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익모 여하가망(久而益慕 如何可忘)
맑은 기품에 간결한 일처리였네[청혜간혜(淸兮簡兮)]
그 빛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음이여[불현기광(不顯其光)]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웁거니[구이익모(久而益慕)]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여하가망(如何可忘)]
<관찰사 이헌구 청간선정비(淸簡善政碑)>
2007년 10월 15일 ‘새전북신문’에는 “전북의 보물은 땅 속에도 있다.”는 제목의 글이 실렸으니 이는 관찰사 이헌구(李憲球)의 ‘청간선정비(淸簡善政碑)’의 발굴과 기록된 시(詩)을 알리는 내용인데, 그 내용이 후세 사람들의 삶에 널리 표상이 될 만하다.
『지난 1979년 전주시 고사동 현재 영화의 거리 부근 옛 시민극장 터에 여관(당시 우신여관)을 신축하기 위해 땅을 파다 비 하나가 나왔다. 나무 비도 돌 비도 아닌 쇠로 된 철비였다. 백여년 땅에 묻혔으니 녹이 슬었으나 산화가 심하지 않아 충분히 글자를 알아볼 만했다. 앞면에 새겨진 글귀는 '관찰사 이헌구 청간선정비(淸簡善政碑)'. 헌종 연간인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전라감사를 지낸 이헌구(1784~1858)의 선정비였다. 뒷면에는 "그 분이 떠나신 지 23년 후 기미년 4월 어느 날 세웠다"고 음각됐다. 이 '기미년'은 1859년이다. 전주를 떠난 것이 23년이고 세상을 뜬 지 5년 후다. 누가 그만한 세월이 흐른 후 남의 기림을 받는가. 더구나 돌이나 나무가 아닌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쇠로 만든 기념물을 받는가.
이헌구(李憲球)는 완산이씨(전주이씨) 이고 호는 국헌(菊軒)이다. 1837년 1월20일 전라감사에 임명돼 1839년 12월10일 임기를 마치기까지 23개월 동안 전주에 있었다.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겸했으니 요즘 치면 도지사, 시장을 같이 했다. 전주에 재임한 조선시대 전라감사(당시엔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주가 '다스렸다') 마흔 한 명의 행장을 기록한 책 '벼슬길의 푸르고 맑은 바람이여'(최승범 저)는 이헌구를 이렇게 쓰고 있다.
“(이헌구 감사는) 청검하고 근면한 지방관으로서 관내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돕는 일에 힘썼을 뿐 아니라 저 때의 변경 이웃나라 백성들에게도 덕화(德化)를 생각하였던 '사려심원(思慮深遠)'한 명감사(名監司)이었다.”
속담에 '정승 댁 개가 죽으면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간다."고 했다. 좌의정 이헌구는 본인이 돌아간 후 호남 백성들의 기림을 받았으니 영광이 지극하다. 전라감사 재직 중도 아니고, 한성판윤·좌의정 등 내직으로 승진한 후도 아니고, 그 분 돌아간 후 전라도민들이 그를 기렸으니 흔치 않은 일이다.
이 비는 1979년 출토 후 토지주인 김일호씨가 전북대에 기증해 지금 전북대 박물관 앞 스텐리스 울타리 속에 서 있다. 그 비 앞면 오른쪽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맑은 기품에 간결한 일처리였네[청혜간혜(淸兮簡兮)] / 그 빛을 밖으로 들어내지 않았음이여[불현기광(不顯其光)] /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웁거니[구이익모(久而益慕)] /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여하가망(如何可忘)]"(최승범 역).』<임용진 편집인, 새전북신문 2007.10.15.>.
우리들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먼 훗날 사람들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그리웁거니[구이익모(久而益慕)]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여하가망(如何可忘)]”하고 기릴 수 있는 삶을 바라보며 나아가도록 해야겠다.
생각건대, 그리하자면 내 빛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불현기광(不顯其光)] 나의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도록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장 19-21절). 세상의 명성·명예를 바라보고 처신하여 얻는 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승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1서 2장 16-17절).
2024. 3.11. 素淡
*** 충간공(忠簡公) 국헌(菊軒) 이헌구(李憲球) 선생의 졸기(卒記) ***
철종 9년 무오(1858) 5월 27일(신축) 판부사 이헌구의 졸기, 판부사(判府事) 이헌구(李憲球)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 대신(大臣)의 충후(忠厚)한 자질과 근신(謹愼)하는 지조와 확고한 집념은 내가 의지하였던 바이고 조야(朝野)가 상망(想望)하던 바이었다. 근래 병환이 침중하다고는 하였으나 평일의 정력(精力)으로 보아 아직도 믿을 수가 있었는데, 이제 졸서(卒逝)했다는 단자(單子)를 보니 슬픈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졸서한 판부사 이헌구에게 시호를 내리는 법전을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보내어 주고 성복(成服)하는 날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녹봉(祿俸)은 3년 동안 보내어 주도록 하라.”하였다. 이헌구는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현손(玄孫)으로 청검(淸儉)함은 세속의 모범이 되기에 넉넉하고 성근(誠勤)함은 일을 주간(主幹)하기에 충분했는데, 중서(中書)에 있은 시일이 많지 않아서 쌓아온 포부를 끝까지 펴볼 수가 없었다. 나라와 백성의 치란(治亂)에 이르러서는 이를 돌보아 연연하는 마음이 가슴에 서려 있어 왕왕 눈물을 흘릴 때가 있었다. 그의 충근(忠謹)함과 박후(樸厚)함이 그지없이 성실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稱頌)하여 중고(中古) 이상의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원전】 조선왕조실록 48 집 627 면【분류】 인물(人物)
[주-1] 동원부기(東園副器) : 궁궐(宮闕)에서 쓰는 관곽(棺槨)을 만들고 남은 판재(板材).
○辛丑/判府事李憲球卒。 敎曰: "此大臣忠厚之姿, 謹愼之操, 牢確之執, 予所奇毗也, 朝野所想望也。 邇來病患, 雖曰沈綿, 平日精力, 尙有所恃, 今見逝單, 愴畫曷已? 卒判府事李憲球隱卒之典, 依例擧行, 東園副器一部輸送, 成服日, 遣承旨致祭, 祿俸限三年輸送。" 憲球, 忠愍公 健命玄孫, 淸儉足以範俗, 誠勤足以幹事, 而中書之日月不多, 用未能究其底蘊。 至於民國治忽, 眷戀紆結, 往往有泫然時。 蓋其忠謹樸厚, 斷斷無他, 世人之至今誦說者, 若中古以上人。
【태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6책 10권 6장 B면【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