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외출, 차분한 귀가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 오늘에 다다른 우리사회는 아직도 미완의 문제를 간직한 채
21세기를 향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방 50년, 분단 반세기’로 표현되는 이 한해가
개인과 민족 모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각별한 의무감을 부여한다는데 있는 듯하다.
이 격동의 시기와 맞물려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는
변화를 요구하는 여기서 우리사회의 개혁과 민주주의 완성, 평화적인 통일을 준비한다는 목표로
일상적인 ‘정치운동’과 ‘국민운동“을 열어가겠다고 결성된 단체다.
그래서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청년위원회‘(이하, 국민회의 청년위)는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젊고 패기에 찬 청년들이
하나 둘 모여 만들어진 조직이라 생각한다.
그 국민회의 청년위가 지난 2월 18일 토요일 오후4시
대학로가 위치한 혜화동 서울대학병원 맞은 편 흥사단 3층에서
200여명의 회원과 내빈이 자리하여 출발을 선언했다.
그날 오전11시에 전국최초의 국민회의 지부를 탄생시킨 우리군산에서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행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쩌면 역사의 진전을 앞당길 수도 있는 유의미한 행사의 참석을 위한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출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날 옹기종기 모여앉아 마신 탓에
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의 두 눈은 부어 충혈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가고 싶다. 그래서 갔다. 왜? 피곤하기도 하지만 필요하니까.’ 라는
구색을 갖추고서 말이다.
나의 옆자리 창 측엔 가리봉동의 친척집에 간다는 군산상고 1학년에 입학한 여학생이
노래를 들으려 하는지 이어폰을 양쪽 귀에 밀어 넣고 있었다.
‘가리봉-구로’, 여기에 짙게 깔려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행색은 초라했지만 도시형 용모와 인격을 갖춘 분위기(?) 때문인지
‘아저씨, 서울 사세요.’라고 물었다.
‘아닌데.’라고 답하고 마침 매점에서 사온 음료수를 건넸다.
‘참 영민하게 생긴 학생이군.......’ 홀로 방백을 하면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쉽게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취기가 남아 머리가 아파 오고 그래서 응급조치로 마시려던 음료수를
무작정 내민 실책이 못내 허망했고
그 허울 좋은 인간애발휘의 기질을 조만간 고치지 못하는 한
결혼은커녕 재산축적(?)의 기회는 영영 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아무튼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해 4호선으로 갈아타고 혜화역에서 내렸다.
머리가 무겁거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이따금 대학로에 와 연극을 보기도하고 산책도 했던 기억이 생경스럽게 떠올랐다.
아직 쌀쌀한 날씨지만 입가의 미소는 꿈틀거리는 입김과 섞여 바람에 번지고 있었다.
‘그래, 이 맛이지! 세상을 살려면 이쯤의 멋도 있어야지.’ 하면서
흥사단을 향해 기세 올려 걸었다.
대학로주변의 숱한 발걸음들.
어디를 향해 무슨 일로 바삐 움직이는지 모르지만
이 분주한 발자취들이 ‘우리사회의 혼선 또는 다양성과 한편으로는
집중적인 활력을 토해내는 에너지구나.’라는 생각에 잠겨
사람들 속에 틈입하여 걷다보니 몸은 어느덧 행사장에 닿아있었다.
도착하여 10여분이 지나 결성대회가 시작되었다.
행사장 연단 오른쪽에는 도산 안창호선생의 초상이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국민계몽운동에 한 평생을 바친 선생의 시선이
살아있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아. 이것이 역사구나. 역사가 따로 없다.’
인간성회복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절박하게 요구하는 이 시대에
그 눈빛은 많은 것을 반성하게 하는 사자후로 나를 포박하고 있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라는
옛시조의 공허함을 뒤엎는 아이러니랄까.
그저 항시 혼탁했던 나의 영혼을 씻어주는 선생의 이미지였다.
선생의 역사적 행적과 평가가 어떻든 간에 긴장감을 갖게 했고
행사의 축가를 부르던 ‘노래마을’ 친구들의 중저음 톤의 노래는
푸근함을 물씬 만끽케 해주었다.
그리고 결성선언문이 낭독될 때 나의 다리는
여럿이 함께하며 진보해야한다는 소박한 책임감에 가벼운 전율이 일고 있었다.
행사는 1.개회사 2.국민의례 3.준비위원장 인사 4.경과보고
5.축사 6.청년연대사 7.청년에게 드리는 제언 8.위원장단 추대
9.사업계획(안)보고 10.축시/축가 11.결성선언문낭독 순으로 치러졌고,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경과보고’에서는 국민회의 상임대표이신 김상근 목사님 등이 맡아주셨고
‘청년에게 드리는 제언’ 순서에서는
얼마 전, 통합민주당의 부총재에 추대된 김근태 선배님이 맡아주셨다.
