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만 해도 반팔 차림새, 엊그제까지도 여름철 장맛비처럼 비가 내리더니
갑자기 기후가 변심했다? 아니다, 예정된 기후변화 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12월에 내리는 눈을 예상했어야 하고
이 산속 길을 나가지 못할 것을 예측하여 미리 차량을 마을회관 앞에 두었어야 했다.
연말이라 외출 계획이 수두룩 한데 참 난감지경이다.
물론 대로변이야 어쨋든 시에서 정리할 테지만 이런 산길까지 정리하러 오지는 않는다.
십센티가 훌쩍 넘어버린 지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암튼 묶인 발길에 인터넷 서핑하다 쥔장 의견에 걸맞는 글이 있어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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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의전과 대접 속 골병드는 국빈 방문'/ 오태규
윤석열 대통령이 3박5일 간의 네덜란드 국빈 방문을 마치고 15일 귀국했습니다.
올해 13번째 해외 방문이었습니다.
국빈 방문으로 치면 올해만 7번째입니다.
1월 아랍에미리트공화국을 시작으로, 4월 미국, 6월 베트남, 10월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11월 영국을 거쳐 12월 네덜란드까지 국빈 방문 행진이 이어졌습니다.
2023년 한 해를 국빈 방문으로 열고 국빈 방문으로 닫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국빈 방문이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국빈 방문이란 한 나라의 원수가 상대국 원수의 공식 초청을 받아 방문하는 일을 일컫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이뤄지는 최고 수준의 외교 행사이므로 화려한 의전과 대우가 따릅니다.
21발의 환영 예포 발사와 의장대 사열, 초청국 원수 주최 만찬,
초청국의 입법부 방문 및 의회 연설 등의 행사가 열리는 게 보통입니다.
방문 원수를 포함한 공식 수행원에 대한 숙박 및 숙식 제공도 초청국이 제공합니다.
여기에 각 나라 특유의 전통 행사가 더해지는데,
영국 국빈 방문 때 방문 원수가 황금마차 타고 왕궁으로 이동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ㅡ김영삼 프랑스 방문은 테제베, 윤 영국에는 35조 투자
국가 원수의 외국 방문은 의전의 격식에 따라
국빈 방문, 공식 방문, 공식 실무방문, 실무방문, 사적 방문 등으로 나뉩니다.
하지만 초청국이 제공하는 의전의 격이 높다고 해서,
초청국이 방문국을 다른 나라보다 더 존경한다거나 더 중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청국이 화려한 대접을 원하는 방문국 지도자의 허영심을 이용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프랑스를 국빈 방문했을 때는
프랑스가 우리나라의 국빈 방문 요청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당시 고속철도 사업에서 일본의 신칸센과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던
프랑스 테제베의 도입을 요구해 관철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윤 대통령의 11월 영국 국빈 방문도 개운치 않습니다.
영국은 1년에 단 2차례만 국빈 방문을 받기 때문에 국빈 방문의 진입 장벽이 꽤 높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입장료가 꽤 비싼 편입니다.
그런데 마침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영국 국빈 방문 때 무려 34조 원의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반면, 영국으로부터 끌어낸 투자는 겨우 1조 5천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올해 실시한 7번의 국빈 방문 중 3개 나라가 아랍 국가였습니다.
아랍에미리트연합,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입니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는 이 세 나라를 포함해 7개 나라의 국빈 방문 행사에 빠짐없이 동행했습니다.
아랍 나라들을 방문할 때는 마치 정상이라도 되는 양 활발한 활동을 벌였고,
이런 모습을 화보로 홍보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아랍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외국 정상을 초청할 때 정상의 부인 초청을 꺼린다고 합니다.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에 동행하는 정상 부인의 상대역을 내세우기가 곤란하다는 게 이유입니다.
실제 아랍 국가를 방문하는 다른 나라 정상들 가운데
부인과 함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ㅡ‘대사 초치 과도한 의전 요구 불만’ 기사
마침 윤 대통령의 네덜란드 방문 뒤 귀국 시점에 맞추어
이와 관련한 매우 충격적인 뉴스가 나왔습니다.
<중앙일보>가 15일, 네덜란드 정부가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 열흘 전에
네덜란드 주재 한국 대사를 불러 과도한 경호와 의전을 요구하는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고 단독으로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경호상의 필요를 이유로 방문지의 엘리베이터 면적까지 요구한 것 등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불만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이에 관해 외교부는 부랴부랴 ‘초치가 아니라 협의’라고 변명하며 대사를 부른 것을 인정하면서
“국가를 불문하고 행사 의전 관련한 상세 사항에 대해 언제나 이견이나, 상이한 점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외교부의 이 반론이 사실상 중앙일보 보도를 시인한 것이라고 봅니다.
의전에 대한 이견을 둘러싸고 주재국 대사까지 불렀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아니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이런 외교 참사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외교 의전 관례 속에서는 절대 나오기 어렵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랍 나라들의 국빈 방문 때 벌어진 이례적인 행사들이 단서를 찾는 암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비밀스러운 내용이 밖으로 흘러나올 정도로,
비상식적인 일이 만연하고 있다는 징후입니다.
이런 내용은 초청국 관계자의 입을 통해 나왔다면 그것도 문제지만,
우리 쪽에서 흘러나왔다면 정권의 장악력에 큰 금이 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봅니다.
ㅡ속 빈 강정 ‘반도체 동맹’
윤 정권은 이번 네덜란드 방문의 의의를 ‘반도체 동맹’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과 마크 루터 네덜란드 총리가 발표한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보면,
윤 정부가 부각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반도체 동맹’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공동성명은 전문과 20개 항으로 구성돼 있는데, 반도체 동맹이란 용어는 12번째 항에 나옵니다.
“양 정상은 반도체 가치 사슬에 있어 양국의 특별한 상호보완적 관계를 인식하고,
정부, 기업, 대학을 아우르는 반도체 동맹 구축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라는 대목인데,
그것도 우리 정부가 설명하듯이 협력 관계에서 동맹 관계로 격상하는 내용이 아니라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총리 방한 때 합의한 내용을 재확인한다는 표현입니다.
또 공동성명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양국의 반도체 동맹에 관한 강조점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반도체 동맹’이라는 단어와 함께
반도체가 들어가는 용어를 10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반면에 루터 총리는 양국 경제협력의 한 예로 ‘반도체 산업’이란 단어를 단 1번만 썼습니다.
오히려 네덜란드 쪽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군사 지원과
양국 간 국방 협력에 더욱 관심을 두는 모습이었습니다.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입니다.
국내 정치가 잘 돼야 외교도 잘 작동할 수 있습니다.
또 내용과 형식이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과도한 의전에 취해 내용이 부실해진다면, 그런 외교는 안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국내 정치가 엉망진창이고 화려한 의전과 대접에만 신경 쓰는 윤석열 정권의 외교는
시작부터 실패를 내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속 빈 강정’으로 끝낸 이번 네덜란드 국빈 외교는 그런 외교의 대표 사례로 기록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오태규 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