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생이
20여년 전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근무처 부근에 문상(問喪)할 곳이 있어 조문을 마치고 밤 9시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었다.
승용차의 차창을 모두 열어놓고 시원한 밤바람을 쐬면서 집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평소 자주 다니는 길이라 눈을 감고도 훤히 알 수 있는 길이어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추는 앞만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차를 천천히 몰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달려가고 있던 아스팔트길에서 무언가 기어가는 것이 눈에 띠었다. 나는 순간적을 차의 핸들을 돌려 피해서 지나갔지만 살아있는 무언가가 길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이상해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지나온 그 곳으로 달려갔다.
서쪽 하늘로 기우는 상현달의 희미한 달빛 아래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는 그 물체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남생이였다.
‘어떻게 할까? 그냥 갈까?’
망설임 끝에 가만히 집어 봤다. 새끼를 조금 벗어난 크기의 남생이는 내가 집어 들자 놀랐는지 목과 앞발 뒷발을 모두 몸통 속으로 집어넣고 잠시 가만히 있더니 조금 후에는 목을 있는 대로 쑥 빼고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놓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청거북을 기르는 사람도 보았고, 시장의 금붕어 집에서도 청거북을 파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길러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집에서 길러보기로 마음먹고 집으로 가져왔다.
백과사전을 통해 남생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남생이나 거북, 자라는 모두 거북목의 동물로 파충류에 속한다. 남생이는 민물에 살면서 잡식성으로 성질이 온순하여 애완용으로도 기른단다.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천연기념물 453호, 2005년 3월 17일 지정)
무릇 모든 짐승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특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짐승들도 있다. 남생이도 그런 류의 하나이다. 자신을 보호해야 할 특기가 하나도 없다. 토끼처럼 달리기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살쾡이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협적인 소리를 지를 줄도 모른다. 스컹크처럼 고약한 냄새를 풍길 수도 없고, 그런다고 두더지처럼 땅속에 숨는 장기도 없다. 다만 위험에서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 있다면 적을 만났을 때 쉽게 손상을 입을 수 있는 연한 부분인 목과 앞발 뒷발을 자신의 몸통 속에 집어넣고 죽은 시늉을 하는 정도이다.
독수리가 남생이를 사냥하여 식사를 하려고 하니 단단한 등껍질 때문에 먹을 수가 없다. 영리한 독수리는 남생이를 두 발로 꽉 붙잡고 하늘 높이 올라간다. 그리고 바위가 많은 곳에서 떨어뜨려 등껍질을 깨뜨리고 먹는다고 한다.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겠지만….
나한테 사로잡힌 남생이도 불쌍하지만 자기 방어 능력이 없어서였다. 차가 지나가는 순간에 재빨리 도망을 갔거나, 아니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면서 위협적인 소리를 질렀거나, 고약한 냄새를 풍겼더라면 아마 나는 질겁하고 그냥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 방어 능력도 없는 것이 무엇을 믿고 그 밤에 나들이를 나왔었느냐 말이다.
그날 밤 그 남생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를지언정 우리 집에 와서 살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아파트 생활에서 우리 가족 외에 살아있는 다른 생물이 있다는 것은 뜻밖의 관심거리가 된다. 하찮은 미물이지만 남생이가 우리 아파트의 베란다 한쪽에서 길러지게 되면서 우리 식구들은 자주 나가 살펴본다. 아이들은 서로 먹이를 주겠다면 들고 나간다.
우선 남생이가 살 집을 만들었다. 투명수조를 구하여 조그만 바위 돌을 두어 개 넣고 쉴 장소를 마련하고 물을 1/3 정도 부어 따뜻한 창가 가까이 놓아두었다. 처음에는 수조 밖으로 나오려고 수조를 빙빙 돌면서 서대더니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부터 적응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적응을 했다는 것은 나의 판단이고 자신의 고향을 찾아가려고 했던 마음을 포기했는지 모른다. 다만 먹이를 주면 표정도 없이 받아먹는 것으로만 보아서 삶을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 사는 파충류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남생이도 겨울철에는 활동을 중지하고 겨울잠을 자는 듯 보인다. 먹이를 주어도 먹지 않고 물 속에 엎드려 죽은 듯 움직이지도 않는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서 조금씩 활동하기 시작하고 먹이도 잘 먹는다. 먹이는 생고기를 조금씩 조각내어 주거나 빵조각 등 무엇이나 잘 먹어 치운다. 처음에는 사람이 직접 주는 고기는 그 자리에서 먹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지난 후에는 고기를 주면 직접 받아먹기도 한다. 긴 머리를 쑥 빼고 날름 먹이를 채가는 모습은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먹이를 주는 사람도 알아보는 것 같다. 내가 먹이를 가지고 가면 어서 달라는 듯 움직임 빨라지면서 반기는 듯하다.
