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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음에 처하라
잠 25:1-7
1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3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4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5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6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7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잠 25:1-7 / [두번째 솔로몬 잠언 모음; 25:1-30:33] 다음에 이어지는 잠언도 솔로몬이 지은 것이다. 유다 왕 히스기야 때 왕실에서 활동하던 왕실 스승들이 수집한 것이다. 2) [원수가 배를 곯거든] 우리가 하나님을 숭앙하는 것은 그분이 세상만사를 오묘하게 만드신 까닭이요, 우리가 임금을 존중하는 것은 그가 세상 돌아가는 온갖 일을 일일이 헤아리며 돌보기 때문이다. 3) 하늘이 하도 높아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듯이, 땅이 하도 깊어 그 밑바닥이 어디인지 알 수 없듯이, 임금의 마음도 그와 같아 그 뜻을 헤아릴 수 없다. 4) 은에서 더러운 찌꺼기를 제거하여라. 그리하면 은장이가 그 은으로 쓸 만한 그릇을 만들 것이다. 5) 임금 곁에서 간신배들을 제거하여라. 그래야 임금이 정의로 나라를 다스릴 게 아니냐? 그래야 임금의 자리가 든든히 설 게 아니냐? 6) 임금 앞에서 난 체하지 말아라. 높은 지위에 앉아 있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아라. 7) `아니, 이런 자리에 감히 올라앉다니!' 하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로 좀 올라와 앉게!' 하는 말을 듣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잠언 25-29장은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전해 내려오던 솔로몬의 잠언을 편집한 잠언 선집입니다. 그 내용은 일상생활에서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솔로몬 잠언(1)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아들로서 25세에 왕위에 올라 29년간 유다를 다스린 왕입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으며(대하 29:2-11), 하나님의 은혜로 15년간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왕하 20:1, 6). 사실 솔로몬은 3천 개의 잠언을 말한 바 있기에(왕상 4:32) 그의 잠언은 성경에 수록된 것 외에도 많았을 것입니다. 본 절은 종교개혁을 한 히스기야 왕이 자기의 신하들에게 솔로몬의 잠언을 수집하여 정리하도록 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왕과 관련한 교훈(2-7)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이고, 일을 밝히 드러내는 것은 왕의 영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일을 숨긴다는 것은 누구도 알 수 없도록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너무 오묘하고 신비하여 인간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왕은 백성의 최고 통치자로서 그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해결하여 평안하게 살게 할 의무가 있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 드러내는 게 영화라고 했습니다. 이는 일반 백성들이 왕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심성이 깊고, 뛰어난 지략으로 통치하는 현명한 왕이 되어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은(silver)은 당시 가장 많이 사용한 귀금속 중 하나입니다. 당시 불순물을 제거한 은은 장신구나 성막의 기물을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왕도 불순물과 같은 악한 자 곧 간신을 제거하여 왕위를 공의 위에 든든하게 세우라고 했습니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리로 올라오라’라고 듣는 것이 ‘저리로 내려가라’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무례한 처신에 대한 경고이며, 겸손하라는 권고입니다.
적용: 은에 함유된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용광로에 넣어 제련합니다. 요즘 하나님이 당신 안에 있는 어떤 찌꺼기를 없애려고 연단하고 있는가를 나누어 봅시다.
로마제국 말기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광활한 태양과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경탄하면서 정작 가장 경탄해야 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탄하지 않는다." 이 말은 산, 바다, 태양, 별들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바로 우리가 가장 귀한 걸작품이라는 말입니다.
