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372〉
■ 벼 (이성부, 1942~2012)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 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 1974년 시집 <우리들의 양식> (민음사)
*6월도 하순으로 넘어가는 시점인 요즘은, 농촌에서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 벼가 하루하루 다르게 쑥쑥 커가는 때입니다. 우리집 앞에 심어진 벼들도 5월 중순 모내기를 한 이후 부쩍 자라서 지금은 논둑까지 올라왔고, 찰랑찰랑한 논물에서는 개구리들이 때도 없이 수시로 울어 대고 있군요.
강한 햇볕 아래 오히려 더 잘 자라나는 벼를 보며, 마음이 저절로 넉넉하고 풍요로워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쌀을 주식으로 먹으며 자란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詩는 논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며, 끈질긴 생명력을 통해 인간들에게 넉넉한 사랑으로 자기희생을 하는 벼의 모습에서 민중들을 떠올리고 그들의 강인한 삶에 대해 노래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詩의 이면에 1970년대 군사독재라는 시대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감안할 때, 시인은 벼를 민중으로 비유하고 따가운 햇살이나 바람 같은 것을 시련이나 고통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詩는 결국 민중의 삶을 상징하는 벼의 이미지를 통해, 민중이 강인한 생명력과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서로 단합하면 역사의 주체로서 저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찬하는 작품으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물론 민주화를 이룬 지금은, 순수하게 시문 그대로 읽으며 받아들이는 것이 이 詩를 감상하는 데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만.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