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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에스파냐와 2등 국가 잉글랜드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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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서양사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후 약 100여년, 현재 서반구의 바다는 에스파냐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521년에 콘키스타도르(정복자) 코르테스가 아즈텍을 멸망시킨 후 에스파냐는 멕시코에서 파나마에 이르는 현재의 중앙아메리카 전체를 차지한다. 1532~3년에는 역시 콘키스타도르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카하마르카에서 사로잡아 죽인후 잉카제국의 잔존정권은 안데스 고원으로 쫓겨 들어갔고 이후 이 지역에 에스파냐의 총독부가 세워지면서 잉카제국은 멸망한다. 이때 에스파냐의 영토는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와 쿠바, 멕시코에서 파나마까지의 중앙아메리카 전역, 그리고 현재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그리고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일부였다. 아울러 1578년에 포르투갈의 국왕 세바스티앙이 모로코의 알카자르에서 패해 죽으면서 그의 숙부인 엔리코 추기경이 왕위를 이었는데 엔리코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1521년에 죽은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의 손자녀들 넷이 계승권을 주장하였다. 에스파냐왕 펠리페 2세(Felipe II, 1527~1598)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많은 수의 백성들과 도시민들은 크라토의 영주 안토니오를 지지하였지만 포르투갈의 도백회의는 펠리페 2세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결정하였다. 펠리페 2세는 군사를 이끌고 포르투갈로 진격하였고 안토니오의 군을 알칸타라에서 무찌른 다음 포르투갈의 왕이 된다. 아울러 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독자로서 네덜란드, 프랑쉬-꽁트, 롬바르디아, 시칠리아와 사르디니아, 이탈리아 남부등 오스트리아와 동유럽을 제외한 모든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를 보유하였다.
1580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이 될 무렵 에스파냐(빨간색)와 포르투갈(파란색)의 지배 영토.
18~19세기에 이룩한 대영제국의 위명 때문에 가려지고 있지만 이 당시(16세기말) 잉글랜드의 위상은 보잘 것 없었다. 약소국은 아니더라도 당시의 강국이던 에스파냐나 오스만 제국에 비할 수도 없는 2등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에스파냐나 튀르크 제국은 차지하고라도 백년전쟁에서 싸웠던 라이벌인 프랑스와 비교해도 잉글랜드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당시 잉글랜드의 인구는 약 300만 내외였으나 프랑스의 인구는 1500만에 달하였다. 한때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초기에 기세를 올리면서 프랑스의 절반을 석권하였으나 16세기 후반에는 네덜란드 해안의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해외영토가 없었다. 아울러 영토도 현재의 브리튼 섬 전체가 아니라 잉글랜드와 웨일스만 보유하고 있었으며 스코틀랜드는 아직 독립왕국이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 1590년대 네덜란드 형세도. 녹색이 에스파냐 재점령지역 |
에스파냐와 잉글랜드의 국력차이는 양국의 당시 정부예산만 비교해보아도 쉽게 드러난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여왕 재위 말 잉글랜드 왕실의 연 수입은 약 88700 파운드, 의회의 평균 연 수입은 64500파운드로 이를 합치면 15만 3200파운드이다. 이에 비해 에스파냐 정부의 연 수입은 1598년에 약 1290만 듀카트에 달하였다. 환산방법에 따른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에스파냐의 정부수입이 평균적으로 잉글랜드의 약 6배에서 8배에 달한다고 하고 있다. 이 6배와 8배의 차이라는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수입만을 보았을 경우이며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황금을 더한다면 잉글랜드와 에스파냐간의 경제적 격차는한마디로 ‘상대가 안 되는’ 정도였다. 만약 잉글랜드와 에스파냐간 전쟁이 벌어질 경우 불리한 것은 잉글랜드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하였다.
물론 에스파냐와 잉글랜드의 관계가 언제나 나빴던 것은 아니다. 에스파냐와 잉글랜드의 관계가 이렇게 틀어지게 된 원인은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시 원양항로가 발견되면서 크게 증가하기 시작한 해상무역을 둘러 싼 갈등이다. 에스파냐는 무역을 독점하는 동시에 무역을 지렛대로 사용해 다른 나라들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두 번째는 얀 후스, 마르틴 루터, 그리고 장 칼뱅으로부터 비롯된 종교개혁운동과 이로 인한 구교(가톨릭)-신교(프로테스탄트)간의 종교적 갈등이었다. 세 번째는 에스파냐가 사활을 걸고 진압하려 했던 네덜란드인들의 반란을 잉글랜드가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하에서 성공회 노선을 확실히 한 잉글랜드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인 펠리페 2세의 ‘종교적 제국주의’가 기본적인 방향이 된 에스파냐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공식문서에 남겨진 기록과 역사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에스파냐 왕이었던 펠리페 2세의 공식적인 대외정책은 ‘방어’였다. 스스로 많은 땅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은 더 이상의 땅이 필요치 않다는 말을 자주하고는 하였다.
