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 전미경
땅은 또 하나의 우주다. 지축의 삐거덕거림이 응축된 압력을 분해시키면서 밀도 높은 땅의 몸짓에 작은 틈을 허락한다. 땅 속 어둠의 세계에서 숭고한 한 알의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다. 땅은 맨몸으로 자신을 내어줄 뿐 대가를 모른다. 소박한 성품 하나로 올곧은 길만을 고집한다. 욕심을 부려 넘치거나 지혜롭지 못해 모자라는 일 없이 자신이 담을 양만큼만 수용의 진리를 담는다. 거짓 모르는 땅은 허물도 숨김없이 펼친다. 자연과의 교감은 비우고 내려놓기의 연습이다. 땅의 심지가 축적해 놓은 틈은 자신을 열어 생명을 이어간다.
지나친 염려 때문이었을까. 갇힌 틀 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생각마저도 주위만 맴돌 뿐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정형화된 아이들의 생활이 어쩌면 부모 훈련이 부족한 나의 탓인지도 모른다. 늘 차려진 일정에 따라 똑딱이는 시계바늘처럼 한 바퀴 돌고 또다시 그 자리에서 멈춘다. 아이들과 소통되지 않는 틈 사이로 말 없는 대화가 오고 간다.
나는 아이들에게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해진 기준에 맞게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되기를 바랐다. 구체적인 것을 하나 둘 풀어내는 귀납보다는 답을 설정해 놓고 원리를 이끄는 연역적 사고를 강요했다. 잘한 것에 대한 칭찬보다는 잘못된 것에 대한 지적이 좀 더 친숙했는지도 모른다. 어섯한 등 뒤로 아이들의 시선이 고정된다. 밀도 높은 언어보다는 유연한 말 한 마디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팽팽한 긴장의 줄다리기에서 따뜻한 소통을 어미에게 기대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연의 경이로움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주고자 외출을 서둘렀다. 들녘에 기웃거리는 바람의 기척에 가슴을 열고, 가지 끝 얇은 핏줄에서 뜀박질하는 나무의 심장을 듣기 위해 시골마을을 찾았다. 아이들 스스로 피동에서 벗어난 능동적인 사유를 걸치게 하고 싶었다. 그동안 아이들과의 벌어진 틈을 좁혀보고 싶은 욕심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작은 도시생활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시골체험은 공기와 물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특별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심으로 이해를 구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생명이 깃들어 자연과 화합을 이룬다는 순리보다는 완성된 놀이나 기다림 없는 답을 기대했다. 시골의 현대 문명은 논두렁 밭두렁으로 이어진 길목마다에 편리함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도농의 틈이 메워지는 순간이었다.
주변에 눈을 돌려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을 정하고 아이들의 움직임을 따랐다. 드넓게 펼쳐진 평야에서 제각각 시나리오를 쓰듯 아이들은 그렇게 자연 속으로 동화되어 갔다. 나비를 만나 웃음을 짓고, 무명의 풀꽃을 쓰다듬으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자연과 하나 되어 가는 거짓 없고 꾸밈없는 모습에서 변형되지 않은 진실을 만날 수 있었다.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틈이 주춧돌의 역할을 한 셈이다. 미세한 틈이 견고한 나사처럼 봉합의 시간을 불러들인다.
빈 가지에 순이 돋을 때마다 아파해야 했던 나무의 떨림은 자신을 열어 그 틈새로 바람을 맞이한다. 뒤척이며 가슴을 쥐어짜면서도 채울 것과 남길 것의 등식을 가늠할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었다. 아이들과 나 사이의 틈에서도 그동안 보이지 않던 광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성질의 특징을 가지면서도 한데 어우러진 암석처럼 아이들은 각각의 존재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 틈은 메워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징검다리 역할이기도 했다.
아이들과 자연 생태체험을 하면서 지렁이의 꿈틀거림을 살피고, 이름 없는 외로움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들풀의 강인한 생명을 만났다. 자연친화적 생태계의 산실인 지렁이와의 만남은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서두르지 않는 시간을 끌어다 놓는다. 지렁이는 땅속 자신의 보금자리에 구멍을 파고 밑바닥의 흙을 삼키면서 혼신의 힘으로 땅을 일군다. 땅의 기운으로 다져진 단단한 자연의 작은 틈새로 유기물을 영양분으로 이용하기 위해 느릿느릿한 걸음을 옮긴다. 환경오염을 줄이고, 기름진 땅을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고자 쉼 없이 땅의 기적을 만들어간다. 지렁이가 지나는 길을 살펴보니 자연 생태계의 보전을 위한 노력에 숙연함이 와닿는다.
고뇌의 긴 터널을 지난 때문일까. 교감으로 형성된 생명,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실의 통로에서 민들레의 웃음을 만났다. 겉껍질에 싸여 속살의 깊이를 알 수 없었던 우둔함, 아이들과의 보이지 않는 틈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할 일이다. 틈은 벌어진 간격이 아닌 또 하나의 연결고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시멘트로 단장된 담벼락 밑, 균열이 간 곳곳마다에 덧칠된 문명의 윤곽이 틈을 메우고 있었다. 빗방울조차 스며들기 힘든 미세한 틈새로 민들레가 배시시 노란 웃음을 던진다. 숨 쉴 여유마저 봉합된 자리에서 생명의 부름이란 환영에 불과했다. 비집을 데 없는 그 작은 틈새로도 자연과의 교감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인한 생명의 줄기에 붙은 씨앗은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간 절망의 시간 속으로 사랑의 입김을 씌워 생명을 틔워낸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삶이 조화롭지 못해 불균형을 이룰 때면 작은 틈은 자리를 양보한다. 문명의 밀집을 뚫고 올라온 민들레는 존재의 가치를 넘어 생명의 전령사로 부름을 다한다. 민들레 홀씨 되어 흩날리는 날이면 가녀린 씨앗으로 소외된 곳에 뿌리를 내린다. 각지고 모난 공간에서 피어나는 민들레의 영토는 헤아리기 어려운 작은 틈새다. 좁은 공간을 비집고 올라온 생명의 위대한 탄생이 불가능 없는 현실을 만들었다. 민들레의 생명을 보면서 힘들 때마다 탈출구를 찾았던 지난날들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지친 해가 고개 떨구도록 들녘을 거닐던 아이들이 민들레를 발견한다. 생명이 자랄 공간이라고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딱딱한 시멘트 바닥을 이리저리 살핀다. 막내 녀석이 틈을 발견한다. 과학의 발달 앞에 지치지 않는 질긴 생명을 보면서 무슨 비밀이라도 찾은 듯 의기양양하다. 민들레의 생명을 부여잡은 틈새에 내린 뿌리가 갇힌 사고를 허물리라는 기대를 얹는다.
틈은 의사소통의 저장고다. 넘치는 기운의 소모를 막고 불평을 잠재우며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한다. 사춤 치는 일에 들어선 여유다. 소멸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민들레의 웃음이 틈새 우주에서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