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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과 거짓
잠 24:23-34
23 이것도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24 악인에게 네가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25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26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27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28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30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31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32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33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34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 24:23-34 / [경험 많은 어른이 또 이르신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도 경험 많으신 어른께서 이르시는 가르침이다. 재판을 할 때 재판관이 한쪽만 편들어 재판하는 것은 바른 재판이 아니다. 24) 분명히 잘못을 저질러 죄가 있는데도 죄가 없다고 무죄 판결을 내린다면 사람마다 저주를 퍼부을 것이요, 백성마다 그 재판관을 증오할 것이다. 25) 바른 재판, 공정한 재판을 하는 재판관은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뭇사람들의 칭송까지 받을 것이다. 26) 누가 어떤 말을 물었을 때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은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믿고 우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27) 바깥 일을 먼저 하여라. 밭일을 먼저 하여라. 그런 다음 혼인하여 네 가정을 이루도록 하여라. 28) 아무런 까닭도 없이 네 이웃을 쓰러뜨리려고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을 입에 담아 이웃을 해치려 해서는 정말 안 된다. 29) `나한테 그렇게 했지? 나라고 가만히 있을 성싶으냐? 내게 한 짓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말겠다.' 하는 생각은 아예하지도 말아라. 30) 한번은 내가 게으른 사람이 가꾸는 밭을 지나간 적이 있었지. 슬기롭지 못한 사람이 가꾸는 포도원을 지나간 적이 있었어. 31) 아, 그런데, 밭에는 온통 가시덤불만 우거져 있고 땅에는 잡초가 수북하게 자라고 있더구나. 쌓아 놓았던 돌담도 허물어져 있더구나. 32) 지나가다가 이런 꼴을 보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지. 정말 그런 꼴을 보고는 많은 것을 배웠지. 33) `조금만 더 자야지, 조금만 더 눈을 붙여야지, 이렇게 몸이 찌뿌드드하니 조금만 더 누워 있어야지' 하고 게으름만 피우고 있으니, 어찌 가난해지지 않겠느냐? 34) 어찌 쪽박을 차지 않을 수 있겠느냐?
재판은 잠언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공정한 재판’과 ‘재판정에서의 언어’, ‘노동에 대한 태도’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재판은 공정하게(23-25) 재판할 때에 사사로운 정이나 이해관계에 이끌려서 한쪽 편만 들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고합니다. 범죄자에게 부당하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판단을 내리는 자는 물론이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죄인을 죄인이라고 할 때 공의가 바로 세워져서 온 공동체가 기쁨과 아름다운 복을 누리게 됩니다.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서 돈과 정에 이끌려 잘못을 했는데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까? 또는 돈이나 권력에 의지하여 재판관의 판결을 흐리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각자 삶의 자리에서 공정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도록 용기를 구합시다.
증언은 정직하게(26-29) ‘적당한 말’은 바른말, 정직한 말을 의미합니다. 적당한 말로 대답해주는 것이 입맞춤과 같다고 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대답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무심코 내뱉은 거짓말로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합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의 분쟁에 끼어드는 것도 어리석은 행동입니다(잠 26:17). 근거도 없이 남을 해롭게 하는 증언을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 아니라 큰 죄인이 되어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노동은 성실하게(30-34) 지혜자는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관찰하고 그것에서 교훈을 얻습니다. 게으른 자에겐 아무리 좋은 밭을 주어도 가시덤불과 잡초만 나는 밭이 되게 하고, 좋은 집도 무너지게 합니다. 좀 더 자고, 졸고, 눕는 사이에 거대한 군대가 침입하듯이 가난이 일시에 덮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33절은 6장 10절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문제는 그의 잠에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졸음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묘사는 땀 흘려 일하기를 싫어하고 육신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게으른 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루를 성실하게 보내고 있는 사람입니까?
적용: 당신에게는 ‘좀 더 좀 더’ 하면서 미루는 게으름이 없습니까? 기도하는 것도 미룰 수 있고 묵상하는 것도 미룰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때는 미룰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주께 하듯 하고,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갑시다(롬 12:11).
어느 마을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지만 누구보다 청빈한 생활을 하던 한 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생선을 무척 좋아했는데 한 사람이 이를 알고는 아부를 떨며 대감에게 생선을 갖다 바쳤습니다. 그러나 대감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하인이 물었습니다. "생선을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이 왜 사양하십니까?" “내가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안 받는 것이다. 내가 뇌물을 받으면 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텐데 그러면 무슨 돈을 가지고 좋아하는 생선을 사 먹을 수 있겠나.”