< 설 교 >
하나님 앞에서
잠언 25장 1-7절 / 제임스 김 목사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였던 칼빈(Calvin)의 일생을 지배했던 중요한 삶의 좌우명가운데 하나가 바로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입니다. 코람 데오란 라틴어로 ‘Coram’ 즉 ‘앞에’라는 뜻과 ‘Deo’ 즉 ‘하나님’을 뜻하는 두 단어가 합해져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영어로는 ‘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람 앞에서(coram hominibus)' 잘보이고 '세상 앞에서(coram mundo)' 명예롭고 잘 살기 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을 구하며(롬12;2)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부패가 극에 달했던 16세기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가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아래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의 방식을 요약했던 말입니다. 아울러 이 말은 동시대 개신교를 탄생시킨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내세웠던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만)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 Sola Gratia(오직 은혜로만)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라는 다섯 가지 슬로건의 기초가 되었습니다(인터넷).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코람데오 신앙생활'은 '하나님 주의'-하나님의 관점에서 늘 내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동일한 믿음을 지켜나가는 삶일 것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25장 5절과 6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왕 앞에서”(in the presence of the king)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교훈의 말씀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생각해 볼 때 왕중의 왕이신“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 받은 교훈을 적용하여 실천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이유는 오늘 본문 2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하나님과 왕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절을 보십시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무슨 뜻입니까? 먼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라고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는데 그 뜻은 무엇입니까? 그 뜻은 모든 사람의 지식보다 더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계시되 우리 인간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지식(시92:5; 전3:11)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헤아릴 수 없으신 하나님(욥5:9; 시145:3)은 어느 누구에게도 조언(counsel)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기에 일을 숨기신다는 말입니다(MacArthur). 예를 들어 욥기 5장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Who does great and unsearchable things, Wonders without number (NASB)].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 모든 고난을 겪게 허락하셨는지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충분히 헤아릴 수가 있나요? 과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나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34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새찬송가 620장 3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주님의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
여러분, 어느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헤아릴 수)가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명철이 한이 없으신(사40:28)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시145: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일을 숨기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일들을 자신에게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화입니다(잠25:2). 그러나 왕은 어떻습니까? 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25장 2절 하반절에서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고 말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왕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세움을 받은 왕으로서 한 나라(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를 올바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들을 알고자 살펴야(찾아보아야)하기(search) 때문입니다(MacArthur). 그 한 예로 다윗 왕과 그의 아들 솔로몬을 들 수가 있습니다. 역대상 22장 12절을 보면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왜 아버지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길 기도했습니까? 그 이유는 솔로몬이 자기를 이어 왕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를 잘 다스리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이 된 후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대하1:7)고 말씀하셨을 때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wisdom and knowledge)을 주시길 구했습니다(10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나 “장수”를 구하지 않고(11절) “지혜와 지식”을 구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사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11절). 결국 솔로몬이 지혜와 지식을 구한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셔서(왕상3:10)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12절). 그리고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창기 두 여자의 재판을 잘 심리하여 판결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 왕의 속에 있어 바로 판결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 하였습니다(28절). 이렇게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잘 재판하고 잘 다스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이렇게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입니다(잠25:2). 이렇게 일을 살피는 왕의 마음은 오늘 본문 잠언 25장 3절을 보면 마치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고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마치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지식을 왕에게 알려(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숨기시듯이 왕도 그의 사람들에게 어떤 지식은 헤아릴 수 없도록(unsearchable) 숨긴다는 말입니다(Walvoord).
그러면 이러한 왕 앞에서 무엇을 하라고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까? 한 2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이 두 교훈을 겸손히 받아 우리가 왕중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4-5절을 보십시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여러분, 은에서 찌꺼기를 어떻게 제하는 줄 대충 아시죠? 은을 용광로에 넣고 높은 열을 가하여 불순물인 찌꺼기를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순물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은을 얻으려면 여러 번 높은 열로 제련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대장장이는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높은 열과 싸우고 수많은 땀을을 흘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원하는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인터넷). 성경 잠언 17장 3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마치 대장장이가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여러 번 높은 열로 은을 제련하듯이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고자 “고난의 풀무 불”(사48:10)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육신적이고 이 땅에 속한 더러운 것들이 불순물처럼 들어 있을 때에 우리들로부터 이러한 것들을 제하고 이에 대하여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연단의 불인 시련과 고난을 격도록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인터넷). 그 좋은 예가 바로 구약 욥기에 나오는 욥입니다. 욥기 23장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시려고 우리를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25장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무슨 뜻입니까? 쓸 만한 그릇이 되게 하시고자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결국에는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까? 디모데후서 2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시키셔서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5절 상반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이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고 명하고 있는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바로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5절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왕의 신하들 중 악한자들이 득실거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왕위가 견고히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한국 사극 드라마를 보다보면 힘이 없고 연약해 보이는 왕 밑에 신하들이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을 종종 보곤 합니다. 즉, 그 중에는 충성된 신하들도 있지만 악한 신하들이 있어서 간교하게 행하여 권력을 최대한 키워서 왕까지 컨트롤 하여 왕으로 하여금 나라를 바로 치리하지 못하게 제지하는 면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공자는 간신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구분했다고 합니다(인터넷): “마음을 반대로 먹고 있는 음험한 자, 말에 사기성이 농후한데 달변인 자, 행동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고집만 센 자, 뜻은 어리석으면서 지식만 많은 자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며 해택만 누리는 자.” 만일 이러한 여러 유형의 간신들이 득실거린다면 그 왕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늙고 교활한 간신배들에게 권력을 농락당하여 결국 부정부태가 성행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25장 5절에서 솔로몬 은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16장 12절 상반절을 보면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바니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지혜로운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미워합니다(8:13).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이 악을 행하는 것도 경계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고 그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신하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악한 신하들을 제거합니다. 특히 그는 자기 신하들 중에 간사한 악인들을 제하여 버립니다. 그 이유는 만일 그 간신들을 제하여 버리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해가 된다는 것은 그 나라에 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왕은 단호하게 간신들을 척결합니다. 그리하므로 그는 자신의 왕위(보좌)를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견고히) 서있게 합니다(16:12b). 그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왕은 자신의 왕위를 견고히 서있게 하고자 충성된 신하들을 자기 옆에 둡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충고를 잘 받습니다. 잠언 16장 13절을 보십시오: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여기서 “정직하게 말하는 자”나 “의로운 입술”은 충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충신은 왕에게 정직하게 말한다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왕은 이러한 충신들을 자기 옆에 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충고를 듣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충신들의 입술은 “의로운 입술”이요 그들의 입술에서는 정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16:13).
