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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세자가 공부를 하는 모습입니다. 오른쪽 빈자리가 왕세자 자리입니다. (위) *사진, 심상우
* 성균관 명륜당에서 공자(孔子)에 배향하는 왕세자, 주변의 유생들도 똑같이 배향합니다.
* 공부하는 왕세자. 명륜당 안에는 오로지 유생들만 있습니다. 관헌들은 모두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위)
*스승과 제자(왕세자)가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왕세자가 공부할 때는 엄격한 예법에 따랐습니다.(위)
왕(王)에 관한 공부 1
• 왕은 무엇인가?
왕(王)은 하늘, 사람, 땅을 아우르는 존재이다. 하늘(天), 사람(人), 땅(地) = 삼재통(三才通). 그러한 왕들은 어떤 존재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왕학(王學)이다.
• 우리나라엔 몇 명의 왕이 있었나?
고구려=28명, 백제=31명, 신라=56명, 고려=34명, 조선=27명 [모두 176명]
-들어가면서
•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왕들에 대한 정보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비롯한 몇 몇 자료밖에 없어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 왕들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그것에 대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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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출생과 교육>
조선시대의 국왕은 나라의 운명과 직결되는 존재로, 권력의 정점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이다. 왕세자가 일단 왕위에 오르면 특별한 결함이 없는 한 평생토록 왕 노릇을 계속하는 종신직이다. 따라서 장차 왕이 될 왕세자도 왕과 같이 소중한 존재였다. 왕세자에게 대해서는 이런 말이 있다.
“위로 역대의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 신하와 백성들의 안위(安危)가 달려있으며,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왕세자에 달려 있다.”
이러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진 국왕을 견제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기록을 통한 견제이다. 국왕의 모든 행위를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평가를 받게 한다. 따라서 왕은 자신에 대한 후세의 기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에 대한 기록으로 대표적인 것은,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사관의 사초(史草) 등이 있다.
둘째, 왕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왕은 평생토록 신하를 스승으로 삼아 교육을 받게 했다. 조선 27대 왕의 경우에 있어서 두세 명을 제외하고 모두 평생 동안 스승을 곁에 두어 경연(經筵)을 계속했다. 경연은 조선 왕조를 이끈 매우 중요한 원동력의 하나였다. 왕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교육을 받았다.
그렇다면, 왕은 어릴 때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알아보자.
우선 왕이 되기 전에 왕의 자식들이 태어나는 과정을 살펴보자.
왕의 자식은 크게 대군(大君, 정부인에게서 난 맏아들), 군(君, 후궁에게서 난 아들)이 있고, 공주(公主, 정부인의 딸), 옹주(翁主, 후궁의 딸)가 있다. (*왕세자의 세자빈에게서 난 딸은 군주(君主), 첩실에게서 난 딸은 현주(縣主)라 한다.)
조선 궁궐은 그 이름부터가 왕가의 자손이 창성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경복궁의 왕의 침소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따서 강녕전(康寧殿)이라 했고, 왕비의 침전은 교태전(交泰殿)이라 했다. 교태는 주역의 태괘에서 나온 말로 곤괘 아래에 건괘가 겹친 형상으로, 하늘의 양기가 위로 상승하고 음기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으로 결국 자손 번창을 기원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창덕궁은 밝은 정치를 펴라는 뜻을 담은 희정당(熙政殿)이 왕의 침소이며, 대조전이 왕비의 거처이다. 대조전(大造殿))은 큰 인물을 만든다는 뜻이 담겨 있어 이 역시, 왕세자를 생산하는 공간의 뜻을 담고 있다.
중전의 거처인 교태전이나 대조전에는 별다른 세간이 없고, 화려한 이불만 20여 채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중전이라 해도 왕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것을 사전에 예방한 조치이다.
왕과 왕비는 자식을 낳기 위해 좋은 날을 받아 합궁(合宮)한다.
왕과 왕비가 합궁하는 날은 참으로 복잡하다.