< 설 교 >
주님이 나의 포도원을 살펴보시면
잠 24:30-34 / 박근호 목사
1년 중 가장 왕성한 성장이 이루어지는 때, 그래서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 이 7월에 세워진 우리 교회는 지난 22년 동안 하나님의 에벤에셀의 은총 속에서 오늘을 맞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분의 몸된 교회를 섬긴 여러 믿음의 일군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성령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일구어낸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세워가는 하늘나라 신앙공동체를 '포도원'에 비유하시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그렇지만 이사야 선지의 글에서도 당신의 부름받은 선민 신앙공동체를 '포도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요15장의 그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에서 하나님을 포도원 주인으로 소개하고 당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우리를 포도나무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는 5장에서 포도원에 대해 슬픈 만가를 부르는데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포도원을 위해 더할 것 없는 투자를 해놓으시고 좋은 포도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27:2절 이하에서는 그런 만가가 아니라 장차 당신께서 포도원지기가 되어 가꾸는 포도원의 희망찬 모습, 뿌리가 박히고 움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미래를 노래하기도 합니다.
교회 창립 22주년을 한 주 앞둔 오늘 우리는 '우리의 포도원', 그리고 '나의 포도원'을 한번 둘러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창립일이란 포도원의 주인되신 하나님 앞에서 포도원의 현 모습을 진단하고 점검하고 전망할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의 포도원'인 이 영락제단을 주님이 둘러보시곤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그리고 그 안에 내게 맡겨진 '나의 포도원'을 살펴 보시고 어떤 노래를 부르실까요?... 만가일까, 찬가일까?... 기뻐하실까, 슬퍼하실까?... 유쾌해 하실까, 불쾌해 하실까?... 이런 설레임을 갖는 것이 청지기의 합당한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 포도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혜자가 길을 오가며 눈이 자주 가는 한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눈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평범하지가 않다는 것인데 역시 그 밭은 평범하지 않은 밭이었습니다. 그 포도원이 저의 눈길을 끄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지혜자가 오가며 보게되는 그 밭의 상태를 31절은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가꾸지 않아 황폐화되어가고 있는 포도원입니다. 그 포도원을 보고 지혜자는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 교훈을 받습니다. 지혜자는 그 망가져가는 포도원의 원인을 그 밭을 경작하는 농부에게서 찾습니다. 한마디로 그 농부에게는 두 가지 결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게으름과 무지였습니다. 지혜도 없었는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황폐화된 포도밭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포도원'이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되십니까? 포도원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부름을 받은 사명자에게 주신 섬김의 장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움받은 자는 누구나 다 '자기의 포도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딤후 2장에서 그리스도인을 '군인과 운동선수와 농부'에 비유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저마다 그분 앞에 '포도원'을 분양받은 청지기들인 것입니다.
우리 오태동 교회 부지에 과수원이 있습니다. 올봄에 비전21위원회에서 배나무들을 희망하는 가정과 구역들에게 각각 몇 그루씩 분양을 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에 올랐더니 배가 제법 열었습니다. 그런데 밭들이 가지가지입니다. 정성껏 봉지를 씌워주고 주위의 풀을 솎아준 밭도 있는가 하면 거의 손이 안간 그런 밭도 있었습니다. 이제 한 두 달 후면 그 열매들이 주인의 정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태 과수원만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역자로, 당회원으로, 항존직으로, 집사로, 구역장으로, 부장으로, 회장으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선교회원으로 각기 그 맡겨놓으신 은사를 따라 포도원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제 한해의 절반을 살아온 지금 내 포도원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입니다. 뿌리를 잘 내려 움이 돋고 꽃이 피어 이제 알찬 열매를 예고하는 풍성한 포도원인지, 아니면 이 지혜자가 오고가며 보았던 그런 황폐한 포도원인지를 점검해 보아야할 때를 맞고 있는 겁니다.
지혜자가 본 이 포도원은 '가시덤불이 퍼졌고 잡초가 우거지고 돌담도 무너져버린 상태'였습니다. 지혜자는 그러한 포도원의 모습에서 농부의 게으름과 무지를 봅니다. 그 밭이 그렇게 된 것은 바로 농부의 게으름과 무지가 원인이라는 겁니다. 부지런하지 않았고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일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성실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그는 좋은 일군이 될 수 있었을텐데 그래서 참 기분좋은 포도원을 경작할 수 있었을텐데 이 두 가지가 없어 결국은 밭을 망치고 만 것입니다.
사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부지런함과 직결되는 일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안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부지런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만이 아니라 거기다 교회라는 또 하나의 삶의 자리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1/2은 더 부지런해야할 자입니다. 이른 새벽에 기도회에 나와 기도하고 늦은 밤 기도회에 참여하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없으면 제대로 신앙생활하기 어렵습니다. 예수, 아무나 믿는 게 아닙니다.