“나는 더 많은 땅과 나라들을 얻고 이름을 더욱 높이려는 야망을 쫓을 필요가 없다. 인자하신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이미 많은 것을 주셨기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
엘리자베스 1세는 세계무대에 발을 들여놓은 잉글랜드를 강력한 해상 무역국가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많은 땅을 가진 펠리페는 당연히 지킬 곳도 많았다. 그는 전쟁을 할 때마다 자신이 먼저 침범을 당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카를 5세의 아들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으로서 유럽전역에 걸쳐 많은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적들도 많아 그의 영역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위협을 받게 마련이었다. 펠리페와 에스파냐의 대신들은 에스파냐 제국의 어떠한 부분이라도 무너지게 되면 제국의 취약함을 노출시킴은 물론 제국 전체의 안위가 흔들리게 된다는 ‘도미노’식 전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펠리페 2세는 그의 제국에 가해지는 모든 위협을 제거하려 들었는데 펠리페의 관점에서는 ‘방어’이지만 이러한 에스파냐의 책동은 다른 나라에게는 중대한 위협이 되게 마련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를 당시 그녀의 공식적인 대외정책 역시 ‘수비’였다. 이 당시 잉글랜드는 세계무대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신흥국이었다. 섬이라는 지리적인 위치에 힘입어 원양항해를 통한 무역이 늘고 있었으며 잉글랜드 왕실은 15세기 말에 지오반니 카보토 등을 고용해 아메리카를 탐험하는 등 대외식민지 건설을 위한 첫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잉글랜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15세기의 저서인 [잉글랜드의 정책을 위한 소책자(Libelle of Englyshe Polycye)]나 리처드 하크루이트의 저서에서 보이듯이 해상전력 위주의 방어전략을 주문하고 있었다. 해상무역은 장려하되 육군은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하는 소요를 막기 위한 정도면 충분하며 유럽대륙의 분쟁에는 가급적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중상주의+군사적 고립주의였다.
이제 막 바다에 눈을 뜨고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자 했던 잉글랜드 정부에서 있어서 새로이 발견된 아메리카와 함께 포르투갈의 교역망까지 장악한 에스파냐의 독점은 단순한 걸림돌 정도가 아니었다. 경우에서 따라서 국가경제를 옥죌 수 있는 위험요인이었다. 아울러 당시 잉글랜드가 해외무역에 매달린 이유는 인구와 토지가 적어 농업생산력 자체가 높지 않은 까닭도 있었지만, 잉글랜드의 조세체계가 상대적으로덜 발달해세금과 국가예산 확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프랑스나 에스파냐와 같이 정기(定期) 조세제도가 확립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국가의 무력을 유지하는데 대한 애로가 컸다. 잉글랜드가 성공회로 전환되면서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빼앗아 확보한 왕실의 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잉글랜드의 해상력을 유지하는데 태부족이었고 항만을 통한 관세 등의 수입이 예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잉글랜드의 사략함대(私掠艦隊, Privateer fleets)였다. 이후 세계에 그 위명을 드높이게 되는 영국 해군(Royal Navy)는아직까지 존재가 미미했다. 세입이 확실치 않은 잉글랜드 왕실이 정부예산으로 거대한 해군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 초기에 무장함선을 소유한 자들에게 나포면허장을 내주어 외국함선을 공격해 물품을 나누어 가지게 한 것은 어떤 거대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입이 빈곤한 국가가 나름대로 해상전력을 유지하려는 방책이었을 뿐이다. 아울러 유럽 전역에 영역을 가지고 있는 에스파냐가 대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전 대륙을 가톨릭화 시킨다면 신교를 표방하고 있는 잉글랜드에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톨릭과 신교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는 프랑스에 우호적인 세력을 확보해야 하였다. 이는 1558년에 잉글랜드의 교두보라고 할 수 있는 칼레(Calais)가 프랑스의 손에 떨어지면서 더욱 다급한 문제가 되었다. 이에 잉글랜드는 다른 교두보를 확보하고 대륙의 신교세력을 지원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562년에 노르망디 지방의 르아브르(Le Havre)에 상륙하여 점령하였으나 1563년에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던 프랑스의 신교세력인 위그노(Huguenot)들이 오히려 가톨릭 세력과 손을 잡고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면서 힘들게 얻은 교두보는 상실되었다.
잉글랜드의 뎃퍼드에서 수리되고 있는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사략선, 골든 하인드.
