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었는데도 소식이 아득하여 바야흐로 그리운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방금 수서(手書)를 받고는 신원(新元)에 어버이를 모시는 체후(體候)가 고루 경사스럽고 학문하는 재미가 보통이 아님을 알았기에 지극히 위로되는 구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는 노모(老母)를 모시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만, 산골에서 새해를 맞고 보니, 노대(老大.노쇠)의 슬픔과 상로(霜露)의 감회에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군삭거(離群索居.친지나 벗들과 헤어져 혼자 외로이 사는 생활)하는 처지라서 경발(警發)할 곳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일용(日用)의 사이에 감히 혼자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끝내 재미없이 떫기만 해서 득력(得力)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양 지난날 함께 절차탁마(切磋琢磨)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어느 때이고 생각이 치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시경(詩經)》도 아직 공부를 시작하지 못했는데, 최근에 백춘(伯春.김원행)이 재차 편지를 보내 《중용(中庸)》의 의의(疑義)를 재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뜻을 집중하여 수정(修正)하면서 풍송(諷誦)하였고, 이와 함께 《통서(通書)》도 대략 읽어 넘기면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서명(西銘)〉의 예(例)처럼 하였는데, 감히 소득이 있었다고 스스로 말할 수는 없어도 의사(意思)는 자못 시원하게 터지는 것을 느낍니다. 다만 안질(眼疾) 때문에 뜻을 새겨서 공부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보내오신 글을 보건대, 도체(道體)에 대해 보이는 곳이 있으면서 뒤로 물러나는 뜻이 없게 되셨다고 하니, 너무나도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만약 이런 좋은 조짐을 계기로 해서 더욱 넓게 밀고 나가며 혹시라도 했다 안 했다 하는 일이 없게 된다면, 노형(老兄)의 영재(英才)로 볼 때에 백춘이 말한 대로 분명히 힘을 적게 들이고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석화(石火.부싯돌의 불빛)와 같은 한때의 소식은 믿기 어려운 반면에 옛날부터 물든 습관은 빠지기 쉬운 법인데, 이는 실로 내가 일찍이 실컷 겪어 보았던 일입니다. 깊이 바라건대,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다시 《맹자(孟子)》의 성선장(性善章)과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입지장(立志章)을 가져다가 반복해서 탐구하여, 성인(聖人)은 꼭 이루어야 하고 속태(俗態)는 정말 슬퍼해야 할 일임을 참으로 보아서, 범속함을 벗어나 첫째가는 인물이 되어야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날마다 문자의리(文字義理)를 가지고 물을 대 주며 북돋아 주어, 이 마음으로 하여금 항상 정대(正大)하고 광명(光明)한 영역에서 노닐게 하여 사욕(私欲)이 들어올 수 없게끔 하면, 안과 밖이 다 함께 밝아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며 우러르는 마음이 지극한 나머지 번다하게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주제넘은 경솔한 발언들을 용서해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1736년.
註: 양지(養之)는 홍자(洪梓 1707~1781)의 자(字)이다. 상로(霜露)는 서리와 이슬이라는 뜻으로, 돌아가신 어버이를 생각하는 효자의 마음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린 때에 군자가 이를 밟다 보면 처창한 마음이 들게 마련인데, 이는 날씨가 싸늘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라는 말이 나오는데, 한(漢)나라 정현(鄭玄)이 해설하기를 “추운 계절이 돌아오매 어버이 생각이 사무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작고한 부친에 대한 감회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