저는 이 교훈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악을 제거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거해야 할 악중에 하나는 바로 우상입니다. 마치 사무엘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긴 것처럼(삼상7:4) 우리도 재물이던 무엇이던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 만을 섬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거해야 할 악은 바로 “굳은 마음”(heart of stone)입니다. 성경 에스겔 36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새 영을 우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우리에게 주되 우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참고: 겔11:19).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부지런히 우리의 마음을 기경해야 합니다 (겔32:34). 우리의 강퍅한 마음, 단단한 마음을 방망이와 같은 말씀으로 부서트려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노력이 쉽지는 않습니다. 마치 저희 집 잔디에 물을 주고 짤라주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것처럼 마음을 기경하기 위해서는 말씀과의 씨름에 애써야 합니다. 애쓰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기도하는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32:37).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마음의 죄를 부끄러워해야 하며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야 하며 황무한 땅과 같은 마음을 부지런히 기경하여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불의”(all our sins)를 제거해야 합니다(호14:2).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함이 없으십니다(대하19:7).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딤후2:19).
마지막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6절을 보십시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여러분, 혹시 여러분 앞에서 잘난체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만일 있으셨다면, 그 상대방에 여러분 앞에서 잘난체를 할 때 기분이 어떻했습니까? 어느 인터넷 글을 보닌까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난척 심한 사람 옆에 있으면 참 피곤합니다. 끝도 없이 자화자찬을 듣노라면 피로가 몰려오고, 때로는 울컥 울컥 짜증도 납니다. ‘제발 그만해. 너 혼자 잘난 너만의 섬으로 돌아가 버리라’고 하고픈 마음이 목구멍 위로 스물스물 올라옵니다”(인터넷). 왜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난척을 하는 것일까요? 그 심리는 겉보기에는 잘난 척을 하닌까 자신감이 많아 보이는데, 어쩌면 실제로는 누구보다 겁이 많고 자신감도 없고 또한 자격지심이 커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에 자꾸만 타인의 입을 통해서 확인을 받고 또한 인정을 받고 싶어서 잘난 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인터넷). 그리고 우리가 잘난체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그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눌려서 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인터넷). 그러면 왜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높은체 하는 것일까요? 성경 잠언 12장 9절을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비천이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현대인의 성경) “보잘 것없는 사람이라도 종을 거느린 자는 잘난 체하면서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보다 낫다”]. 여기서 ‘비천이 여김을 받을지라도’란 말씀은 남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겸허한 위치에 두며 결코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는 생활 자세를 가리킵니다(삼상18:23, Delitzsch). 이러한 비천이 여김을 받는 자가 종을 부린다는 말은 자신을 섬기는 종을 부릴만한 지위와 여력을 가졌다는 말입니다(Delitzsch). 이러한 자가 스스로 높은체 하지만 음식이 핍절한 자, 곧 절대적 빈곤해 처한 자보다 더 낫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높은체하고”는 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자를 말합니다(Fleisher)(인터넷). 이 말씀을 보면 왜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높은체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을 남들 앞에서 내세우고 싶은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가진 것도 없이 절대적으로 빈곤해 처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소유한 것처럼 내세우고 싶어하는 것이 좀 웃기지 않습니까? 내용은 별로 없는데 사람들 보이기에는 뭔가가 많이 있는 것처럼 너무나 지나치게 겉모양을 꾸미는 것은 비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게 덕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 잠언 30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체 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현대인의 성경) “네가 만일 미련하게도 잘난 체하였거나 악한 일을 계획했다면 네 손으로 입을 막아라”]. 성경은 스스로 높은체 하는 자는 미련하다 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미련합니까? 시편 14장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 스스로 높은체 하는 자가 미련한 이유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시편 10장 4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결국, 스스로 높은체 하는 자는 미련할 뿐만 아니라 교만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6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새번역)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높은 사람의 자리에 끼여들지 말아라”].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제가 한국에서 사역을 배울 때에 경험한 두 가지 일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는, 담임 목사님과 부목사님들과 함께 교회 성도님 부부의 집에 심방을 좇아갔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담임 목사님이 소파에 앉으시닌까 그 옆으로 수석 부목사님, 그리고 순서대로 앉느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그 때 저는 부엌 식탁 의자에 앉았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 정문에서 교역자들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담임 목사님이 자기 바로 옆에 서 있는 교육 전도사님에게 저 쪽으로 가라는 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아마 사진을 찍을 때도 서열(?)로 찍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잠언 25장 6절에서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여러분, 좀 상상이 되십니까? 스스로 높은체(잘난체)하면서 높은 정치인들이 앉는 자리에 우리도 끼어 앉아 있다가 그 정치인들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이 자리는 당신이 앉을 자리가 아니오, 저리로 내려가서 앉으시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챙피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우리가 그 정치인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므로 밑에 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 정치인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리로 올라와 앉으세요’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도 비슷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 누가복음 14장 8-10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복음성가 중 “주님 앞에 섭니다”란 찬양이 있어 그 가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 앞에 섭니다 거룩하신 나의 주 주를 경배합니다. 주 앞에 무릎 꿇고 그 얼굴 구할 때 내 앞에 오신 주님 나를 만지시네. 주 앞에 무릎 꿇고 그 자비 구할 때 내 앞에 오신 주님 날 새롭게 하네. 변함없는 주의 사랑 나의 모든 아픔 눈물 씻으시네. 주의 손 날 붙드시니 이제 내가 일어나 주를 경배합니다”(인터넷). 여러분,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완전히 제거해 주시사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을 입게 하시어 우리를 영원한 하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천국 보좌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를 찬양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함께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 주셨네 그의 피로 우린 구원받았네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 강 같이 온 땅에 흘러
