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성지순례
신앙의 신비
△김패헌 요녕성 교구장과
김수창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사장
3천 명 주민의 중국 장춘 소팔가자 농촌부락. 김대건 성인이 부제품을 받고 8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남긴 영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는 곳으로 주민 90퍼센트가 가톨릭 신자다. 지금도 모든 신자들이 성인을 연호하며 기도를 청하는 모습은 신앙의 신비이자 주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는 성경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을에는 김대건 성인의 동상이 서있고 신자들은 오후 3시가 되면 동상 주변을 돌며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성인을 기리고 있다.
성인은 조정이 권하는 부귀영화도 뿌리치고 오로지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해 당당히 순교의 칼을 받았던 인물이기에 더욱 따르고 있는 것이리라. 더구나 유교를 숭상했던 나라에서 대를 이어 가톨릭 성인을 기리는 신자들이었다. 알려진 대로 한국천주교회는 순교로 피어난 꽃이다. 순교로써 신앙을 지킨 신앙선조들의 피와 땀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으며 한국교회 발전의 자양분이 되었다. 목숨을 내어놓는 순교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2백여 년에 걸친 모진 박해 와중에 수많은 사제와 평신도들이 순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무명의 순교자만도 1만 명을 넘는다. 우리 일행이 소팔가자에 당도했을 때 포장공사가 막 끝난 도로에선 아스콘 냄새가 물씬했고 도로 이름마저도 ‘김대건로’로 바뀌어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부락은 보릿고개가 상존하던 시절의 우리나라 시골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도 주민들의 눈망울은 초롱초롱했고 우리 순례자들을 만나기 위해 골목길로 몰려나온 얼굴들엔 순박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그러면서 김대건 성인의 나라에서 온 교우들이란 걸 알고는 스스럼없이 카메라 앞에 나서기도 했다.
축복된 천년을 뜻하는 라틴어 밀레니엄. 1999년에 접어들면서 지구촌은 온통 밀레니엄 열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새로운 천년을 복되게 맞이하겠다는 뉴밀레니엄 열기는 뜨거웠고 가톨릭신문사도 중국성지순례 대장정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 탄생 2천년의 대희년을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의 해를 살고 있던 때였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흘렸던 고난의 피땀이 서려있는 중국 내 성지를 밟으면서 순교의 길을 걸어온 선조들의 신앙을 재현하겠다는 뜻을 담아 한국교회사상 최초로 순례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전국에서 뜻을 내어 참가한 80여명 순례자들 중엔 성직자와 수도자 부모와 본당 사목회를 맡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사장신부와 교회사 전문가들 그리고 영남교회사연구소에서도 책임자가 참여하여 순례지마다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해설에 열정을 보였다. 당시 신문사 위촉기자였던 나는 중국 땅 심양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취재팀에 배속되었다. 전문 사진가가 필요하다는 신문사 사장신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북경교구장 취재는 교구청 회의실에서 1시간 넘게 이어졌지만 북경교구와 교황청과의 긴장관계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취재가 끝나고 중국천주교 신철학원 정경이 새겨진 까만 쟁반을 우리 측 참가자 5명은 하나씩 선물 받았다. 요녕성 교구장은 성씨가 우리와 같은 김패헌 주교였다. 얼굴 모습과 풍기는 분위기도 우리 한국인과 흡사했다. 서울 명동성당처럼 고풍스러운 성전에서 사장신부와 이사장신부 공동 집전으로 첫 번째 기념미사를 봉헌했고 참례자들은 주님을 향해 간절하게 두 손을 모았다. 마치 맞춤한 것처럼 미사복사는 제주에서 참여한 대학생 형제가 맡았다. 형제지만 그들은 한날한시에 난 쌍둥이였고 신학생 같은 분위길 풍겼다.
미사가 끝나자 김패헌 주교는 순례자들 손을 일일이 잡고 이산가족 상봉처럼 애틋한 눈길을 보냈다. 성전 보수공사중인 개주성당에선 우리를 기다리는 중국인 사제와 수녀들의 환영을 받으며 성당 마당에 들어섰고 성당 소개를 마친 사제는 선 자리에서 주모경을 바쳤다. 양관성지는 녹음방초 무성한 폐허로 변해 흘러간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일행이 타고 달리던 버스의 타이어가 이탈되고 도로가 내려앉아 순례자들이 직접 돌멩이를 날라야하는 일도 벌어졌다.
신앙선조들이 겪었던 고초의 몇 백분의 일이라도 직접 체험해보라는 계시 같았다. 영화산진성당에서 두 번째 미사를 봉헌한 후 이동하는 차안에서도 성경을 봉독하면서 성가가 울려 퍼지자 순례여정 전체가 은총이란 생각이 들었다. 북한과의 경계인 압록강에서 서너 명씩 보트에 올랐고 배는 북한 땅 가까이까지 다가갔다. 무너지다 만 녹슨 철제구조물 사이로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 접하던 동포들의 실상이 드러났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저들은 우리가 동포라는 걸 알기나 할까 싶었다.