물론 비그리스도인들도 부지런합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부지런함의 동기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부지런함이란 즐거움과 관계가 있습니다. 즐거우면 부지런해지고 즐겁지 않으면 게을러지는 겁니다. 물론 건강한 부지런함은 아니지만 밤새도록 노름하는 사람들, 그게 즐거우니깐 하는 겁니다. 시도 때도 없이 자기 건강 잃어가는 것도 모르고 일하는 사람, 돈버는 재미로 하는 겁니다. 즐거움과 재미를 맛보지 않으면 결코 부지런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회 나오세요, 예배 참석하세요, 봉사하세요...' 그거 말로 해서 될 게 아닙니다. 기도의 즐거움을 아는 자는 나올 것이고 기도의 즐거움을 모르는 자는 안나올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맛을 아는 사람은 나올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안나올 겁니다. 봉사를 통해 그 땀흘림의 시원함과 보람을 아는 자는 봉사할 것이고 그 맛을 모르는 사람은 안할 겁니다.
코를 꿸 수도 없는 일이고 강제로 등떠밀 수도 없는 겁니다. 그 맛을 알면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안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경험해서 아시겠지만 이게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게 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기다림의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맛을 알면 새벽에도 나오는 거고 한밤중에도 나오는 겁니다. 말씀의 맛을 알면 주일 낮에도 오후에도,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그리고 새벽에도 나오는 겁니다. 사실 공적 모임만 참여하면 신앙생활 절로 됩니다. 그 말씀만으로 정말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런데 그걸 못합니다. 왜? 즐거움을 못느끼니깐, 재미를 못느끼니깐 우물이 있어도 떠먹지를 못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잠언서에 보면 똑같은 말씀이 두 군데 반복되고 있는데 잠19:24절과 잠26:15절입니다. 한번 찾아보십시오. 뭐라고 하는가...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
우리 교회 이름가운데 즐거울 '락(樂)'자가 들어있습니다. 원래 '영락(永樂)'이란 말은 서울 중구에 있는 동리 이름을 딴 것입니다. 서울 영락교회가 있는 자리가 옛날에 영락동이었습니다.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 동리가 '홍등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그 말은 본디 좋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영락교회가 들어서면서 동네가 바꿔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의미도 좋은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영락동이 쾌락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자리로 바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포도원 농사를 잘 지으려면 그 농삿일이 즐거워야 됩니다. 그런데 엉뚱한 것을 즐기고는 그 일에는 무심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포도원을 떠나는 사람이 없지않은 겁니다.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는 인생의 즐거움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인생에는 '유익한 즐거움'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즐거움'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가 무엇을 즐거워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은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익한 즐거움의 첫 번째로 '음악을 즐기는 것'을 듭니다. 공자 자신도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지는데 박자와 화음과 가락이 어우러져서 이루어내는 조화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익한 즐거움으로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말하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칭찬하는 즐거움입니다. 남의 장점을 보고 남의 장점을 얘기하면 그 일 자체가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면 남의 장점을 즐거워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적지 않습니다. 남의 장점을 말하는 것도 싫고 듣는 것도 싫어합니다. 대신 질투하고 왠지 부아가 치밀어서는 심통을 부리고 불평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어 그 친구와 함께 하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좋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라는 겁니다.
그러나 인생에 유익하지 못한 즐거움, 삶을 해롭게 하는 즐거움도 지적합니다. 그 첫째를 공자는 '제 멋대로 하는 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 될대로 되라, 자기 멋대로 사는 겁니다. 이건 결코 참된 즐거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순간적인 쾌감을 맛볼런지는 몰라도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해롭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게으름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결코 인생에 유익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자고 싶은대로 자고, 좀더 눕고 싶은 대로 누워 보십시오. 그 인생이 어떻게 되나... 결국은 후회스런 인생이 되고 마는 겁니다. 게으름은 몸에도 나쁘고, 정신에도 나쁘고, 정서에도 나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포도원 농부가 포도원을 망친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 게으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게으름이라는 것을 그 자체가 병이요 또 불신앙이라고 단언합니다.
이 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요즈음 베스트 셀러 가운데 피에르 쌍소와 버트란트 러쎌이 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이 있지 않느냐고... 혹자는 그 책 제목만 보고 '게으른 게 좋은거다'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는데 그 책 내용은 그런 게 아닙니다. 러셀은 '하루 24시간 중 8시간씩 일하지 말고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고 나머지 시간을 놀되 여흥이 아닌 고급문화를 즐기자'고 주장합니다. 일도 아닌 일들을 눈치나 보며 붙잡고 앉아 8시간 채우고 나머지 시간은 기다렸다는듯이 주색잡기에 빠져 살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해서 8시간에 할 일을 4시간에 끝내고 나머지 시간들은 예술을 즐기고 건전한 운동을 하는 등의 고급문화를 즐기자는 겁니다. 그게 그가 말하는 게으름입니다. 저는 이 러셀의 주장에 100% 동의합니다. 이게 바로 '주5일 근무제'의 정신입니다. 엿새 할 일을 닷새에 하니 더 부지런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농부의 게으름은 그런 게 아닙니다. 이 게으름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첫째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습니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말입니다. 이게 악한 겁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게으름은 바로 악함의 이웃사촌입니다. 함께 가는 겁니다. 악하기에 게을러지는 것이고 게으르기에 악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처음엔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이겠지만 나중에는 하려고 해도 못합니다. 안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봉사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앞장 서서 해야 합니다.
