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무아(無我)라고 말씀 하신 이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21세기 붓다의 메시지Ⅰ‧Ⅱ》권을 쓴 것만으로도 됐다 그러셔요.
그런데 나는 가끔 이야기하지만 불교가 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도에서 힌두교한테 밀려난 이유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내가 없다고 하니까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완전히 나의 본체가 없는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내 본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니까요.
인간의 본체를 이야기하면 그건 무아(無我)에 위반이다 해서
외도 취급을 해버린다니까요.
이렇게 무아를 잘못 해석하고 있어요.
자, 부처님께서 처음 불과를 이루셔서 다섯 비구들에게
‘팔정도(八正道)’ 법문을 하셨잖아요.
‘팔정도’ 법문에서 무아를 말씀하신 거예요.
‘나는 없는 것이다.’라는 거예요. 내가 없는 거다 그거에요.
《금강경》도 그렇잖습니까? 나라는 것은 없는 거요.
그러니까 아! 나가 없다고 하니까 참 알고 싶지요. 법문 듣고 싶지요.
주~욱 말씀하신 거예요.
여러분! 나가 없다고 생각해야 되요.
이 몸뚱이를 아무리 쪼개 봐요.
아무리 쪼개어 보고 현미경 갖고 들여다봐요. 실체가 있나? 없어요.
무아라는 것은 이 현상계에서 하는 말인 거예요.
공부시키기 위해서 무아를 말씀하신 거예요.
중생심을 없애려고 무아를 말씀하신 거예요.
업을 짓는 이유는 탐ㆍ진ㆍ치예요. 삼독의 번뇌예요.
이것들로 해서 우리가 업을 짓거든요.
짓는데, 요놈은 어디서 오느냐?
나(我)라는 생각에서 오는 거예요.
이 몸뚱이가 나(我)다 그거요.
중생들은 내 생명 전부가 나(我)라고 생각해요. 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몸뚱이가 있는 한 나(我)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있다고 하고, ‘이 몸뚱이가 내 것이다.’라고 하니까
여기서부터 욕심이 생긴다고요.
그래서 무아(無我)를 말씀하신 거예요.
이게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이어요.
정견. 현상계의 속성은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이어요.
그러니 탐진치 삼독이 업의 원인이 되니까
팔정도에 신(身)ㆍ구(口)ㆍ의(意) 삼업(三業)으로 업을 짓지 말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내려가잖아요.
그러면서 정(定)ㆍ선정(禪定)을 익히고,
그러면 지혜가 오고, 더 정진해가면 아라한이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의 불교는 아라한 공부예요.
지금까지는 아라한이 되는 공부라고요.
모든 종교가 거기까지예요.
그런데 사실 아라한이 불교 수행의 목표가 아니어요.
불교 수행의 목표는 붓다예요.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는 것이 불교 수행의 목표예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불교는 아라한이 되는 거예요.
거기서 끝나버린 거예요.
현지사에선 보살ㆍ아라한으로 만족하지 않아요.
아라한 가지고는 완벽한 것이 아니어요.
아라한이 다시 사람 몸 받아와서 많이 실수해요.
전생에 악연을 만나면 꼭 업을 짓더라고요.
우리 땡삐가 그래서 이렇게 온 거예요.
개의 몸을 받은 거예요. 아라한은 그래요. 장담 못 해요.
완전히 삼계를 탈출하려면 보살과 얻어서 극락왕생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붓다가 목표지만 붓다는 너무도 거리가 머니까
우선 보살이 되라는 거예요.
출처:2013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