거의 4년 정도를 길렀다. 크기도 처음보다 훨씬 더 자랐다. 다만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기분이 좋은 지, 나쁜 지, 슬픈 지 알 수가 없다. 가끔 밖으로 나오고 싶어서 서들면 수조 밖에 내놓는데 그러할 때면 목적지도 없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모습이 ‘토끼와 거북’에 나오는 경주하는 거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느린 거북이가 토끼와 당당히 겨누어 이기게 꾸며진 민화는 교훈적인 것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남생이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면 절대 토끼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하여 거북은 인내와 끈기로 성공하는 자를, 토끼는 자만심에 넘쳐 낭패하는 자를 대변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수조 속의 바위에 올라앉아 긴 목을 빼고 먼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을 본다. 「노천명」의 「사슴」에서처럼 향수에 젖어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그 때마다 남생이는 무엇을 생각할까? 잃어버린 고향을 생각할까? 지금도 자신이 잡혀온 그 순간을 생각하고 후회할까? 아니면 외로움이 사무쳐 짝을 찾을까?
그런 모습을 대할 때마다 하찮은 미물이지만 불쌍하게 생각되어 졌다. 사람도 짝이 없이 혼자일 때 외롭다는데…. 이산가족의 슬픔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키우는 것이 죄짓는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남생이를 잡아온 지 4년이 경과한 봄이었다. 음력 사월초파일에 불교신자들이 물고기며 거북 등을 방생하는 모습이 TV에 나왔다. 그 내용을 시청하는 순간 내가 기른 남생이가 순식간에 내 눈에 크게 다가왔다.
바로 그거다. 왜 그 생각을 진즉 못했을까?’
며칠 후 일요일, 나는 우리 아내와 함께 봄볕도 쬘 겸 봄나물도 뜯을 겸 나들이를 준비했다. 그리고 수조에 담긴 남생이를 깨끗이 씻기고 먹이도 다른 때보다 충분히 주었다. ‘자, 오늘은 네 고향으로 가는 날이다.’ 남생이는 자신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다른 때보다 더 서두는 듯 보였다. 만약 실향민처럼 고향을 그리워했다면 오늘은 얼마나 기쁜 날인가!
지금까지 상호 교감은 전혀 없었어도 조금은 정이 들었는데 다시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서운하여 활기차게 움직이는 남생이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는 남생이를 차에 싣고 4년 전에 잡아왔던 그 부근으로 갔다. 그리고 찻길 옆의 물웅덩이 옆에 살짝 놓아 주었다. 풀숲에 놓아주자 잠시 움직이지 않고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본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어서 가라. 가서 짝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라.’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돌아섰다. 몇 걸음 후에 뒤돌아보았을 때에는 풀숲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끝.
첫댓글 작년 6월 25일부터 간간히 올린 글들이 50회를 넘었는데
준비한 글들이 거의 바닥나서 이제부터는
내가 틈틈히 쓴 수필 형식의 글을 올릴까합니다.
졸작들이지만 몇 편 준비된 글들이 있기에 올려봅니다.
어쩜 ! 세상에 이런일이~~
6년전 어느날 우리 아들도 차를 타고
집에 오다가 도로에서 제법 큰 남생이를 주워와서 1년정도 기르다가
결국은 며느리와 내가 한강에 가서
놓아주었던 스토리가 친구가 겪은 과정과 매우 흡사해서 놀랍기 까지~
오랫만에 서댄다는 단어도 반갑고
참 재미있네. 여전히 고맙고 감사 ^♡^
남쟁이~
구구절절
어쩜 그렇게 상세히 기록을...
난 사다가 수족관에서는 길러 봤네만
다른 고기를 잡아먹어 미움을 사
옆집 아이들에게...
글을 읽는동안 과정 하나 하나가 연상되어졌어~
결국은 방생을 했다니 잘 했고
지금쯤은 많이 자라서
그때 자칫하면 다른차에 치여 죽을뻔한 상태에서
구해주고 길러준 친구에게 많은 감사를 하고 있겠지?
글
재미있게 잘~ 봤어
좋은 하루 되세요!!!
섬세한 남생이 이야기
제미있게 잘 읽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해주어
고맙고 내용 읽고있는 동안
점 점 커지면 어떡하지
조바심 가져거던
오늘도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