목회하면서 안타까운 것은 때때로 교우들이 봉사의 손길을 놓아버린다는 겁니다. 이거 참 안타깝습니다. 더 많은 일을 사모하는 게 더 많은 하나님의 은사를 얻는 지름길인데 오히려 자꾸 손을 놓습니다. 그리고는 그게 지혜로운 듯이 여기고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제 꾀에 넘어가는 겁니다. 일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게을러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알 수 있는 것을 배우지 않아서' 게을러집니다. 쉽게 말하면 '공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배우고자 하면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인데도 알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이 없었기에 결국 무지해지고 마지막에는 할 수 없는 무능자가 되고 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포도원 농부는 게을렀기에 무지해진 자였습니다. 영농기술을 배웠으면 그 포도원이 그렇게 황폐화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배우기를 멈췄습니다. 그래서 더 기름지고 풍성한 포도원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겁니다. 그래서 바보가 된 겁니다.
게으름에 대한 대가가 이렇습니다. 왜 젊었을 때 세월을 허송하지 말라는 겁니까? 게으름이 가져오는 결과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공부할 때 열심히 공부하고 배워야할 때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안그러면 후회막급한 내일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게으름이란 자꾸 지연시키는 겁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겁니다. 오늘 할 일을 오늘 끝내야 내일이 다시 기회로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할 일을 내내 붙들고 살면 내일에 올 기회는 잃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건 스스로 자기 생을 포기하는 것이니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얼른 할 일을 마치고 기다리면 새 일이 주어지지만 벌써 끝냈어야할 일을 게으름에 매듭짓짓 못하고 있다가는 다른 기회들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리고 게으름이란 '내가 해야 할 일 남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내가 할 일을 내가 하고 가능하면 남이 할 일까지도 내가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꾸 자기 할 일조차도 남에게 떠넘깁니다. 그리고 좋다고 웃고 신나합니다. 이건 아주 나쁜 병으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엔 아무 것도 못하는 멍청이 바보가 되고 맙니다. '젊었을 때 고생은 돈주고 사서라도 하라'는 어른들이 말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게을러지면 당연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구실 못하는 사림이 되고 맙니다. 인생이란 부단히 그 삶의 질을 높여가는 과정입니다. 부지런함이 생의 부가가치를 높입니다. 인생의 부가가치는 시간의 양이 아닌 시간의 질에 비례합니다. 18시간씩 일하는 사람과 5시간 일하는 사람의 생이 같을 수 없지만 양보다 질이 중요합니다. 5시간 자는 사람과 10시간 자는 사람의 생이 동일할 수 없지만 양보다 질이 중요합니다. 몇 년을 살았느냐 보다 얼마나 깨어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대학원을 2년만에 마치는 사람도 있지만 논문이 안되어서 4년 5년 다니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게으름이란 상승작용을 갖는다는 겁니다. 백화점에 가면 에스컬레이터가 있습니다. 게으름은 에스컬레이터를 탑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상승 작용이 일어나 점점 더 게을러진다는 겁니다. 한번 잠을 마음껏 자 보십시오. 24시간을 자도 모자릅니다.
오늘 이 잠언을 쓴 지혜자는 곳곳에서 이 게으름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게으름이야말로 성공적 인생을 사는데 가장 심각한 장애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장애보다 이 게으름이라는 정신적 장애가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잠언을 통해 게으름을 몇 가지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첫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 두 번째, '잠을 많이 잔다...' 오늘 본문에 보니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한다고 했습니다. 계속 자는 겁니다. 그래서 가사상태에 빠져있는 겁니다.
또 22:13절에 보면 '밖에 사자가 있어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건 겁이 많은 겁니다. 용기가 없는 겁니다. 게으른 자의 특징은 소심하여 자꾸 움추려든다는 겁니다. 게으른 자는 이렇게 변명이 많습니다. 자기 변명이 강합니다. '밖에는 사자가 있다. 그러니 나가면 찢길 것이다. 위험하다. 그런고로 나는 집안에 있을 것이고 집에 있는 김에 잠이나 잘 것이다...'
세상에 모험 아닌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삶 그 자체가 모험입니다. 그런데 '밖에 나가면 사자가 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못하는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만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으른 사람들이 환경탓을 하는 겁니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어렵고...
