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최초의 여성 사회학자인 이라와티 카브(1905~1970)의 삶은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맞서는 삶을 살았다고 영국 BBC가 19일(현지시간) 소개했다.
1905년 12월 15일 영국이 통치하는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태어났는데 당시만 해도 여성은 많은 권리나 자유를 갖지 못했다. 카브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 예를 들어 외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대학 교수가 됐고 인도 최초의 여성 인류학자가 됐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남성과 결혼했고, 잠옷을 입고 헤엄을 쳤으며, 스쿠터를 몰고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한 독일의 저명한 인류학자 유겐 피셔의 인종주의 가설을 당당히 반박했다. 또 인도 문화와 문명, 카스트 제도에 대한 그녀의 저작은 시대를 앞서갔으며 인도 대학들의 커리큘럼 일부가 됐다. 하지만 그녀의 역사적 지위는 모호한 채로 남아 있으며 그녀의 삶에 대한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방송은 지적했다.
손녀인 우르밀라 데쉬판데와 학자 티아고 핀토 바르보사가 함께 쓴 새 책 'Iru: Irawati Karve의 도드라진 인생'은 매력적인 그녀의 삶을 돌아보게 하며 많은 이들이 자신을 좇은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영감을 제공할 만큼 용감했다는 데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녀 이름은 이라와디(Irrawaddy) 강에서 따왔다. 여섯 씨붙이들의 고명 딸이었는데 가족의 보살핌 속에 편안하게 자라났다. 하지만 소녀의 삶은 극적으로 변했는데 한 인간으로서 완성되는 경험들을 했다. 강한 여성들이란 개념과 별도로, 이라와티의 삶은 그녀로 하여금 장벽을 부수는 길을 닦고 그녀가 해온 일들을 응원한 공감하며 진보적인 남성들을 만남으로써 가능했다.
일곱 살 때 그녀는 소녀들이라면 결혼하라고 등을 떠미는 아버지들과 달리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푸네의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푸네에서 그녀는 RP 파란지파이(Paranjpye)를 만났는데 그는 이라와티를 비공식 입양해 친딸처럼 키워냈다. 파란지파이 가문 안에서 이라와티는 비판적인 사고와 권리를 따지는 삶을 축하하는 삶의 방식에 노출됐다. 물론 이런 일은 인도 사회의 주류와 다른 방향이었다. 이라와티는 파란지파이를 "아빠(appa)"라고 부르길 좋아했는데 "둘째 아빠"란 뜻이었으며,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란 의미도 있었다.
대학 학장으로 여성 교육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무신론자이기도 했다. 그를 통해 이라와티는 사회과학이란 매혹적인 세계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발견했다. 이라와티가 독일 베를린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따겠다고 결심하자 친아버지는 반대했는데 파란지파이와 그녀의 남편 딘카 카브가 힘이 돼줬다.
그녀가 며칠에 걸린 배 여행으로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1927년이었다. 인류학과 우생학에 이름 난 피셔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학위 공부를 했다.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 책임에 얽매여 있었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의 추악함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그녀의 건물에서 지내던 유대인 학생이 잔인하게 살해된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책의 저자들은 유대인 시신이 건물 밖 층계에서 콘크리트에 피가 튄 채로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과 공포, 역겨움을 느꼈다고 적었다. 이라와티는 백인 유럽인이 더 논리적이며 이해력이 높아 백인이 아닌 유럽인들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한 점을 증명하라는 피셔 교수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이런 감정들과 씨름했다. 피셔가 내준 과제는 149개의 해골을 연구하고 측정하라는 것이었다.
피셔는 백인 유럽인들이 앞으로 튀어나온 두개골 때문에 비대칭의 두개골을 갖고 있어 더 지능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가설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이라와티가 아무리 연구해도 인종과 두개골 대칭성의 연관 관계를 증명할 수 없었다.
저자들은 책에 "물론 그녀는 피셔의 가설에 반했을 뿐만아니라 그 연구소의 이론들과 그 시대 주류 이론들과도 상충했다"고 적었다.
그녀는 용감하게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스승의 화를 부르고 자신의 학위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피셔는 심사 과정에 가장 낮은 점수를 매겼는데 그녀의 연구는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간의 차이점을 이용하는 일을 비판적으로, 과학적으로 배격했다. 나중에 나치는 자신들의 어젠다를 강화하기 위해 피셔의 인종 우월주의 이론을 이용했고, 피셔는 나중에 나치에 가입했다.
이라와티는 인생을 통틀어, 특히 그녀가 맞닥뜨린 여성들을 위해서도 끝없는 공감과 결합된 진부함을 보여줬다. 여성들이 고향을 떠나 멀리 여행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던 때인데 이라와티는 귀국한 뒤 인도의 오지 마을들을 남자 동료들과 함께, 때로는 학생들과 자녀들을 데리고 찾아가 다양한 부족민들의 삶을 연구했다. 그녀는 고고학 탐사에 합류해 1만 5000년 된 뼈들을 찾아내 과거와 현재를 잇게 했다. 숲속 깊이 들어가거나 흙바닥에서 몇 주나 몇 달을 견디기도 했다. 책에는 헛간들과 트럭 바닥에서 잠을 청했고 때로는 며칠씩 적은 먹거리로 버티기도 했다.
이라와티는 용감하게 사회적, 개인적 편견들과 맞섰으며 모든 계층의 사람과 어울렸다. 저자들은 힌두 커뮤니티의 카스트 상층이며 전통적으로 채식주의자들인 칫파반 브라민(Chitpavan Brahmin)인 이라와티가 어떻게 연구하고 싶어하는 부족 지도자가 제공한 살코기를 용감하게 먹었다. 그녀는 이런 행동을 개방성과 호기심으로 대응하며 우애의 제스처이자 충성 테스트로 여겼다.
그녀의 연구는 인류애에 대한 깊은 공감을 간직하고 있어서 나중에는 힌두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근본주의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인도가 집으로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속한다고 믿었다.
이 책은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느낀 공포를 반영해 이라와티의 마음은 인류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영원히 바꿀 수 있다는 당황스러운 현실 인식에 방황하고 있었던 순간을 돌아본다. 저자들은 "이런 반성 끝에 이라와티는 힌두 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교훈을 알아냈는데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이라와티는 1970년 8월 11일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업적은 연구와 영감을 안긴 사람들을 통해 이어질 것이라고 방송은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