각 나라와 족속 백성 방언에서 구원받고 주 경배 드리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사람 앞에서와 세상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10월 30일, 교만을 제거하는 삶을 추구하면서)
왕과 신하
잠 25:1-7
오늘 본문도 솔로몬의 잠언인데, 유다와 히스가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왕의 역할과 그 왕을 섬기는 신하들에 관한 잠언입니다.
먼저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여기서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많은 부분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숨겨지고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잘 살피는 것이 왕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왕이 진정한 통치자입니까?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서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는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이렇게 감추어지고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서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는 지도자의 마음은 하늘과 높음과 땅의 깊음과 같이 잘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지도자들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또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이해를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지도자이 마음은 백성들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정말 하나님의 깊은 뜻을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은 백성들이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순종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4절과 5절은 왕이 어떤 신하들을 두어야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고 합니다.
이것은 5절과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는 말은 5절에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는 말씀입니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해야 쓸 만한 그릇이 나오는 것처럼 왕 앞에 악한 신하를 제해야합니다.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통해서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무조건 아부만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결국 대통령의 눈과 귀를 멀게 해서 대통령을 위태롭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불의한 신하를 둔 정권은 그 자체가 불의함으로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불의한 신하들을 제해야하지만, 그 공통체가 의로 말미암아 견곤히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6절과 7절은 왕 앞에 신하들이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6.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왕 즉 지도자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지도자 앞에서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대인들의 자리란 높은 위치를 말합니다.
지도자는 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을 면밀히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높이는 자입니다. 또 더 높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절대 지도자의 신임을 받지 못합니다.
구약시대 왕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은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떠해야하는지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높이는 자를 하나님이 낮추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높이 되고자 하면 낮은 자리에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입니다.
그래서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이는”은 왕 앞에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고,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야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만일 우리가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으면 도리어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낮은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이 도리어 이리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스스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저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도리어 낮은 자리에 있다고 높은 자리로 올라오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든지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자신을 높이면 하나님께서는 낮추십니다.
오늘도 이 말씀처럼 스스로 높이 되려고 하다가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고,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이 높여주시는 지혜로운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왕 앞에서
잠언 25:1~10 / 이장우 목사
본문 1절을 봅니다.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란 25장부터 29장까지도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합니다. 앞의 내용들도 솔로몬의 잠언인데 왜 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편집이라는 단어를 읽으면 불편하게 여깁니다. 편집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이유는 성경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랜 세월동안 필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때는 같은 본문인데 숫자가 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그 이유는 최대한 원문 그대로 보관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약 천 오백 년 동안 약 40명에 의하여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런 책은 세상에 없는 책입니다. 그런데도 이 오랜 기간 여러 사람의 글들이 한 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다는 것이 참으로 기적입니다(요5:39). 에스더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성경 본문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심을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경의 자증성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성경 스스로 증거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시입니다. 알려줄 자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4:32절입니다. “그가 잠언 삼천 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다섯 편이며” 솔로몬이 얼마나 엄청난 지혜를 받았는지를 말하면서 잠언 삼천 가지와 노래 천 다섯 편이라고 합니다. 그 모든 내용들이 다 성경에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솔로몬 사후 약 250년이 지나서 히스기야 왕 때에 왕의 신하들이 솔로몬의 잠언을 여기에 함께 편집해 넣은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감동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딤후3:16). 그러므로 성경은 사사로이 풀면 안 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전한 것입니다(벧후1:20,21).
