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전 스님의 본생담으로 읽는 불교 7. 시비왕 본생 ①
“육체의 눈보다 일체지견이 천 배는 귀하다”
살점 떼주고 눈 뽑아 주며 보시바라밀 실천한 시비왕 이야기
몸 보시, 자존심·열등감·우월감·교만 원인인 ‘아상’ 버림 상징
교통·통신 발전된 만큼 복잡해진 현대 인간관계 해결책 제시
인도 아잔타 석굴의 17굴에 남아있는 시비왕의 보시당 벽화.
베풂은 인생길에서 가장 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 중의 하나이다. 베풂이 반야바라밀과 결합하면 보시바라밀로 승화된다. 시비왕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비둘기를 위해 살점을 떼주는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신체 중 눈을 보시하는 본생담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눈을 보시하는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시비 본생은 눈을 보시하는 과정과 눈을 보시한 후에 회복하는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뉘므로 두 번에 걸쳐 연재하기로 한다. 남전 ‘본생경’ 499번에 전하고 있으며, 아잔타 석굴의 17굴에 벽화로 그려져 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코살라 국왕이 일체의 필수품을 보시하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천금의 가치가 있는 시비국산의 가사를 보시한 것에 대하여, “좋아하는 물건을 보시하면 좋아하는 사람을 얻는다”하면서, 외적 물건의 보시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보시한 이야기를 말씀하신 것이다.
옛날 시비왕이 탁실라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와 시비국의 수도 아리타푸라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그는 여섯 군데, 즉 네 문과 성 중앙과 왕궁 입구에 보시당을 설치하고 날마다 60만금의 보시를 했다. 그는 생각했다.
‘외적인 것으로서 내가 보시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외적인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내적인 보시를 해보고 싶다. 오늘 내가 보시당에 갔을 때 내적 보시를 요구하는 사람은 없을까? 만일 누군가가 내 심장을 요구하면 마치 흐르는 물속에서 줄기 있는 연꽃을 끌어올리는 것처럼 나는 창으로 이 가슴을 찔러 핏방울을 뿜어내는 내 심장을 끌어올려 보시하리라. 만일 누가 내 몸의 살덩이를 요구하면 문자를 새기는 끌로 글자를 새기는 것처럼 내 살을 베어 그에게 보시하리라. 만일 누가 내 피를 요구하면 내 피를 그 입에 쏟아 넣고 또 그 발우에도 가득 채워 보시하리라. 만일 누가 자기 집 일이 잘 안된다하여 내가 그 집의 종이 되어 일을 해달라고 요구하면, 나는 이 왕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 문밖에 서서 내가 종이다 하고는 그 집일을 해주리라. 만일 누가 내 눈을 요구하면 다라나무의 심을 빼내듯 이 눈을 빼내어 보시하리라.’
제석천이 이를 알고 그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제석천은 늙은 장님 바라문으로 변장하고 보시당에 나온 시비왕 앞에 나타나 왕에게 눈을 요구하였다. ‘멀리서 눈 먼 장로/눈을 얻으러 여기 왔네./그 한 눈을 내게 다오. 우리는 한 눈씩 가지게 되리.’
시비왕은 이 말을 듣고 소원이 이루어지는구나 하면서 게송을 외웠다. ‘내가 원하는 것 중의 최상의 소원/너는 하나 원했지만 나는 두 눈 다 주리./너는 눈을 갖고 모든 것 바라보며 저 인간에 가라./네가 바라던 것 이제 이루게 하라.’
시비왕은 시바라는 의사를 불러 “내 눈을 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장군을 비롯한 왕의 총신들, 성내 사람들, 궁녀들까지 모여와서 반대하였다. 그러자 왕은 게송을 외웠다. ‘한 번 주겠다 약속해 두고도/그 약속 지키지 않으면 그런 마음 가진 자/그는 그 목이 땅에 떨어지거나/또는 함정에 빠진 신세 되리.’
대신들이 무엇을 바라기에 눈을 보시하느냐고 묻자, 시비왕은 다음 게송을 읊었다. ‘영광을 위해 나는 보시하지도 않고/처자, 재산, 왕국을 위해서도 아니네./이것이야말로 성인(聖人)들이 선을 행하는 오래된 길/그러므로 내 마음은 보시에 매혹당하네.’
왕이 게송을 마치고 시바 의사에게 다시 명령하자, 시바는 갖가지 약재를 섞어 푸른 연꽃에 바른 약을 시비왕의 오른 눈에 문질렀다. 처음에는 눈알이 돌면서 통증을 일으켰다. 시바는 말했다.
“대왕이시여, 아직은 본래대로 할 수 있습니다.” “꾸물거리지 말라.”
두 번째 문지르니 눈알이 눈을 삐져나오면서 더 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시바는 말했다. “대왕이시여, 아직은 본래대로 할 수 있습니다.” “꾸물거리지 말라.”
세 번째 문지르니 격렬한 통증과 함께 눈알이 빙빙 돌며 눈에서 나와 힘줄에 달리고 피는 쏟아져 옷을 적셨다. 시바는 말했다. “대왕이시여, 아직은 본래대로 할 수 있습니다.” “꾸물거리지 말라.”
시비왕은 통증을 참으면서 다시 “시바, 꾸물거릴 일이 아니다”고 말하자 시바는 칼로 눈 힘줄을 끊었다. 그리고 그 눈알을 왕의 손바닥에 놓았다. 왕은 왼눈으로 오른 눈알을 보고 고통을 참으면서 “이 눈보다 일체지견(一切知見)의 눈은 백배 천배 귀중한 것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며 눈알을 바라문에게 주었다. 바라문이 그것을 받아 제 눈에 넣자 꼭 맞아 들어갔다.
왕은 왼눈으로 그 눈을 바라보고 “내 보시는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다”고 마음에 넘치는 기쁨으로 감동한 나머지 남은 눈도 마저 보시했다. 제석천은 그것마저 받아 제 눈에 넣고 왕궁을 나가 천상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보시과정과 보시하는 마음의 인욕과 기쁨을 자세히 설하고 있다. 기쁨이 솟는 보시가 잘 된 보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좋아하는 물건을 보시하면 좋아하는 사람을 얻는다는 경구를 슬쩍 집어넣고 있다.
SNS 등 통신과 교통이 고도로 발전된 만큼 인간관계의 이합집산도 복잡하고 세밀해졌으며, 그에 비례해 군중 속의 고독도 비약적으로 증가한 현대사회에서 위 문구는 현대적 인간관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보시한다고 말해놓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목이 땅에 떨어질 악인으로 취급할 만큼 매우 비판적이다. 시비왕은 재물의 보시에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서 자신의 몸의 일부를 보시하였다. 시비왕은 왜 눈을 보시하느냐는 말에 대해 ‘성인들이 선을 행하는 오래된 길’이며, 육신의 눈이 아니라 일체지견의 눈을 원해서라고 대답한다.
몸을 보시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아상(我相)을 버리는 것이다. 아상으로 인해 자존심이 상하고 열등감과 우월감에 휩싸이고, 교만에 놀아난다. 아상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성인들이 선을 행하는 오래된 길’이다. 그것은 버리려 해도 잘 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버려 아상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보시한다는 생각, 즉 아상을 버리고 보시를 하는 것이 최상의 수행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가르침의 핵심이다.
[1627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