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요한 1,29-34
불의 세례 받는 법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물의 세례와 불의 세례에 관해 말을 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물의 세례를 거치지 않고서는 불의 세례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요한이 불의 세례를 받은 이유는 바로 물의 세례를 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안중근 의사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하얼빈’입니다.
주인공 현빈은 처음에 안중근 역을 맡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칫 현빈이 일본에서 인기가 높아서 그 인기를 잃게 될까 봐 거부하려 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빈은 그런 이유 때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안중근 의사의 무게감을 자기가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워낙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처럼 근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혹시나 자신의 부족한 연기가 그분의 위대함을 저해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안중근을 표현하기 위해 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영하의 추위에서
관객을 속이지 않는 현실감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해서인지, 현빈은 마지막 장면을 다 찍고 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그 무거운 압박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안중근의 무게가 컸으면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우리가 현빈처럼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을까요? 현빈은 그를 표현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연구하고 실제로 추위와 전투 장면 속에서 그를 체험해냈습니다.
그만큼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고뇌와 인생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그가 흘린 눈물이 ‘불의 세례’와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웅’이나 ‘하얼빈’과 같은 안중근 의사의 삶에 대해 알기 위해 뮤지컬이나 영화를 본다면
이는 물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는 새로 태어남인데 그분으로부터 직접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분을 알리려는 누군가에 의해 알게 되는 지식입니다.
이것으로 그분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의 세례를 주기 위해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리려고 할 때 불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제가 신학교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그건 불의 세례였습니다.
눈물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제가 되어 그분의 증거가 되겠다는 물의 세례를 주는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 다음에 온 것입니다.
불의 세례를 받아야 그분으로부터 직접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까지 가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에서 유관순 역을 맡았던 고아성 배우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는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고문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은 고문도 아니었을 정도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 없다.”
고아성 배우는 유관순 열사의 강렬한 눈빛을 갖기 위해 실제로 닷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며 유관순을 자신처럼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는 장면에서는 자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무선 마이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달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심장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 불의 세례인 것입니다.
물의 세례를 주려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새로 태어남의 축복입니다.
이 장면을 8호실 안에 있던 25명과 아이컨택을 하면서 낭독했고 컷이 되자마자 다들 약속한 듯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뜻깊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주연 짐 카비젤은 이 영화를 찍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짐 카비젤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을 찍기 직전
의사로부터 심장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멜 깁슨 감독은 계속 찍을 것이냐고 짐에게 물어봅니다. 짐은 대답합니다.
“이것은 저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매달렸던 그는 자신에게서 탈혼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자기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할 때,
곧 물의 세례를 주려고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십니다.
이에 관하여 짐 카비젤은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모두들 부활은 원하지만, 고통은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3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복음: 요한 1,29-34
완전히 죽는 순간,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고, 참삶의 길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너무나 두렵고 경외로운 이름, 절대 신성시되는 이름, 그래서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이 하느님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공개적으로 외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변방 나자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을 향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외쳤으니,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분노와 혼돈이 일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한마디로 목숨을 건 증언이자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세례자 요한의 이 간략한 증언 한 마디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운명에 대해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놀랍지 않습니까? 광대무변한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느님, 그분으로부터 이 세상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부여받은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세례자 요한은 그분을 향한 표지이자 상징으로 ‘어린양’이란 호칭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 사가들의 상징조차 사자, 독수리, 황소등으로 표상되는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해 붙인 칭호가, 공룡이나 호랑이가 아니라, 고작 어린양이라니요!
양은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대표적인 초식동물입니다.
힘없고 빽없는, 그래서 틈만 나면 맹수들에게 쉽사리 잡혀 먹히는 약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양들 가운데서도 갓 태어난 어린 양에다 예수님을 갖다 붙이니, 참으로 특별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생각하니,
어린양보다 더 잘 들어맞는 호칭은 다시 또 없는듯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여정을 쭉 따라 가보니, 단 한 마디로 표현해서, 더도 덜도 말고, 딱!
어린양의 삶을 철저히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생에 걸쳐 철저하게도 고수하셨던 기본 노선은 비폭력 평화주의였습니다.
한 마리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모두를 향해 외치고 계십니다.
올라서지 말고 내려서라고! 움켜쥐지 말고 손을 펴라고! 이기려고 기를 쓰지 말고 한번 져보라고!
살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한번 죽어 보라고!...완전히 죽는 순간,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고, 참삶의 길이 시작될 것이라고.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강론>
(2025. 1. 3. 금)(요한 1,29-34)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29-34)”
1) 31절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줄을 몰랐다는 뜻이고,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서 그것을 알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친척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서로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만, 또는 하느님의 계시와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에 대해서,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이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3-44).”
이 증언만 놓고 보면, 세례자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고 기뻐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증언은 엘리사벳의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렸을 때”(루카 3,2), 그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2) 33절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의 의미를 몰랐다는 뜻인데, 이 말도 “하느님께서 알려 주셔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성령이 예수님께 내려오신 것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이라고,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다는 것이 요한의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다시 정리하면, “나는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시를 받고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시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고,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는, “나보다 높으신 분이 오시는데”입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는, 요한복음 1장 1절,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는 증언과 ‘같은 증언’입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내가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준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사람들이 잘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킨 것이었다.”입니다.
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만나고, 알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학문 연구 같은 방법으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지식을 쌓으려고 공부하는 생활이 아니라, ‘믿는 생활’이고,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한다고 해도,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도 없고,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먼저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평생 공부를 하고, 수련을 하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