본문 2~3절입니다. 함께 읽은 것은 개역개정이기에 제가 다시 읽는 것은 새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일을 밝히 드러내는 것은 왕의 영광이다. 하늘이 높고 땅이 깊은 것처럼, 왕의 마음도 헤아리기 어렵다.” 오늘 제목이 ‘왕 앞에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왕을 대비하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자기의 뜻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왕의 지혜는 일반 백성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지혜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왕에게 지혜를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재판에서 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방금 본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을 숨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왕은 일을 밝히는 것이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높고 땅이 깊은 것처럼, 왕의 마음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왕의 마음도 하늘이 높고 땅이 깊은 것처럼 헤아리기가 어려운데 감히 여호와 하나님의 그 광대하심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려 알 수가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사45:15). 스스로 숨어계신다는 말씀은 인간이 헤아려 알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서 알게 함’ 정의를 잘 내렸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내가 그를 파악하고 다루기 위하여 대상을 알려고 합니다. 새로운 기계를 사면 그것을 잘 알아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설명서를 읽어봐야 합니다. 그렇게 대상을 알고 파악하는 이유는 경배하고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인간들은 하나님조차 내가 파악하여 내 손아귀에 쥐려고 하는 악한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은 모든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보고 설교를 듣습니까?
차재승 교수가 한 말이 있습니다. 목사이며 신학교 교수의 아들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사업도 하였지만 근원적인 갈망이 해결되지 않아서 외국에서 신학대학원 과정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일 년 동안 무수한 질문을 교수에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교수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경배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하더랍니다. 여기에 무언가 더 있다고 생각하여 공부를 하던 중에 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보다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천착하여 신학을 전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과 7인의 십자가 사상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하여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로 연구하면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요? 신경과학자 다니엘 레빈턴 이라는 사람이 연구하여 발표한 내용인데 어느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일만 시간을 연습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일만 시간이라면 하루에 세 시간씩 십년을 투자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만 시간이 아니라 일만 년을 연구하여도 하나님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만큼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 교수는 평생 십자가만 연구한 사람이라도, 그 십자가 앞에서는 무너져 내리는 것이 십자가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경우를 보면 신학교가면서부터 지금까지 약 30년간 하루에 세 시간은 넘게 성경과 성경에 관련된 공부를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설교준비하려고 성경을 펼치면 앞이 캄캄해집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지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 그리스도로 연결되는 부분이 겨우 보이면 너무나 기쁩니다. 그런데 막상 원고를 작성하려고 다시 성경을 보고 주석들을 보면 아닌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힘이 듭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에는 전문가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완성되고 2천년이 지났지만 성경은 여전히 사람의 손에 다 파악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는 말처럼 내가 성경을 알아서 이용하려고 한다면 성경은 스스로 감추어집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로 재판을 했을 때에 백성들이 왕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지혜로 인하여 왕을 두려워합니다만 그런 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솔로몬도 감히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11:33절에서 이렇게 찬송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런데 그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십자가에 담아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지혜로는 결코 찾을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바울은 기도한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 성경을 보면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소망이 무엇인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일하심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의 일하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며 여기에 성도를 참여시킨 것입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은에서 찌꺼기를 없애라. 그래야 은장색의 손에서 그릇이 되어 나온다. 왕 앞에서는 악한 사람을 없애라. 그래야 왕위가 공의 위에 굳게 선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거 하듯이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없애라고 합니다. 그래야 왕위가 공의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는 세상의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는 간사한 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향하여 네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지만 자기들 중심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 간사한 것입니다.
본문 6~7절과 같은 내용을 누가복음 14:7~11절에서 봅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잠언서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잠언도 결국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골1:15,16, 벧전1:10,11). 예수님께서 잔치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잠언의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이 말씀이 잠언에 나오는 내용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어려부터 배우고 익혀 오지만 그들의 본성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기를 높이기 위하여 살아갑니까? 자기를 낮추기 위하여 살아갑니까? 그런데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인이 나를 높은 자리에 올려줄 것을 계산하고 낮은 자리에 앉아있는 자라면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잔치자리에서 쫓겨날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본성입니다. 아이들 성적, 남편의 월급, 회사의 성장, 교회의 성장, 삶의 모든 영역에서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에 서로 높아지려고 따라 나섰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자기 두 아들을 좌우편에 앉게 하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마시겠다고 하였지만 그 잔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말입니다. 그저 고진감래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잔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며, 높아지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끌고 가십니다. 그 길은 자기 부인의 십자가라는 길입니다.