육갑 중에서 뱀날(巳), 호랑이날(寅)은 피하고, 음기가 세어지는 초하룻날을 피하고, 음기가 줄어드는 보름날도 피한다. 비, 천둥, 안개, 바람, 일식, 월식을 피하고, 왕의 심기가 불편한 날을 제외하고, 왕가의 제삿날도 피한다. 물론 왕비의 몸이 있는 날, 즉 월경일(月經日)도 피한다. 따라서 왕과 왕비가 이러한 조건에 맞춰 합궁할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겨우 하루나 이틀 정도였다. 합궁하는 날에는 침실 근처에 나이 많은 상궁을 두어 그들의 행위를 살펴 조언을 하게 했다. 상궁은 혹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한 조치이기도 하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어 아이가 들어서면 태교(胎敎)가 시작된다.
율곡 이이(李珥)가 지은 <성학집요> 교자(敎子)편에 보면, 태교에 대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옛날에는 부인이 아이를 임신하면 옆으로 누워 자지 않고, 비스듬히 앉지 않으며, 외발로 서지 않고, 맛이 야릇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사특한 색깔을 보지 않고,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밤이면 장님에게 시를 외우며 바른 일을 말하게 하였다.” (장님은 눈을 잃고 그 기운이 목으로 가 목청이 좋아져 맑은 음색을 낸다고 여겼음)
이러한 태교 규정은 조선시대 왕가는 물론 사대부가에서 일반화된 내용이다. 특히 왕가는 더욱 철저하고 치밀한 태교가 행해졌다.
임신부에 대한 태교는 환경을 중시하는 교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임신부는 아침에 일어나면 성현의 교훈이 새겨진 옥판(玉板)을 보고 그 말씀을 소리 내어 외운다. 옥판은 옥 자체의 성질이 몸에 이롭고, 빛깔이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준다. 성현의 말씀을 외우는 것은, 엄마의 소리가 태아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이것은 오늘날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내용이다.
색깔이 고운 홍수정 자수정으로 만든 팔찌 목걸이를 만지고 바라보게 한다. 조용하고 정결한 거처에 악사를 배치하여 음악을 들려주게 한다. 단, 피리 독주는 하지 않는다. 피리 소리는 사람의 애간장을 끓게 하는 것으로 좋지 않다고 여겼다.
임신 3개월, 단맛을 과다하게 섭취하면 칼슘 부족을 우려하여 단맛을 경계한다.
임신 5개월, 내시와 나인에게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낭독하게 한다.
임신 7개월, 고기반찬을 피하고 식전에 순두부를 먹게 한다. 순두부가 태아의 두뇌 발달에 좋다고 여겼다. 채소와 해산물(김, 미역, 새우, 살의 흰 생선)을 먹었으며, 게와 문어는 피했다. 게는 옆으로 기는 성정을 못 마땅히 여겼고, 문어는 뼈가 없는 동물이라 지조가 없을 것으로 여겼다.
임신부는 임신 전 과정에서 틈틈이 아이에게 입힐 누비옷을 만들거나 자수를 놓았는데, 이는 정성과 섬세함, 집중력을 높이는 구실을 하였다.
출산이 임박하면 산실청(중전과 세자빈)을 만들어 출산을 전담했다. 내의원의 3제조와 출산 1~3개월 전에 설치했다. 호산청(후궁, 첩실)은 후궁 이하 부실의 출산 기관이다. 후궁들은 원래 친정에 가서 출산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몇 번의 사고가 난 뒤로 궁중에 호산청을 설치하고 의관을 배치하였다.
산실청이 설치되면 전국에서 형벌의 시행을 멈춘다. 산실청에 든 임신부는 매월 달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자리를 돌려놓는다. 이것을 월덕방(月德方)이라 한다. 월덕방에는 비상종을 달아 위급할 때 의원을 부르거나 비상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산달이 되면 친정 부모를 궁궐에 들어오게 하여 출산을 뒷바라지하게 하였다. 친정어머니를 만나 산모가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한 조치였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개봉! 원자(元子)가 태어나면, 왕은 구리종을 쳐서 아기의 출생을 만천하에 알린다. 종묘에 원자의 탄생을 고하고 만조백관의 하례(축하인사)를 받는다.
산모와 산실청 관리에게는 왕이 상을 하사한다. 상으로는 길이 잘 든 말 한 필, 쌀, 베를 주며, 백성에게는 사면령을 내린다. 또한 축하 과거 즉, 경과(慶科)를 시행한다.