보트에서 기념품으로 파는 북한지폐 5종 세트를 샀지만 그들에게 전할 방법은 없었다. 압록강 북쪽의 역사 속 한만국경지역으로 고려문이 있던 봉황산 책문지구를 찾았다. 책문은 당시 고려문으로 불렸고 한국 관리가 파견되었던 별정소가 있던 곳이다. 이곳엔 3천 호에 달하는 한국인 가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밀려 그 흔적이 사라진 곳이다. 마침 진해에서 온 형제가 피리로 ‘동심초’와 ‘고향의 노래’를 연주하자 잠시 숙연한 분위기에 젖어 저마다 떠나온 집을 그리는 시간이 되었다.
대륙은 넓어 심양에서 연길까지는 항공편을 이용해야만 했다. 숙소인 대우호텔엔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렸고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은 연변가무단이 무대에 올랐다. 나라 잃고 암울했던 시절 독립을 찾기 위해 만주 땅을 떠돌며 불렀던 ‘선구자’와 세계 민속노래경연에서 일등으로 뽑힌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가무단의 부채춤이 화려하게 펼쳐지나 싶더니 어느새 음악은 빠른 곡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순례자 중 얌전해 보이던 중년의 자매가 현란한 트위스트 춤동작으로 무대를 휘어잡으면서 일행 대여섯을 더 불러냈고 객석의 일행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회장에선 연변에 살고 있는 고모를 극적으로 만나는 깜짝 이벤트도 벌어졌다. 우리 일행 중에 조카가 있었고 상봉장면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먹고 살기 위해 만주로 떠난 혈육은 아흔이 다되었지만 생존해 계신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것.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은 연길성당은 현대식 건물로 주일미사에 참례한 조선족들이 많았다. 평화의 인사 때 순례자들은 그들이 맞잡은 손을 쉽게 놓질 못했다. 이역만리 성전에서 그것도 동포들을 만나다니 주님의 크신 은혜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훈춘성당도 찾아 미사를 봉헌했다. 훈춘성당은 문화혁명 당시 파괴된 아픈 역사를 지녔지만 10여 년 뒤 새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광복 직후엔 사제와 수도자가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었지만 침묵의 교회가 되기 전까지는 공소만 스무 곳이 넘을 정도로 큰 성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우 5백 명 남짓한 초라한 본당으로 전락했고 그마저도 우리 조선족 신자들이 절반이나 있어서 가능했단다. 백두산을 오르는 새벽엔 숙소인 호텔 룸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아무도 촬영을 요청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난 출국하는 인천공항에서 시작하여 순례 전 과정을 캠코더에 담았다. 마침 직장 퇴직 후 비디오작가로서 영상편집 영업을 막 시작한 때였다. 순례자들에 다가온 항공기 승무원이나 공항직원 그리고 순례지의 성직자나 수도자까지도 빠트리지 않고 찍었다. 그러면서도 호텔 안 미사에선 비좁은 공간에서 촬영하느라 참례자들에게 분심이 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8일간의 중국 성지순례 비디오 작품은 그렇게해서 만들어졌다.
순례자들 중엔 은퇴한 원로 영화감독도 있었는데 그는 어찌 그렇게 작은 장비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느냐며 놀라움을 표했다. 순례자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찍혔기에 영상은 전혀 꾸밈이 없어 아주 자연스러웠다. 성지순례 비디오는 자녀들인 신부와 수녀에게도 선물하겠다며 추가로 신청하는 물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문사가 소재한 대구에선 앵콜 요청이 있어서 영상을 두 번이나 틀었고 서울 명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도 중부지역 순례 참가자를 대상으로 상영하는 시간을 가졌다.
반공포로 출신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사장 신부도 접사렌즈까지 휴대하고는 가끔씩 산하를 조용하게 카메라에 담았는데 귀국하여 묵상집 <종살이 30년에>와 <생활속 복음> 강론집까지 선물로 보내와서 교우들과 두루 읽었다. 순례로부터 20년 세월이 지난 지금 난 다시 소팔가자를 꿈꾸고 있다. 그곳 성지를 순례하는 여행상품도 생겼지만 부부가 자유여행으로 며칠 다녀오고 싶다. 당시 마을 어귀에서 나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던 순박한 교우들 추억사진도 전하면서 김대건 성인 동상도 함께 돌고 싶은 것이다.
[註] 2019년말 창궐하기 시작한 코로나 사태로 나의 '소팔가자 성지순례' 계획도 한없이 늦어지고 있어 안타까운 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