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를 초월한 본체‧마음자리가 드러난 거기가 공부의 시작 견성이다
여러분! 깨달음은요.
스님이 여러 번 이야기했을 거예요.
지금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대단한 것으로 알지요.
알지만 부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공부의 시작이어요.
깨달음은 공부의 시작이라고요.
승려가 되어서 구도하는 열정이 대단한 스님들이 있잖아요.
착한 스님이 있어요.
그래서 화두를 받아서 ‘이 화두를 깨치면 부처가 된다더라. 깨닫는 다더라.
견성한다더라.
견성하면 대~자유인이 된다더라. 영원히 대자유인이 된다더라.’
그런 믿음으로 공부해요.
또 그렇게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하거든요.
그런 믿음으로 죽기 살기로 공부한다고요.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정말로 용맹정진한 사람이 있다고요. 그래야 깨닫습니다.
그런데 깨달으면 그 사람은 돕니다.
‘탁!’ 깨닫고 보면 여러분도 없어져 버리고 여기도 없어져 버리고 나도 없고
저 산도 없고 바다도 없고 완~전히 허공같이 되어버려요.
허공같이 텅 비어버려요.
홀연히 갑작스럽게 텅 비어버려요. 그게 견성(見性)이어요.
마음자리가 드러나 버렸단 말이어요.
그게 마음자리가 드러난 거예요.
유무를 초월한 본체 ‧ 마음자리가 드러난 거예요.
그러므로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온 경계가 비어버린 거예요.
텅 비어버린 거예요.
텅 비어버렸는데 오직 빛만이 쏟아지고 있단 말이어요.
비친단 말이어요.
그게 자성광이어요. 이게 진짜 견성이거든요.
그래서 견성했다 생각하고 큰스님에게 가서 인가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큰스님) : 너! 어떻게 공부했나?
(스님) : 이렇게 해가지고 이러한 경계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선문답(禪問答)을 주고받아서 점검을 합니다.
그래서 인가해 주는 거예요.
허!~ 그거 대단하지요. 그게 견성이지요.
그런데 그 경계는 절대계의 세계이기 때문에
상대계에서 통하는 우리말과 어법이 다릅니다.
거기는 선문답이라고 해요. 법거량이라고 해요. 격외(格外)라고 그래요.
그래서 큰스님이 인가를 딱 해주면서
‘이제 너는 대장부‧부처가 되었노라.’ 그러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부처라고 법상에 올라서 진리 아닌, 진실 아닌 말을 한다고요.
그리고 지난 날 깨친 어른들을 조사(祖師)라고 해요.
그분들의 어록을 보고 소개도 합니다.
‘자, 여러분들이 이 게송의 도리를 알면
생사에 자재하고 길이 영원히 자유인이 되리라.
자유인일 것이니라. 자, 한번 깨친 사람 있으면 대답을 해봐라!’ 이런 말을 한다 그거예요.
그러니까 깨쳐버리면 다 된 줄 알아요.
그런데요 깨쳐놓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경계가 1분 10분이고 30분 이상 가지 않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와 버리면 그래요.
그대로 일상으로 돌아와 버리면 이제 보이는 것은 없고
또 사람이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 경계에서는 절대로 모릅니다.
경전을 보면 지옥이 있고 극락도 있는데 자기가 깨쳐 본 바로는 없으니까
법상에 올라서 지옥 극락을 부정해버린다고요. 잘못된 법문을 한다고요.
거기서 공부를 더 해야 되는데, 거기서 진짜 공부를 해야 되는데,
이제 진짜로 계율을 내 목숨같이 여기고 공부를 정정진해야 되는 거예요.
거기서부터는 진짜 공부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함부로 대망어를 해요.
어떤 크게 깨친 분들이 술을 먹어보니까 상관없어요.
그래서 말술을 먹고, 먹다가 보니까 중독이 되어서 앉아서
말술로만 먹는단 말이어요.
자기를 부처로 알고 따르는 젊은 신도들이 너무도 따르니까
어떻게 관계가 되어가지고 거기에 빠지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되면 이건 용서가 되지 않더라고요.
이건 극무간지옥에 가더라고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출처:2013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