종교도 종교이지만 사실 잉글랜드가 나포면허장을 발부하면서 사략선주들을 고용한 이유는 바로 에스파냐에 의한 대양무역의 독점을 막고 잉글랜드 무역선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사략선의 성격 자체가 개인투자가들이 배와 선원들을 사서 바다로 내보낸 후나포한 함선과 그 내용물에서 이익을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정부에 직접적인 재정적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잉글랜드 정부 차원에서 사략행위를 허가해준주된 이유는 해상무역의 위험요인을 높여 경쟁국들의 무역비용을 높이고 이들을 바다에서 몰아낸 다음 그 자리를 잉글랜드가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잉글랜드 사략선들의 주요 목표는 이베리아 반도와 아메리카를 오가며 장사하는 에스파냐의 무역선, 그리고 아메리카의 보물들을 에스파냐 본국으로 실어 나르던 보물수송선단(Treasure fleets)였다.
세비야 항구에 정박한 16세기 에스파냐의 보물수송선단.
식민지 초기에 막대한 양의 황금과 보물이 에스파냐로 옮겨지면서 에스파냐는 경제군사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지만 그 운반작업이 체계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황금과 보물을 실은 배들은 카리브해를 횡행하던 해적들의 주요 타깃이 되었고 경우에 따라 에스파냐의 경쟁국이 카리브해와 신대륙 해안의 에스파냐 식민도시들을 습격해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특히 1555년에 프랑스 정부의 사주를 받은 프랑스 사략선단이 에스파냐 카리브해 식민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쿠바의 아바나를 습격해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 해결책에 고심하던 에스파냐 정부는 1566년에 모든 보물수송을 군선이 호위하게 하는 호송체계를 발족시킨다. 에스파냐의 세비야에서 출항한 군선들이 쿠바의 아바나에 모인 수송선들을 만나 선단(convoy)를 이루어 에스파냐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카리브해의 섬들은 ‘서인도’로 불리고 있었고 이 호송선단 시스템은 ‘인도선단(Flota de Indias)’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존 호킨스(John Hawkins, 1532~1595)와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1596)등의 활약과 사략선들의 역할을 크게 그리고 있지만 사실 카리브에서 오는 ‘인도선단’을 습격하는 것은 무용담에서와 같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른 바다에서 언제 플로타(에스파냐의 선단)를 만날 지도 모르고 ‘나 홀로’ 또는 소규모 선단을 이루어 활동하는 사략선들이 단단히 무장한 플로타와 제대로 붙을 경우 승리를 보장하기가 어려웠다. 운좋게 낙오했거나 호송이 변변치 않은 선단을 만나 약탈에 성공하는 경우가 있을 뿐 1560년대 이후 ‘일확천금’을 얻는 일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그렇다고해서 사략선이 전혀 쓸모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과중한 부담에 시달리고 있던 에스파냐 조정에 대한 재정적 압박이 더욱 더 심해진 것이다. 비록 잉글랜드의 6배에서 8배에 해당하는 재정규모를 가지고 있는 에스파냐였지만 유럽에 널린 영지에서 벌이는 전쟁에 정규군을 상주시키고 용병들을 고용하느라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선단이 없으면 효과적인 전쟁수행이 어려웠다. 이에 (주로 잉글랜드의) 사략선까지 설치고 다니니 에스파냐는 호송선단을 따로 운영해야 했다. 여기에 펠리페의 아버지인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는 펠리페에게 넓은 영토뿐만 아니라 3600만 듀카트라는 엄청난 부채를 남기고 죽었던 것이다. 이는 에스파냐의 연(年) 재정의 거의 3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펠리페 2세는 전쟁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교도들을 박멸하겠다는 신념으로 인해 오히려 전쟁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아울러 가톨릭의 수장국으로서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오스만튀르크와의 전쟁도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펠리페가 왕이 된 후 에스파냐 정부의 부채는 연 평균 약 100만 듀카트씩 증가하였다. 예를 들자면 네덜란드의 반란이 다시 불붙은 1572년, 에스파냐 정부는 오스만튀르크에 맞서는 지중해 선단을 유지하기 위해 146만 듀카트를 지출하였고 네덜란드 주둔군의 유지에 177만 듀카트를 썼다. 많이 남는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에스파냐 조세수입의 반은 정부가 지고 있는 부채에 대한 이자를 갚는 데 소요되었다. 이 때문에 펠리페 2세의 치세 동안 에스파냐는 1557년, 1560년, 1575년, 그리고 1596년 등 4차례나 채무불이행 사태를 맞는다.
발행일 : 2012. 05. 25.
글 김성남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 세계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역서로 [원시전쟁: 평화로움으로 조작된 인간의 원초적인 역사]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스파냐 잉글랜드 전쟁 - 강대국 에스파냐와 2등 국가 잉글랜드 (전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