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 (선릉 &정릉)
1. 개요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조선 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함께 잠든 선릉(宣陵)과 조선 제11대 왕 중종이 안장된 정릉(靖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선정릉이라는 말 외에도 삼릉(三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공인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2. 상세
빌딩 숲이 빽빽하게 자리잡은 강남에서 흔치 않은 녹지인 데다가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부지 규모도 매우 큰 편이다. 테헤란로, 봉은사로, 선릉로, 삼성로 사이 거의 한 블록이 다 선정릉 부지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도 매우 크기가 줄어든 것인데, 개발 과정에서 능침 주변을 제외하고 바짝 경내를 줄여버린 것. 실제로 능침 바로 옆이 도로인데, 조선시대의 기준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정릉의 능침사찰(능을 지키는 사찰)로는 같은 삼성동 안에 봉은사가 있는데, 도보로는 1.5km(23분 소요), 차량으로는 1.8km(6분) 정도가 소요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때문에 관광 동선을 짤 때에는 코엑스 - 봉은사 - 선정릉을 하나로 묶는 편이다. 선정릉은 관람이 유료(1,000원)이고 강남구 주민은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면 500원에 입장 가능하다. 빨간색 공휴일로 지정된 '명절'(추석이나 설날 등)은 무료 입장으로 오픈한다.
선정릉 테두리를 강남구에서 운동 트랙으로 설치해 놓아서 사철주야 운동 인구가 많다. 수년의 리모델링으로 관리와 조경이 꾸준히 개선되기 때문에 방문객도 상당하다. 특히 점심시간에 식사 후 산책하는 인구가 많다.
3. 역사
1494년, 성종이 승하하면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저자도리에 안장되었고 1530년에는 계비 정현왕후가 승하하면서 같은 곳에 왕릉으로 안장되어 지금의 선릉이 만들어졌고 이후 1544년에는 중종이 승하하면서 바로 한 울타리에 있는 왕릉인 정릉에 안장되어서 선정릉 및 삼릉이 형성되었다.
서기 1593년, 임진왜란 와중에 정릉처럼 도굴당했다. 선정릉 도굴사건 문서 참조. 그래서 빈 무덤이다.
1963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일대가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었고 1975년 강남구로 분리되면서 이 지역일대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선정릉 및 삼릉 일대는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개발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영향으로 도심 한복판에 있는 왕릉이 되었다.
서쪽으로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선릉이 있고 동쪽으로 중종의 정릉이 있으며 선릉과 정릉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한 울타리에 있었고 강남 한복판에서도 보기 드물게 소나무 숲과 야산 등이 있기 때문에 개발 이전의 옛 광주군 언주면 시절의 강남을 말해주고 있다.
4. 선릉(宣陵)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1] 형식으로 안장되어 있다.
비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석인 등의 석물이 있다.
2024년 8월 14일 새벽 2시 30분경 성종의 능침 봉분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리는 훼손 사건이 있었다. 50대 여성 피의자 A씨는 이날 오후 5시경에 경기도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5. 정릉(靖陵)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무덤으로, 선릉과는 달리 중종 홀로 묻힌 단릉(單陵)[2]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조선왕릉 중 왕만 홀로 묻힌 경우는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정릉은 원래 중종의 두 번째 왕비(제1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세 번째 왕비(제2계비)인 문정왕후는 그곳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인 선릉 옆으로 옮기고 훗날 본인도 하세하면 정릉에 중종과 함께 묻히길 바랐으나, 정릉 근처가 지대가 낮아[3] 여름에 비만 오면 침수되었다 하여 결국 강남의 정릉이 아닌 노원구의 태릉에 묻혔다. 당시 침수가 되면 정자각 앞에 배가 떠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침수가 잦자 다시 묏자리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거듭해서 묏자리를 옮기는 것은 불가하다"라는 이유로 상소가 쏟아져서 중단되었을 정도로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는 별로 먹히지도 않았다. 풍수지리가 맞건 틀리건 생전에 그만큼 문정왕후가 아들을 죽도록 들볶아 댔던 탓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