자전거 배울 때 무릎 안 깨지고 배우는 사람 있습니까?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 배운 사람 있습니까? 넘어집니다. 무릎이 까집니다. 그깟 자전거 하나 배우는데도 상처가 나고 넘어지는데 위험 하나 없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소극성과 부정성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아까 본 말씀처럼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옮기기를 괴로워한다'고 합니다. 음식그릇에 손을 넣고서도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것조차도 힘들어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게으르다보면 이 모양이 되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26:16절에 보면 '게으른 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문제입니다. 스스로 병자인 줄 알아야 하는데 스스로 건강한 자인줄 압니다. 문제가 심각한 상태인데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자기진단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지혜자의 이 게으름에 대한 진단이 나의 삶에 대한 진단은 아닙니까?... 게으름이 악이요 죄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게으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고 내게 은사를 내려주신 하나님께서 죄를 짓는 겁니다. 그래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들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지난 반년 동안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포도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내게 맡겨진 것에 대해 부지런하였고 지혜로웠습니까?... 사도 바울은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게으름은 원수입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열심히 식어질 때 오는 현상입니다. 열심이란 마음이 뜨거운 겁니다. 그건 곧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그리고 그분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이 잦아듭니다. 그리고 게을러지기 시작하는 것이고 결국엔 포도원을 폐허가 되도록 방치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은 부지런할 때 잡념이 없어집니다. 부지런한 인생은 후회가 없습니다. 부지런함으로 마음을 지킬 수 있고, 건강도 지킬 수 있고, 행복도 지킬 수 있고, 보람도 지킬 수 있습니다. 의사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의 75%는 게을러서 생긴 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템플대학의 러셀 콘웰 박사가 4,000명의 백만장자를 면밀하게 분석 연구해 보았더니 저들에게서 이런 세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더랍니다. 하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았다. 둘째는 매사에 부지런함과 열심으로 살았다. 그런가 하면 또 한가지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여러분도 인생을 성공하고 싶으십니까? 게으름을 떨치고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지혜를 쫓지말고 기도함으로 하늘의 지혜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진정한 성공이 있는 겁니다.
근면하기로 소문난 명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루를 연습하지 아니하면 나 자신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아니하면 평론가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아니하면 벌써 청중이 안다...' 그래서 그 대가도 음악회가 있던 없던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시간씩을 연습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의 음악 세계를 지켜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올 하반기에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십시다. 기도함으로 지혜로 충만하십시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으십시다. 우리의 열심히 기름지고 풍성한 포도원을 일구어서 이 구미영락교회라는 당신의 포도원으로 인해 주님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그런 내일을 이루어가십시다. '그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찌어다....‘
재판할 때에
잠언 24:23~34 / 이장우 목사
본문 30~34절을 먼저 봅니다. “30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31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32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33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34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困乏)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오늘 본문은 재판에 대한 말씀이 많아서 이 본문을 먼저 봅니다. 게으름에 대하여는 앞에서도 많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청소년 때에 주경야독을 할 때가 생각이 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공부하려고 하면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그래서 늘 공부하는 책상이나 공책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손을 모으고 누워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괴로움과 가난함이 군사 같이 이를 것이라는 말씀을 기록하여 자신을 채근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은 공부만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게으르고 지혜가 없이 사는 자의 밭 모양이 어떤지를 보면서 생각이 깊어졌고 훈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들로부터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27절을 봅니다.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우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말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습니다.그런데 오늘 본문은 반대로 보이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자립할 외적 능력이 있어야 자기 가정을 세운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이스라엘은 신앙공동체이기에 일의 우선순위는 밖의 일이 먼저임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요단강 건너기 전의 땅이 좋아 보이니 두 지파 반이 먼저 그 곳에서 살려고 모세에게 요청을 하였습니다. 모세가 왜 분열하려느냐고 책망을 하자 그때에 요단강을 건너가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싸워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하자 허락 하였습니다. 전체의 일이 우선임을 보여줍니다(민32장,수1장).
