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괌 전투
출처: http://blog.naver.com/mirejet/110037870971
전쟁 전 일본군은 괌을 마리아나 제도에 걸친 미군 거점의 하나로 생각했다. 당초 일본군은 괌의 미군을 과대평가하여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웨이크 섬 전투에 참가한 부대는 모두 해군소속이었지만 괌 공략에는 육군부대를 참가시키는 것을 계획했다. 이에 대본영은 남방작전의 일환으로서 12월 8일, 필리핀, 말레이, 홍콩, 진주만의 동시개전에 괌을 포함시켜 합동개전을 실시하는 것을 계획했다.
일본은 괌 현지에 미 해병대 300명과 현지인 병사 1,500명이 있다고 예측했지만 미국은 일본의 세력권에 둘러싸인 괌의 방어는 불가능하다고 여겨 방위예산도 편성해놓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괌에는 일본군의 예상병력과는 달리 500~700명 남짓한 소수의 미군뿐이었다.
일본군은 괌 공략을 위해 호리이 도미타로(堀井富太郞)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4,886명의 난카이 지대(南海支隊)를 편성했는데 여기엔 구축함 키쿠즈키(菊月)를 포함한 해군육전대 400명도 행동을 같이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괌의 미군을 과대평가한 군부는 이것만으로도 불안했는지 고토 아리토모(五藤存知) 해군소장 휘하의 중순양함 아오바(靑葉), 키누가사(衣笠), 카고(加古), 후루타카(古鷹)의 4척을 다시 증파하였다.
하지만 당시 괌에는 맥밀런 해군대령이 이끄는 미군 수비대 약 750명과 초계정 3척, 급유선 1척뿐이었다. 난카이지대는 1941년 11월 하순에 오가사와라 제도의 하하시마(母島)에 집결해 12월 8일 개전과 함께 수상정찰기 16대로 괌 공습을 실시해 미군의 소형초계정<펭귄>을 격침시켰다. 당시 괌에는 십여명의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개전과 동시에 전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다음날인 9일에도 일본군은 공습을 실시했다. 오후 11시, 일본군은 괌 섬의 위치를 확인 후 10일 오전 0시에 수송선이 상륙정을 바다로 띄우는 작업을 시작해 난카이 지대는 3부대로 분산되어 동(호리에 부대), 서(다치바나 부대), 북쪽(츠카모토 부대) 방면으로 상륙하기로 했는데 해군육전대는 북쪽의 츠카모토(塚本)부대와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다.
다치바나(楠) 부대는 오전 4시 25분에 상륙을 개시했다. 상륙지점 부근은 산호초였지만 해안부근은 비교적 평탄하고 파도도 잔잔한 곳이라 상륙작전 수행에는 지장도 없었고 전투도 없었다.
츠카하라 부대는 오전 3시 10분에 상륙을 개시했는데 해군육전대도 거의 동시에 약 5km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상륙을 개시했다. 오전 5시경 해군육전대는 약 80명 정도의 미군과 조우했는데 30분간의 전투로 미군은 10명의 사망자를 내고 후퇴했지만 일본군은 해군육전대 병사 1명 사망과 소수의 경상자만 낸 후 괌 정부청사를 점령했다.
수비대 사령관이었던 괌 총독 맥밀런 대령은 오전 5시 45분, 다른 지점에도 일본군이 상륙한 것을 알게되어 더 이상의 저항은 자살행위라 보고 현지인들의 피해를 막기위해 항복했다. 이 대 맥밀런 대령을 포함해 약 150명의 미군이 포로가 되었다.
츠카하라 부대는 상륙지점에서 밀림 속을 전진해 도로에 도달했는데 그곳에서 자동차를 보유한 소수의 미군과 조우해 전투를 벌여 이들을 전멸시켰다. 해군 수상정찰기도 정찰과 공습을 실시해 육군의 작전을 도왔다. 다른 부대가 순조롭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동쪽을 맡은 호리에 부대는 상륙에 곤란을 겪었다.
당시 동쪽해안가는 풍속 10미터 이상의 강풍과 2~3m 이상의 높은 파도로 인해 수송선이 상륙정을 띄우는 작업도중 3척이 파손되어 사용이 불가능해져 상륙하는데 애를 먹었다. 간신히 상륙정을 띄우는 것에 성공해 육지를 목표로 작전을 개시했지만 상륙예정지가 황폐지라 예정을 변경해 남쪽으로 상륙지점을 향했지만 이곳도 높은 파도로 인해 어쩔수 없이 배를 해안가에 붙이는 식으로 해 상륙했다. 이 때도 함정 1척이 파고로 인해 크게 대파되어 사용불능상태에 빠졌다. 상륙정이 몇 척이나 부숴지는 탓에 호리에 부대가 상륙을 완료한 시간은 작전예정을 넘긴 오후 3시였다.
괌 전투는 단 하루만에 종결되어 일본군은 사망 1명, 부상 6명이라는 경미한 수준에 그쳤지만 미군은 전사 약 50명 내외에 부상자 80명의 피해와 650명의 미군과 현지인들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구속된 일본인 거류민들은 모두 풀려났다.
일본군이 점령한 괌은 오오미야지마(大宮島)라고 섬 이름이 개칭되어 3년 후 미군이 탈환할 때 까지 일본군이 군정통치를 실시했다. 이후 난카이 지대는 라바울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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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상륙했던 괌의 타몬 만, 현재는 이곳을 연인들의 해안이라 부르며 데이트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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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이 도미타로(堀井富太郞) 1890년 11월 7일 생 - 1942년 11월 23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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