원자에게는 유모(乳母), 즉 젖어미를 선택해서 붙여준다. 유모는 원자에게는 특별한 존재로 후덕하고 건실한 성품을 가진 여인 중에서 선택한다.
유모는 왕대비가 민간인을 상대로 선발한다. 천민 중에서 유모로 선발되면 면천(免賤)시켜 준다. 유모로 선정된 여인은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 하여 종1품의 품계를 받았다. 종1품은 6판서보다 직급 상 웃전이다.
원자가 국왕이 된 뒤에 유모는 왕의 목욕 수발을 든다. 국왕은 목욕을 할 때 어떤 경우에도 옷을 다 벗지는 않는다. 왕비가 난산(難産)을 하면 국왕은 자신의 유모를 특별히 파견하여 해산을 돕게 한다.
내관(內官)은, 고위직은 아니지만 왕자의 음식 습관, 생활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다. 내관은 신체 건강하고 무술에 능통해야 하며, 왕자의 물음에 언제든 답을 할 수 있는 학식이 있어야 한다.
왕자의 스승과 동료의 선발에도 여러 가지 까다로운 기준과 절차가 있다. 왕자의 동무는 배동(輩童)이라 하며, 왕족이 아닌 아이 중에서 선발한다.
왕자 주변에는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을 둔다. 왕자는 이들의 행동을 따라 배우면서 덕성을 길러 나간다.
<소학>을 통해 삼강오륜을 습득하고 기본예절 교육을 배운다. 왕자가 공부를 할 때는 스승 앞에서 옷을 가지런히 갖추고 자세를 바로 한다. 왕자도 아침에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하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는 이른바 효도의 기본인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행한다.
또한 부모님의 식사를 살피는 시선(視膳)과 병환 중에는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侍湯)을 행한다. 왕세자 시절에 이러한 것을 배워두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그것이 훗날 정치를 할 때 백성을 가르치는 바탕이 되게 하였다.
왕세자로 책봉 된 다음에는 나라를 경영할 책임자로서 다른 사람의 견해를 경청하고, 신하들을 공경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살필 줄 아는 덕성을 갖추도록 요구 받았다.
• 왕세자의 교육 절차
어린 왕자가 스승을 처음 만나는 상견례(相見禮)가 있다. 강의를 시작할 때는 개강례가 있고, 성인이 될 때는 관례(冠禮)를 치른다. 관례는 삼가(三加禮)라고도 하는데 옷을 세 가지 갈아입는다. 익선관 곤룡포, 원유관 강사포, 일곱 혹은 아홉 가지 색깔을 띤 면복.
왕세자로 책봉되는 책봉례가 있다. 성균관에 가서 스승에게 교육을 받는 입학례가 있고, 장가들어 세자빈을 맞아들이는 가례(嘉禮)가 있다.
• 왕세자의 교육 단계
보양청(원자 2~3살) - 강학청(천자문, 소학을 듣는 기초단계) - 세자 시강원(서연-세자 최고 교육기관) - 경연(국왕 교육-평생) * 세자 시강원 관리 20명. 강서원(호위무사-10명) (학생 1명에 스승 20명. 호위무사를 합하면 30명, 왕세자는 그만큼 중요하다.)
• 상견례(相見禮)
보양청 설치 후 최초의 행사이다. 어린 원자가 감당하기에는 복잡한 절차가 있으나, 모두가 이 과정을 밟았다. 원자는 동쪽 벽이 있는 자리에서 서쪽을 향해 앉는다.(동쪽은 왕세자의 자리임) 맞은편에 사부가 앉는다.
원자가 먼저 행사장에 들어가 동쪽 계단을 내려와 사부에게 읍(揖)을 하면, 사부도 읍으로 답례한다.
원자 세 번 읍하고 스승에게 먼저 계단에 오르도록 청한다. 스승은 읍하고 오른다. 원자 동쪽 계단을 올라가 자리에 나아가 재배(再拜)한다. 사부 재배로 답배한다. 상견이 끝난 뒤 자리를 옮겨 원자에게 <소학> 한 구절을 가르친다.