본문 23~26, 28절입니다. 이것도 지혜로운 들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재판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재판 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합니다. 재판장이 악인을 옳다고 한다면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국민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을 바르게 견책하는 자가 기쁨을 얻을 것이며 좋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다고 하는 것은 입맞춤이란 신의의 인사입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말로 대답한다는 것은 28절과 연결하면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을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무고하지 말고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다 재판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재판관은 누가 재판관이 됩니까? 최초의 재판은 모세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법은 곧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도 율법의 규정대로 재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출애굽 이후에 모세 혼자 재판을 하는 것을 보고 장인인 이드로가 제안합니다. 그 많은 재판을 혼자하지 말고 백성의 지도자를 뽑아서 재판하고 어려운 것만 모세가 재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과 같은 지도자를 뽑아서 재판하게 한 것입니다. 모세 사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으면서 후계자를 세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왔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왕으로 그들을 다스리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입니다. 눈에 보이는 왕이 없어도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재판을 누가 하면 됩니까? 율법을 아는 제사장이 하면 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없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 없음이 드러납니다. 제사장들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다가 적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럴 때에 세워지는 자가 사사입니다. 사사는 재판관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판관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시대에 왕을 달라고 요구하여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왕은 자기 마음대로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율법대로 재판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잠언이 솔로몬의 잠언입니다. 물론 솔로몬의 잠언만이 아니라 다른 지혜 자들의 잠언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에 일천 마리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까 하셨을 때에 솔로몬은 자신은 어린 아이와 같다고 하면서 이 많은 백성들을 재판할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서 솔로몬에 지혜를 주시면서 다른 것도 함께 주십니다. 그 지혜로 재판한 내용이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그 지혜로운 재판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솔로몬을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행한 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제대로 재판을 하지 못합니다. 이미 율법에서 말씀하고 있지만 그들이 제대로 재판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내용을 몇 구절만 살펴봅니다.
레위기 19:15절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레위기 19:35~36절입니다. “35 너희는 재판할 때나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36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공평한 재판만이 아니라 일상의 상거래에서도 공평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명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16~19절입니다. “내가 그 때에 너희의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의 형제 중에서 송사를 들을 때에 쌍방 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에 있는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재판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재판을 공의롭게 하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성경전체에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재판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공의로 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즉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온갖 불의를 행한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런 나라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매일 분노하십니다.
시편 7:8~12절입니다. “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원수들에게 고난을 당함으로 하나님께 재판하여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재판장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안에 이런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왕들과 지도자들이 재판을 어떻게 하는지 선지자들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뇌물을 받고 재판을 엉터리로 하는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재판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 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십니다(시68:5). 그런데 권력을 가졌다고 약한 자를 약탈하는 재판을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미가 3:11절입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절부터 보면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뜯어먹고 뼈까지 고아 먹는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한 마디로 재판하는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지한다고 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중에 계시니 재앙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 땅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이사야 33:22절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이사야서와 미가야만 보아도 이스라엘이 어떻게 재판하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우리 재판상이시며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셨고 우리의 왕이시기에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인지 신약까지 연결하여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재판을 잘 못한 것은 수도 없이 많이 고발을 받습니다. 그러나 재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시기에 이들을 심판하심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그 언약으로 인하여 다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바벨론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에 재건되고 성벽이 재건되어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었지만 너무나 미약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더욱 메시아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배척합니다.
요한복음 19:4~6절입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의한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재판관이 죄가 없는 분을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채찍질 하고서 보내려고 합니다. 재판관이 아무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하니 너희가 친히 데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교활하게 자기들의 법으로 하면 자기들이 바로 죽일 수 있는데도 빌라도의 선언을 요구함으로 직접 피를 흘리지 않았다고 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습니다. 법을 다루는 자들이 얼마나 법을 악용하는지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8~16절입니다. “봉독”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결국 그 소리가 빌라도를 이깁니다. 빌라도도 자기의 총독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줍니다. 유대 민중들이 빌라도에게 자기를 임금이라고 하는 예수를 처형하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압박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국의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이 가이사 외에는 자기들에게 왕이 없다고 넘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불의한 재판입니다. 이러한 재판은 구약의 참된 선지자를 핍박한 모든 악한 재판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약의 재판들과 예수님의 재판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는 저렇게 악한 재판을 하지 않았다고 하실 겁니다. 나는 재판관이 되어본 적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재판이나 성경에서 나오는 재판이나 온갖 재판들을 보면서 다시 재판을 합니다. 법적인 권위는 없지만 다들 자기 나름대로 재판의 결과를 다시 재판합니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십자가 현장으로 가면 우리는 어느 무리에 서 있었겠습니까? 군중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을 보면 늘 최고의 재판관으로 살아갑니다.
로마서 2:1~5절입니다.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우리가 얼마나 매사를 판단하면서 살아갑니까? 뉴스를 보면서 저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마음의 생각만으로도 예수님은 행위로 간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하는 그 판단이 나를 정죄하고 나를 판단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인데 아직 심판을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악한 일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옳다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진노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이 오직 주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바울이 전한 복음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최종 심판의 기준은 복음입니다.
본문 29절을 봅니다.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율법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악함으로 과도한 복수를 막기 위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에게 행하여 갚겠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율법을 넘어서 재판을 주님께 맡깁니다.
야고보서 4:11~12절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법자가 되시고 재판관이 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비방과 판단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재판 자가 되어 진짜 재판관을 죽였다는 사실을 말씀과 성령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면 모든 일상에서 내가 재판관이 되어 있음이 죄인 줄 알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 다시 오심을 사모하면서 기다립니다.