본문 8~10절입니다. “8 너는 급하게 소송하지 말아라. 훗날에 너의 이웃이 너를 이겨 부끄럽게 만들 때에, 네가 어떻게 할지가 염려된다. 9 이웃과 다툴 일이 있으면 그와 직접 변론만 하고, 그의 비밀을 퍼뜨리지 말아라. 10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오히려 너를 비난하면, 그 나쁜 소문이 너에게서 떠나지 않고 따라다닐까 두렵다.”
소송도 왕 앞에서 하는 것이기에 함께 살펴봅니다. 급하게 소송을 하고 보니 자신이 잘못한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과 다툼이 일어나면 그와 직접 변론하고 그의 비밀을 퍼뜨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송이 붙으면 두 사람의 비밀이든지, 아니면 제 삼자가 제공한 비밀이든지 자기 소송에 유리하게 하려고 그 비밀을 공개해 버린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너를 비난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나쁜 평이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나 우리나라는 체면문화가 강합니다. 그러므로 악평은 물질적 손해보다 더 힘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6~7절입니다.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러한 신약의 시각은 말세에 부어진 성령으로 인한 것입니다. 성령은 종말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는 세상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면서 살아갑니다. 종말의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만 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 앞에 지금 살고 있으며 장차 그 앞에 설 것을 믿고 삽니다.
디모데전서 6:15~16절입니다.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오늘 잠언의 본문은 왕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왕정제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장차 나타날 만왕의 왕 앞에서 설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 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지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라고 하십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이 않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을 누가 계시하여 주셨습니까? 이 하나님을 계시하신 분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만 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가 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받으실 칭호를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동일한 칭호를 받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14절입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어린 양이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9:16절에서도 백마 타신 분의 이름이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 앞에서 살아갑니다. 그 분이 지금 우리 안에 영으로 계실뿐만 아니라 장차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을 믿고 사는 자들이 왕 앞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디모데전서 6:3~5절입니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1)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바른 말, 바른 복음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6~10절입니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왕 앞에 산다는 것은 자족함이 있는지 자기 욕망으로 사는 지로 구별됩니다.
11~14절입니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 15~16절의 앞뒤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자족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왕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시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소망하면서 살아갑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우리 안에 영으로 임하였습니다. 그런 자들은 왕 앞에서, 장차 타나나실 왕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잠언 25:1-4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하루를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부터는 잠언 25장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언 25장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앞으로 나오게 될 말씀들이 솔로몬 왕의 잠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솔로몬 왕이 직접 기록한 원본 아니라, 먼 훗날 히스기야 왕의 사람들이 손으로 베껴서 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기록하신 원본만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이 옮겨 적어놓은 복사본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확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성경책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처음에 기록하신 것과 같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잠언 25장 2절의 말씀을 살펴보시겠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또 문제를 찾아내는 것은 왕들의 영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숨기시지만, 오직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그것을 발견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쉽게 알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들을 감추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내고 발견해내고 알아냅니다. 성경은 그것을 왕들의 영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감추어놓으신 진리와 신비를 알 수 있을까요? 잠시 잠언 2장 4,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우리가 감추어진 보화들을 찾는 것 같이 지혜를 찾으면,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아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우리의 영예, 영광과 명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찾지 않는다면 찾을 수 없을 것이지만, 부지런히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발견하게 하실 것입니다.
잠언 25장으로 돌아오셔서 3절 말씀을 살펴보시겠습니다.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과 왕들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옛말에도 열 길 우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높이와 땅의 깊이와 왕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앞서 살펴본 말씀과 같이 감추어진 보화를 찾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찾을 때에만이 발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듣고, 믿음의 삶을 대충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믿음을 배우는 면에서는 반드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간절히 찾는 자만이 주님의 뜻을 알고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4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에서 찌꺼기를 제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정련공을 위한 그릇이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은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은과 같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은과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은에서 찌꺼기를 제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찌꺼기란 주님 앞에 가치가 없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하늘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서 찌꺼기를 제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정련공을 위한 그릇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자주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릇으로서 진리를 담고, 보배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찌꺼기를 제거한다면, 주님을 위한 깨끗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주님 안에 감추어진 지혜의 보화를 발견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하고,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찌꺼기를 제거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관계 속 자연스러움
잠언 25:1-13
2020년 끝자락에서 시간을 내어 그간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 짤막하게나마 송구영신 인사를 건넸습니다. 길어야 1분이면 손전화기 혹은 컴퓨터 자판을 활용하여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사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더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함께 드류에서 공부했던 한 형과 연락이 닿아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형은 드류에서 공부할 때부터 아이를 가지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아 아이를 가진 주변 사람들 모두 조심스럽게 형 내외를 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목회학 박사 과정을 끝낸 형은 한국을 떠났을 때 품었던 마음 그대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한국에 두 발을 내디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님의 부인은 친구 권유에 힘입어 난임 시술로 유명한 산부인과를 찾아갔습니다. 몇 가지 검사 후 난임의 원인이 밝혀졌고, 형님과 형수님은 시험관 아기를 시도했습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고, 10개월 후 첫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늦둥이로 마주하게 된 아기가 너무 예뻐, 두 분은 시험관 아기에 다시 도전했고, 이번에도 첫 번째 시도에서 성공하여 10개월 후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잠언서 25장을 읽고 나서 뜬금없이 제가 아는 한 형님의 시험관 아기 도전기에 관해 말하는 이유는 잠언서 25장을 읽고 성도님들과 나눌 제 생각의 꼬리를 따라다는데 중에 그 형님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얼마 전 함께 모인 자리에서 그 형님은 살며시 난임 혹은 불임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거 같다는 의사를 넌지시 내비쳤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우주만물의 운행 질서를 주관하신다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에게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한평생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젯거리는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맞아떨어지기기 너무 힘들다는 사실이지요. 한국에서 미국까지 날아와 7, 8년 간 열심히 공부하며 가족계획 또한 실천에 옮기려고 할 때는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건 아닌가보다'라고 마음을 정리하려던 찰나에 예상 밖의 일이 현실에 떨어졌던 거죠. 우리 모두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그렇게도 바랄 때는 결단코 손안에 들어오지 않더니만, 이건 아닌가보다 하고 움켜쥐었던 손에 힘을 빼는 순간 소리 소문도 없이 그렇게도 바랐던 게 손에 쥐어질 때가 있지요?
