커다란 몸체를 가진 진정한 모습인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
인생을 너무 작게 보기에 밤낮으로 되풀이되는 세계 속에 답답함과 지루함이 인간을 아주 작게 만든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너무도
크게 만들었다.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면 그는 하나의 거대한 형체이고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자연과 육체 속에 한없이
작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고 자연보다 넓고 큰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너무 작은 세계에서 산다 마음을 열면 큰 세계가 보인다.
자연과 세상의 사건은 비록 그 몸체가 커다랗게 보일지라도 어린 아이와 같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 영적 힘으로 자신들을 돌보아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186. 어느 날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에게 그는 저항 없이 온 몸을 맡기자 그는 오히려 그에게 감화되어 그를 돕는 자로 변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는 의미이다.
187. 어떤 날 기도와 명상 가운데 그리스도가 임재한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의 마음은 하늘에 오를 듯한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 찬 세상에도 큰 기쁨이 숨겨진 무진장한
광맥을 보았다.
188. 주님이 이제까지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주님의 계시를 받을만한 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을 그가 모르고
있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 영으로 인간의 마음에 찾아오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보인 외적인 나타남보다 더 근본적이다.
189. 이제 주님을 만난 자는 보트를 타고 홍수로 휘몰아치는 물결 위를 떠가는 것과 같다. 이런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잃지 않는다면 누가 빼앗을 수 없다. 보라!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190. 만약 사람이 자신을 안다면 하나님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주의나 이론, 학문이나 지식은 내적인 소리와 감각을 말살시키며 기교적인 딴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참된 지식은 기도와 명상에 의한다. 이 세상의 지식은 교수에 의하여 얻어지며 영적인 지식은 하나님의 빛에 의하여 직관으로 얻어진다. 영적 지식과 내적 감각과 영혼의 힘은 죄로 인해 죽어버렸다. 빛은 이를 다시 살려준다.
191. 어느 한 소경이 점자로 성경을 읽으려 하였으나 추위 때문에 손가락이 얼어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 옆에 가서 손을 녹인 후에야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도와 명상에 의하여 의의
태양의 빛과 성령의 불이 마음에 힘을 주고 눈을 뜨게 하여야 비로소 우리는 하늘 나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192. 중생을 한 후에 성령은 이 세상의 말로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아도 직접적으로 영적 생명의 숨은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하신다. 영에 의하여 거듭날 때에 영적인 말이 우리의 모국어가
되고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말을 자연히 배우는 것처럼 주님의 생각과 뜻을 힘들이지 않고 배우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말은 그저
외적인 뜻을 전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의 사람은 그런 말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이 영적인 말은 육체의 귀에 들리지 않고 마음의 귀에 들리는 것이다.
해를 그 자체의 빛에 의하여서만 볼 수 있듯이 의의 태양도 오직
그 자체의 빛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적인 시각을 필요로 한다. 이는 소경은 보아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아는 것은 참된 뜻에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미 그 속에 죄가 깊고 타락하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로 인해 공기처럼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죽은 사람이 그 주위에 충만한 공기를 느끼지 못하고 호흡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93. 죄로 죽은 자는 하나님을 모르고 기도의 호흡도 기쁘게 여기지 않으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으나 생령이 죄에 의해 죽었기에 주님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사람에게 불어넣는 것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원의 생명이다.
194. 하나님을 찾기 위해 제 자신과 모든 욕망을 버리는 자는 하나님을 찾고 요구하는 것도 얻지만 자기를 버리지 않는 자는 스스로 영적 자살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하게 하는 자는 탕자와 같이 제 자신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이 남까지도 해치게 되나 이것도 모른다. 이 같은 연유로 살아있다는 것은 남을 위해 선과 자비를 베푸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195. 인간의 영혼은 육체보다 훨씬 뛰어나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데 기계 역할을 하는 두뇌를 통하여 스스로 일할 수 있다. 이처럼 중생한 영혼이 주의 뜻을 따라 남에게 봉사하려 할 때 성령은 그들의 생명을 통하여 역사하며 자신을 나타내신다.
196. 의의 태양도 인격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달이 태양으로부터 빌어온 빛의 반사로 어둠을 비추는 것이지만 어떤 때에는 태양과 지구와의 사이에 있어 어둠을 끼치는 것처럼 주의
종들도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있다.
197.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바다 속에 잠입하여 잠시동안 숨을 멈추고 있지만 맑은 공기와 연결되어 있는 관을 통하여 물 위의 공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이 세상 가운데 있어도 세상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성령을 호흡함으로 영원한 세상을 지금 살 수 있다.
198. 눈에 보이는 푸른 나무 잎들을 보라 이는 하나님의 계시의
책장들이다 강, 개울, 샘, 산과 들, 과일, 꽃 등은 완고한 마음도
녹이며 그들의 귀도 열리게 한다. 피조물 전체는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인 피조물도 웃음과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긴 혀가 주어진 인간은 묶긴 채로 침묵만 계속하고 있다.
이 존귀한 자연의 책이 그 저자를 그(선다싱)에게 소개한지 25년이 되지만 그동안 그는 언제나 자신의 구주는 이 책 속에 소개된 그분과 꼭 같다는 것을 누구에게 배우지는 않았으나 영적인 감각으로 알고 있었다. 자연은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말할 줄 모르고 표현하지도 못하지만 이로 인해 조금도 그 진리는 감추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을 주는데 영향을 방해받지 않았다. 그것은 이 자연의 영적 언어들이 주님의 말씀같이 영이요 생명인 까닭이다.
199.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려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독사가 가까이 와도 도망할 수 없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드디어 그것에 물려 죽었다. 그리스도인도 생명은 있으나 자신을 구원하는데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로부터 도망할 수
있도록 풍부한 생명을 주셨다. 이 생명의 공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200.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에 죽은 사람의 마음을 살린다. 이 세상에서 영원의 생명을 가지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소망은 없다. 주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천국의 영생과 같은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참신자의 마음을 낙원으로 만든다.
우리의 이런 마음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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