디모데후서 4:8절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자신의 판단과 재판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살해한 자로 인정이 되는 자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들은 의로우신 재판장이 나타나실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즉 의롭다 함을 받는 최종 완성이 주어집니다. 이곳이 완전한 천국입니다. 이들에게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립니다(벧후 3:13). 성도는 그 날을 사모하면서 살아갑니다.
잠언 24:23-26
오늘도 귀한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잠언 24장 23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23절은 이것들도 지혜로운 자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이 다음에 이어지고 있는 내용들 또한 지혜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하고 있는 말씀은, 재판할 때에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왕이나, 판사나, 재판관으로서 누군가를 재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판하고 판단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할 때, 외모를 중시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모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높고 낮은 지위, 경제적인 수준 등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잠시 야고보서 2장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면 죄를 범하고 율법에 의해 범법자로 확정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중시하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외모나, 그의 재산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오직 믿음으로 판단할 수 있고, 성품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사람의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 다시 잠언 말씀으로 돌아와서 잠언 24장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외모 때문에 바르게 재판을 하지 않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재판관이 사악한 자를 향해서 너는 의로운 자라고 말한다면, 백성들이 저주하며 민족들이 몹시 싫어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용감하고 담대하게, 의로운 자를 의롭다 말하고, 사악한 자를 사악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잘생겼어도,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아무리 나와 친해도, 죄는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못생겼어도,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볼품없어도, 우리는 훌륭한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정직함과 용기를 주시기 원합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만약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비겁한 사람을 꾸짖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것이며, 또한 좋은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누군가를 꾸짖어야 한다면,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를 꾸짖어야 할까요? 바로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하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 자신을 꾸짖고 책망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바른 길로 걷게 된다면, 그 누구에게보다 우리 자신에게 기쁨이 있을 것이고, 우리에게 좋은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2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른 대답을 내는 자의 입술에 입을 맞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진리 그대로 판결하고 바른 대답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는 피곤하고 힘든 삶을 멈추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면, 그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바른 말을 해야 하는 때가 온다면, 주님을 의지해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먼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바른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바른 말을 용감하게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틀렸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실수했다, 내가 부족했다, 내가 어리석었다, 라고 먼저 나 자신에 대해서 바르게 대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먼저 우리에게 기쁨이 있을 것이고, 또한 우리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눈을 고쳐주셔서, 우리가 사람들의 외모를 살피는 사람이 아니라, 속마음을 중시하는 눈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잠언 24:23-34
23-34절, 공정한 재판, 집 세움, 거짓 증인, 게으름
[23-26절]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지혜로운 자들에게 속하는 것들] (KJV)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좋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모든 사람은 바른 말로 대답하는 자의 입술에 입맞추리라](KJV).
판사가 재판할 때 피고의 낯을 보아 바르지 않은 판결을 내리는 것은 좋지 않다. 잠언 18:5는,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출애굽기 23:2-3도,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재판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아는 사이니까, 고향 사람이니까, 학교 동문이니까 배려하여 재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을 미워하신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사람들도 불의한 재판을 미워한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이 있기 때문에 사물의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 분별하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악인을 옳다고 하면 사람들의 저주와 미움을 받을 것이며, 악인을 책망하면 기쁨과 복을 얻을 것이다.
26절은 앞의 구절에 연결되고 ‘입술’은 바른 말로 대답하며 악인을 견책하는 자의 입술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본문은 바른 말로 대답하는 자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27절]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요즘에는 가정에서 집안의 일과 집밖의 일의 구분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남자는 집밖의 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의 일을 하는 것이다. 잠언 31:23, “그 남편은 그 땅의 장로로 더불어 성문에 앉으며.” 잠언 31:27, “[현숙한 아내는]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디도서 2:5, [젊은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하며.” 남편은 ‘바깥양반’이고, 아내는 ‘집사람’이다.
본문은 밖에서 다스리고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집을 세우라고 말한다.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구상과 설계를 하고 거기에 드는 비용을 준비하고 또 그것을 위해 필요한 자재들과 건축기술자들과 일꾼들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집을 세우는 것은 가정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사람이 결혼하여 가정을 세우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은 결혼을 위해 기본적으로 성숙한 마음과 진실한 사랑과 건강한 몸을 준비해야 하고, 또 어느 정도 물질적 안정과 여유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집을 세우려면, 먼저 안정적 직장을 가져야 하고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어느 정도 저축한 후에 해야 한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준비와 순서가 없이 즉흥적으로나 막연한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집을 고칠 때, 먼저 새 장판부터 바꾸고, 그 다음에 벽지를 뜯고 새것으로 바르고, 그 다음에 문과 문틀에 페인트칠을 한다면, 그는 일을 거꾸로 하는 자일 것이다. 그는 먼저 낡은 장판과 벽지를 뜯어내고, 그 다음 문과 문틀에 페인트칠을 하고, 그 다음 새 벽지를 바르고, 끝으로, 새 장판을 깔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가정을 세우는 결혼도 준비와 순서가 필요하다.