• 입학례(入學禮)
세자의 입학에 대해서는 출궁도(궁궐을 나가는 그림), 작헌도(공자 사당에 배향하는 그림), 왕복도(돌아오는 그림), 수폐도(예물을 바치는 그림), 수하도(축하인사)의 의궤에 따른다.
세자가 입학을 하기 위해서는 마땅한 격식을 따르고, 성균관 명륜당에서 공자의 사당에 예를 올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이때 특이한 것은 스승은 책상에 책을 올려놓고 읽거나 질문을 하고, 세자는 맨바닥에 책을 놓고 읽거나 암송한다. 이것은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신분에 있어서 세자가 높아도 스승이 우위에 있는 것을 뜻한다.
수폐도(受幣圖)는 왕세자가 스승에게 예물을 바치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왕세자가 스승에게 바치는 최소의 예물을 속수(束脩)라 하는데, 속수는 폐백(모시 3필), 술(2말), 마른안주가 있다.
왕세자가 이처럼 철저한 에법에 따른 교육을 받는 것은 장차 국왕은 국가의 중요 행사인 오례(五禮)를 행할 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오례(五禮)는 길례(吉禮)-제사, 흉례(凶禮)-국장(國葬), 가례(嘉禮)-회갑 생일 진연, 빈례(賓禮)-외국 사신 접대를 말한다.
국가의 전례(典禮)는 종류가 많고 절차가 까다롭다. 국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왕세자는 국왕을 수행하여 국가 전례를 익힌다.
중국 사신이 왔을 때에는 국가를 대표하여 왕세자가 손님 접대를 한다. 이것은 차기 국왕을 미리 보여주기 위한 의미가 있다. 국가 전례 때는 시강원 관리들이 배석하여, 왕세자가 복잡한 전례를 잘 익혀서 원만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한다.
<왕세자의 지식 교육>
덕성교육을 먼저 하여 심신을 단련한 뒤에 지식 교육에 집중하는 학습 방식을 택했다. 주자(朱子)의 독서법에 이런 말이 있다.
“마음을 깨끗하게 쓸고 닦은 뒤에 책을 읽어라!” 이것은 오늘날에도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다. 모든 공부와 학문 연마는 그것을 배울 마음의 바탕과 자세를 갖춘 다음에 행해야 그 효과가 최고조에 달한다.
왕세자는 주로 경전 교육과 덕성의 함양에 치중했다. 역사 교육과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갖추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왕세자가 주로 배운 책은 초학자용으로 <소학>, <효경>, <동몽선습>, <삼강행실>이 있으며 경서로는 <사서삼경(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이 있다. 조선 역사서로는 <조감>, <자성편(조선 영조 펴냄)>, <국조보감>, <갱장록>, <모훈집요>가 있고, 성리학 교재로는 <고경중마방초>, <성학집요>, <주자서절요>, <주서백선>이 있다. 문장서로는 <육주약선>, <팔자백선>이 있다.
조선 영조 정조 때는 국왕과 왕세자를 위한 많은 교재를 편찬하였다.
왕세자의 교육 평가는 고생(告栍)이 있다.
고생은 서로 다른 경전 글귀를 쓴 생(栍)을 원통 그릇에 놓고 그 것 가운데 하나를 뽑아서 나온 글귀의 내용을 이어서 외운 다음 풀이한다. 왕세자는 보름에 한번씩 20명의 스승 앞에서 시험을 본다. 시험의 평가는 통(通)-우수, 략(略)-보통, 조(粗)-불량, 불(不)-낙제의 4단계로 하였다. 불(不)-낙제를 받았을 경우에는 스승이 대신 회초리를 맞았다.
이것은 공부하는 학생 입장에서는 대단한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왕실 교육의 이러한 시스템은 왕세자와 왕이 공부를 하지 않고는 그 자리를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왕세자 교육에 철저했던 이유는, 국왕은 신하가 올리는 문서들을 읽고 처리할 능력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교 경전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정립하여 밝힐 수 있어야 했다. 왕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은 항상 이러한 점을 일깨워주어 국왕이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고, 경연에 참여하는 것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왕세자의 체육과 예술 교육>
체육은 어린 시절 건강을 위한 체조를 했다. 성장하면서 점차 활쏘기, 검술과 말 타기를 익혔다. 승마는 조선 시대 가장 빠른 교통수단으로 왕에게도 필수 항목이었다. 검술과 활쏘기는 위급할 때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수 있어야 했다. 조선 초기 왕실에서는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가 성행했는데, 이는 고려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또한 왕세자(왕)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가 무예를 익히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예술 교육으로는 시 짓는 법, 국가 경사가 있을 때 국왕과 신하들이 어울려 시를 짓는 것이 관례였다. 국왕은 서예, 그림, 음악에 조예가 깊어야 했다. 정조는 시를 잘 지었음은 물론 <악통>이라는 음악 이론서를 편찬할 만큼 그 재능이 뛰어났다.
