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음력 12월 26일이니 아직은 음력 세밑이라고 우겨 봅니다.
새해를 두 번씩이나 맞이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또 품을 수 있으니 좋은 것일까요?
설날을 부대끼며 지내야 진짜 새해가 오는 듯한 느낌은
아마도 제가 연식이 좀 된 탓으로 돌립니다.
12월의 편지_홍영철(1955 ~ )
오늘은 마음도 썰렁하고 해서 창이 커다란 카페를 찾아 혼자
맥주를 몇 잔 마셨습니다. 내게 있어 혼자 술을 마신다는 것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집니다. 알코올 기운이 세포속으로 번지나
봅니다. 세상이 모두 아련합니다¹. 2층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는
거리도, 거리의 불빛과 사람과 앙상한 나무들도 모두 아련합니
다. 우리들 가슴에 찍힌 구멍과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악마도
모두 탄산가스처럼 쓰러집니다.
흔들리지 말아야지, 휘날리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굳게 합
니다. 멸망할 시간도 많이 남지 않았는데 먼지처럼 떠돌지는 말
아야지, 그런 생각을 단단히 가집니다. 넓고 깊게 나아가야지,
그리하여 이루고 싶은 것 이루어야지, 그런 생각을 해냅니다.
어둠 속에서도 눈은 하얗게 반짝이며 흩어져내립니다. 그러
나 당신이여, 우리는 너무 자주 흔들리고 휘날리고 떠돌기 때문
에 이렇게 눈 내리는 12월의 창밖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발효
한 세상의 술을 마시는지 모릅니다. 잘 모르긴 하지만 당신도
아마 그러실 거예요.
[1995년 발표 시집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에 수록]
¹아련하다: 똑똑히 분간하기 힘들게 아렴풋하다.
J. 오펜바흐(1819 - 1880)가 1853년(34세) 작곡한
《재클린의 눈물, Jacqueline's Tears》이며,
베르너 토마스-미푸네(1941 ~ ) 첼로 협연, 한스 슈타틀마이어(1929 - 2019) 지휘
뮌헨 실내 관현악단 연주입니다.
(요 연주는 요절한 여성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1945 - 1987)에게 헌정됐습니다.)
https://youtu.be/tgLe9m7xUX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