[28-29절]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증인은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진실한 증거를 해야 한다. 까닭 없이, 즉 정당한 이유 없이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 증거를 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9계명을 어기는 매우 큰 악이다. 그것은 남의 인격을 모독하고 그의 신임성을 손상시키고 그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의 하는 일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교만과 욕심과 미움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성도들은 서로 지체가 되므로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말해야 하며(엡 4:25), 항상 선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남이 우리에게 행한 악에 대해 보복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질서와 안녕을 위한 공적 형벌은 필요하지만, 사사로운 보복은 하나님께서 금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선을 베푸는 것이며 심지어 우리에게 해를 끼쳤거나 해를 끼치려 하는 원수에게까지도 사랑과 선을 베푸는 것이다.
마태복음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전통본문)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로마서 12:17, 20,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30-34절] 내가 증왕(曾往)에[이전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본문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같은 부류에 둔다. 게으름은 곧 미련함이요, 부지런함은 곧 지혜이다.
게으름의 표시는 삶과 일터의 현장에서 나타난다. 게으른 농사꾼의 밭과 포도원은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이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다고 표현된다. 이와 같이, 게으른 학생, 게으른 주부, 게으른 직원, 게으른 성도, 게으른 직분자도 비슷할 것이다. 그의 삶과 사역의 현장에 그의 게으름의 흔적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게으름의 한 표는 잠을 많이 자는 것이며, 그 결과는 물질적 궁핍이다.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잠언 31장에 보면, 현숙한 여인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들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또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한다고 묘사되었다(잠 31:13, 15, 27).
세상일도,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디모데전서 4:15, “이 모든 일[경건 훈련]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재판관은 재판할 때 사람의 낯을 보지 말고 공평하게 해야 하며, 선과 악을 공의로 판단하고 선을 칭찬하고 악을 책망해야 하고, 악을 행한 자에게 바른 말로 책망하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입을 것이다.
둘째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계획을 세우고 잘 준비한 후에 해야 한다. 집을 짓는 일도, 사업을 하는 일도 그러하다. 자세한 계획과 준비 없이 일을 시작하면 실패할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은 가정을 세우려 할 때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준비를 어느 정도 한 후 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까닭 없이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지 말고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개인적 보복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하게 하고 진실하게 하며 원수들에게도 끝까지 선을 행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자기의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게으른 자는 지혜 없는 자이며 사람이 게으르면 가난하게 된다. 우리는 가정 일이나 학교 공부나 직장 일이나, 또 믿는 일, 즉 규칙적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일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해야 한다.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24:23-34 / 하정환 목사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너는 까닭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24:23-34)
최근에 나는 위암판정을 받고 위 절제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런 불의의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와서 저를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목사님이 너무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이 쉬라고 하시나 봅니다."라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원망하는 조로 "어떻게 주만 위해 일하신 목사님에게 그런 몹쓸 병을 주셨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 사람들의 말이 옳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혜자가 어느날(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없이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사람의 포도원을 지나는데 가시덤불이 덮히고 거친 풀이 땅을 덮고 돌담이 무너져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훈계를 얻었다고 회상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정리하기를 게으름이 계속되면 빈궁이 강도같이 오고 곤핍이 군사같이 이른다는 말로 마무리합니다(잠24:30-34).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의 병과 연관시켜보았습니다. 사실 제가 위암에 걸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많은 욕심으로 추진하던 일, 과식과 폭식 절제하지 못하는 음식습관, 몸을 돌보지 않는 과로와 많은 일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면 나의 욕심과 무절제함이 나를 병속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말하는 게으름이란 규모있는 삶을 살지 않고 영적으로 나를 방임하는 삶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절제한 삶이 나를 병으로 몰아넣은 것처럼 영적인 방임이 가시덤불과 거친 풀이 무성한 영적 황무지로 우리를 몰아넣는 것입니다. 마치 나의 무절제함과 나의 몸을 아무렇게 내버려둔 방임이 내 속에 있던 추한 암이라는 질병이 머리를 들고 나오게 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 방임은 우리를 곧 영적 암에 감염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그 게으른 자의 말처럼 자신을 위하여 늘 이렇게 말합니다.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잠24:33).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신에 의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지금의 내가 빈궁함에 이르고 있고, 곤핍함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영적방임과 게으름의 결과임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그런 빈궁함의 상황이 아닐지라도 영적방임과 게으름을 지속한다면 시간이 문제일뿐 곧 빈궁함과 곤핍함의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내 안에 가시덤불과 거친 풀이 무성하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나의 성은 무너져 무절제함과 게으름 그리고 영적 방임에 노출되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