오늘 함께 읽은 잠언서는 전 세월이 무르익어감과 더불어 그 깊이와 넓이가 늘어가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는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던 말이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이해가 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아하! 이걸 그때 알고 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 또한 자아내는 책입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책을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책이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하나님의 뜻과 바람이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전달되었고, 이를 글로 옮겨 편집한 결과물이 성경책이란 걸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계시(啓示) 라는 단어의 뜻은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가르쳐 알게 함'입니다. 성경책이 하나님의 뜻과 바람을 계시한 책이라는 걸 염두에 둘 때만 우리는 잠언서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잠언서는 계시가 아닌 인간의 경험에 기반을 두어 쓰였기 때문입니다. 계시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하나님 말씀이라면 잠언서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하나님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최후의 창조물인 인간을 자연 속에 놓아 주시며, 자연을 돌보며 더불어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020년 3월에 전 세계로 확대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심각한 국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지구 온난화 현상입니다. 뉴욕 타임스에 연재된 지구 온난화에 관한 논설에 따를 때, 지금으로부터 40-50년 후에는 지구가 항상성을 완전히 상실해 자정 기능이 불가능해 질거라고 합니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미국에 사는 이 대부분은 이를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몇 개월 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코앞까지 찾아왔을 때, 미국에 사는 모든 사람은 두려움에 휩싸여 거의 모든 외출을 삼가고 살아남기 위해 집에 머물렀습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도 이와 비슷하게 진행될 거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추측입니다.
잠언서에 담긴 무수한 격언을 하나로 엮는 실타래는 “자연스러움”입니다. 한자어를 조합하여 만든 단어 자연(自然)은 명사가 아닌 동사로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진다.'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난 모세는 자기더러 이집트로 돌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라는 이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집트 사람이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답해야 합니까?” ““난 스스로 있는 존재다.”라고 답해라.” 하나님이 대답하셨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한데, 잠언서가 제시하는 방법은 자연현상을 치밀하고 철저하고 차분하게 관찰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모두 흙에서 왔고 언젠가는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걸 생각하면, 자연을 사용하여 인간이 만든 인간 사회와 관계 또한 자연이란 범주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잠언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으면 하루하루의 삶을 가볍게 대하지 말고 치밀하고, 철저하고, 차분하게 관찰하며 살아라. 자연스러운 자연현상 속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숨어 있기 때문이고, 자연스러운 인간 현상 속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움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낀 긴장감을 사라지게 해 줍니다.. 자연스러움은 거추장스러움과 의도성이 베인 허례(虛禮) 의식을(虛禮) 폭로합니다. 자연스러움은 억압, 멸시, 천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연스러움은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줍니다.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잠언서 25:8)”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지 말라. (잠언서 25:9)”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잠언서 25:13)”
지난 3년 동안 전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뉴욕 맨해튼에 있는 블랜튼-필 정신분석 훈련과정에서 공부해왔습니다. 이제 짧으면 1년, 늦으면 1년 6개월 정도 기간만 더 공부하면 졸업할 수 있는데요. 지난 3년 간 다양하고 복잡한 정신분석학 이론을 배워 알아가고, 이를 익혀 상담 중 만난 환자의 삶에 적용하는 와중에 깨달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건 건강한 삶, 한 순간 반짝하는 삶이 아닌 70년 80년 동안 계속되어야 할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건 재물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직업도 아니고, 다양한 인간관계망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사회적 권력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건 생명이 시작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존재하고,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관계'입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캇 Donald Winnicott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아기란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아기 있는 곳에 엄마가 있고, 엄마 있는 곳에 아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에는 여러분의 부모님이 있었고, 오늘 여러분의 삶은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배우자와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관계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좀체 그 소중함을 인지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이죠.