왕세자(왕)의 교육 목표는 문무를 겸비하고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조선시대 왕실 교육의 최종 목표로 전인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인교육은 말로써 하는 언교(言敎)보다 몸으로 직접 실천 중시하는 신교(身敎)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에 왕세자(왕)가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했는지 가르쳐준다. 그러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제1강을 마친다.
• (참고자료) 정조가 직접 작성한 <뇌연집> 서문
* <뇌연집>은 정조의 최초 스승인 남유용의 문집이다.
“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황조(皇祖-할아버지 영조)께서 여러 신하들 가운데 남유용 공을 뽑아 보양관으로 임명하고 글자를 가르치게 하셨다. 그 해에 <효경>을 가르치고 <소학>까지 가르쳤는데, 이는 내가 명민해서가 아니라 공이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했기 때문이다. 공은 매번 공복을 입고 강의 자리에 들어와 나를 무릎에 앉히고는 입으로 말하고 손가락으로 쓰면서 글자의 음과 문장의 뜻을 깨우쳐 주었다. 말을 정성스럽게 하며 권태로워하지 않았는데 그때의 일이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로부터 6, 7년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웠는데 공이 그 직에서 물러났다. 내가 동궁에 책봉되자 공은 다시 빈객이 되었는데 더욱 나이가 많아져 그 직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여덟 가지 잠(箴, 경계의 말)을 가지고 내가 덕에 나아가도록 힘써주었다.
공이 말한 것은 바른 것에서 벗어난 것이 없지만 내가 어리석어 성학(聖學)의 경지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대강이나마 의리와 이익을 구별하고 치세와 난세가 생기는 이유를 아는 것은 어릴 때에 공에게 들은 말에서 얻은 것이 많다. 그 공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중략)
이제 공이 세상을 떠난 지도 십여 년이 지났다. 사람이 그리워도 볼 수가 없어 그의 집에서 유고(遺稿)가 있는지를 찾았고, 그가 지었던 시와 문 몇 편을 얻어 읽어보았다. 그의 말이 아름답고 기운을 순수했으며, 법도는 정연하면서 두루 통하고 논리는 항상 경(經)을 위주로 하여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 온화하게 즐기는 흥취가 있으면서도 기교를 부리거나 과장된 표현이 없어 그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알기에 충분했다. 진실로 불후의 업적이 되는데 집이 너무 가난해서 인쇄에 부칠 힘이 없기에 운각에 보내어 간행하게 했다. 아, 이것이 어찌 그의 공로에 보답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내가 예전에 배웠던 일을 잊지 못한다는 뜻을 표하는 것이니, 이 글을 써서 책의 머리에 두게 한다.”
이 글은 정조가 1783년에 지은 남유용 문집의 서문이다. 남유용은 1773년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정조는 1776년에 국왕이 되었다.
국왕이 된 정조는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스승이 남긴 시문을 모아 규장각에서 간행토록 했다.
정조가 스승의 시문을 모아 문집으로 간행하고 그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실은 것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다.
진실로 훌륭한 제자를 둔 스승과의 아름다운 일화이다.(끝)
-강의 :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정리 : 심상우
(9월 12일부터 매주 금요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한 강의 내용을 그대로 정리하면서 몇 가지 첨삭한 것이 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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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연재물입니다. 앞으로 동화문학에서 역사 소재로 글을 쓰는 분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배워서 남주는 것이 좋은 보시입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정리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세가 다르더니... 덕분에 복습을 제대로 합니다. 고맙습니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열심히 읽겠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심상우샘~~
아, 저도 보시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ㅎㅎ 이렇게 전파 교육하니 복습도 되고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