‘위원장단 추대’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문부식 씨가 추대되었다.
국민회의에 대한 세간의 ‘기대 반, 우려 반’의 시각에 곤혹스러운 듯
겸손하면서 여린 목소리로 위원장 수락소감을 담담하게 띄우고 있었다.
대학로 모 극단에서 공연된 ‘불 지른 남자’의 그 사내가 말이다.
국민회의 청년위에서 앞으로 할 일을 대강 소개하면,
첫째는 20년 내지 30년이라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이어받고 발전을 꽤하는 사업이고,
둘째는 민주적이고 양심적인 청년들의 정치운동을 도와주고 지원한다는 사업이고,
셋째는 분단된 나라의 통일을 대결과 전쟁 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통일운동을- 평화적인 방법의 현실적 대안으로- 한다는 것이며,
넷째는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보장하고
내실 있는 국민회의 청년위의 운영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회의 청년위는 12명의 자문위원을 구성했는데
고 문익환 목사님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고
현재의 ‘통일맞이’ 이사를 맞고 계신 유원호 선생님과
‘고삐’라는 작품을 내놓았던 소설가 윤정모 선생님 등이었다.
우리 일행은 행사장 맨 뒷좌석에 자리했는데,
자료집 검토에 열중하느라 뒤늦게 알았지만
옆자리엔 국민회의 초기모임 때 홍보위원장을 맡았던
김희택 선배님이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이제 얼마 안가서 온통 백발이 되겠구나.......’
인사를 하니 우리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행사는 시종 차분하면서도 중량감 있었고
드라마 ‘모래시계’의 시그널 뮤직이었다는
러시아 곡- ‘백학’의 분위기처럼 절제된 결연함과 장중함을 담아내는 속에서
진행되었다.
행사 중반부에는
충북지부 회원들과 우리일행이 소개되어 환영을 받았다.
‘일장공성 만골고(一將功成 萬骨枯)’라 하지 않았던가.
‘한 명 장수의 공적 뒤에는 수많은 병사들의 죽임이 있다.’는 말은
이때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놓고 슬프게 한다.
그 환영은 몇몇 개인의 업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국운동과 지역부문운동을 동일한 맥락 속에서 고뇌하며
지방시대를 차분히 준비해 나가는 군산지회 모든 분들과
우리지역 운동풍토는 물론 성실성, 그리고 신뢰와 존중으로
험로를 개척해 나가는 여러 단체와 민주역량,
또한 생활력 있는 군산시민들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스운 소리지만 함께 동행한 두 분은
지난 시기 6월 항쟁 때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모범적으로 항거했던 분들인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 또한 늠름하여
드라마 ‘모래시계’의 불한당(?)들과 닮은 소지도 충분하고 그 이미지가 없지 않아,
행여 식장의 뭇 동료회원들의 오해가 있을 수 있기에
이 글을 통해 사실무근임을 밝히며, 양심선언과 동시에 사면시키고자한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우호적이며 자질 있는 인사들과 단체와 함께해야 할 것이며,
졸부들과 모리배들과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할 것이다.
배울 때는 겸손하며, 발전적인 비판이 필요할 때는
정중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사업을 벌여야할 것이다.
행사가 끝이 나고 뒤풀이가 혜화로터리 성균관대 근처에서 있다는
사회자 김재웅 조직부장의 광고를 듣고 로비에 나왔다.
인접한 건물 같은 눈높이 3층의 화려한 조명 속에서
미니스커트 차림의 젊은 여성이 당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다시 반대로, 아래로의 군산을 향해 가야했다.
뒤풀이의 잔치는 계속되어야한다.
어둠이 벌써 짙게 내려 모든 사물의 식별을 거의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난 광주항쟁과 7,8월 노동자투쟁, 대통령선거,
분단으로 인해 이미 멀리 간 사람들!
그 이름 없는 무명의 싸움꾼들의 명예와 복권,
지위를 어떻게 보장하고 배려해야 하는가.
어떻게 정성어린 치유를 해야 하는가.
모 여성시인의 말처럼
30여년 한국 민주화운동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끝내야 하는가.
그 물음과 대답은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풀어야한다.
집권당의 개혁세력과 통합민주당과 국민회의,
재야의 일대 단결을 희망사항으로 꿈꾸며,
비 내리지 않는 호남선 남행열차를 타고
긴 어둠의 터널을 다시 지나 군산으로 향했다.
‘특별한 외출, 차분한 귀가’이길 바라면서.
--------------------------------------------------
<시사평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