제가 참 많이 좋아했던 한국 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 선생님은 한 대담에서 자기 인생을 실패작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자기 옆에는 함께 살았고, 함께 늙은 친구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하셨죠. 힘과 권력, 재물, 이 세 가지 모두 부족함 없이 누리며 살았지만 삶의 끝자락에 섰을 때 자연스럽게 기댈 수 있는 이 하나 없는 자기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드류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형이 두 아들의 아빠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형수님의 친구가 형수님을 난임으로 힘들어하는 가족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산부인과로 데려갔기 때문이지요. 관계로 인해 기적 같은 일이 평범한 현실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여전히 공포에 잠가두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역시 관계로 인해 시작했고, 관계로 인해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하나로 엮어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역시 관계라는 사실을 오늘 이 아침에 잘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와 맺은 관계에 집중할 때, 허례의식은 버리고 자연스러움으로 정성을 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중첩되는 때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아로새긴 은 쟁반과 금 사과 같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관계론적 인식에서만 가능한 지혜입니다 (잠언서 25:11).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충성된 사자는 관계론적 접근에 의해서만 가능한 결실입니다 (잠언서 25:13). 관계 자체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린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그 누구보다 관계에 집중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잠깐 함께 나눈 말씀을 되새기면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새기는 기도
1월 15일 이른 아침에 잠언서 25장을 읽으며, 하나님 당신께서 자연 속에 숨겨두신 창조질서를 찾아내 우리 각자의 삶으로 효과적으로 옮기는 방법에 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는 잠언서 1장 7장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찾아내라고 숨겨 놓은 참살이의 소중함을 자연 속에서, 관계 속에서, 일상 속에서 찾아내며 살고 싶습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멈춰서야 할 때, 돌아갈 때와 뒤로 물러나야 할 때를 구별하는 방법이 자연스러움으로 빚어내어 소중하게 가꾸는 관계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고맙니다. 오늘 하루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 당신의 자연스러움을 닮아 자연스러움으로 우리를 대하고, 다른 이를 대하며 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성결한 자녀
새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잠언 25장 1절-14절
성결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을 하나님께 속죄제로 드림으로써 일시적으로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성결"이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율법적인 문제가 있거나 질병에서 나음을 입었을 때, 사체에 접촉했거나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성결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혹은 제사장이 성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든지 나실인이 서원한 후에도 성결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성결예식을 하였든지, 성결의 중심적인 의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준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성결, 혹은 깨끗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성결
출애굽기 28장에는, 아론이 제사장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 해야 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기 28장 36절에는,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이 패를 아론의 이마에 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패를 이마에 두르는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성물을 받으실 분은 거룩하신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헌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결"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성결은 근본적으로 "좋은 품질"을 가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선한 품질, 즉 선한 성품과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보내심을 받기 전에 환상 중에 정결함을 받았습니다. 이사야가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자라 고백하였을 때, 스랍 중에 하나가 숯을 입술에 대면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사역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찌꺼기를 제하라
오늘 본문에서도 "성결"에 대한 교훈이 나옵니다. 4절과 5절입니다.
잠언 25:4-5,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은으로 깨끗하고 온전한 그릇, 훌륭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은 속에 포함된 찌꺼기 즉 불순물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말씀합니다. 찌꺼기는 은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아무런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만 합니다.
또한 훌륭한 왕이 되어 올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서도, 신하들 중에 악한 자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합니다. 권모술수나 아첨만 하는 악한 신하를 제거할 때, 왕의 자리가 확실하게(쿤, כּוּן) 설 수 있습니다.
온전한 그릇을 만들기 위하여 재료가 되는 은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과 올바른 정치를 위하여 악한 신하를 제거하는 일들을 일컬어, "성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그릇이 되어 주인에게 사랑 받기 위하여, 훌륭한 정치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깨끗함, 성결입니다.
하나님의 성결한 자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사랑 받고 인정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삶이 "여호와 앞에 성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자녀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결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세상을 향한 깊은 사랑은 우리 신앙의 불순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자녀로 설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내 마음에, 혹은 내 생활 속에 제거해야만 하는 불순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은 삶의 모습은 없습니까? 게으르거나 완악하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든 불순물들은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 요소가 됩니다.
오늘 이 새벽에 나 자신을 조용히 돌아봅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있는 온전한 모습인지 나 자신을 살펴 봅시다.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불순물, 게으름의 불순물, 미움의 불순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정결케 해 주시길 간구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시길 간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결한 자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 주시는 즐거움과 행복이 충만한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