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 천진암성지 - 학문에서 신앙으로
한국교회 창립 선조들 모여 연구하고 기도하던 곳
- 밤중에 설산을 헤치고 강학을 찾을 정도로 열정이 컸던 이벽이 서학서 등을 읽으며 연구했던 독서처 자리.
천진암성지 입구에는 성지가 현양하는 신앙선조 5위의 형상이 그려진 모자이크화가 자리하고 있다.
5위는 바로 이곳에서 한역서학서를 두고 강학회를 하던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승훈(베드로),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다.
우리는 이들을 한국교회를 창립한 주역이라고 해서 한국교회 창립선조라고도 부른다.
강학은 단순히 서학을 연구하는 학문적 모임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어떻게 서학이라는 학문을 신앙으로 승화시켰을까.
하느님을 흠숭하다
이곳에서 열린 강학회를 교회사에서 주목하는 이유는 그저 신앙선조들이 한역서학서를 연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서학을 접하거나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들 외에도 많이 있었다.
‘강학’이라는 모임 형태도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강학’은 당시 성호학파 안에서 널리 이뤄지던
학자들의 연구 모임이었다.
- 이벽의 호를 딴 천진암성지 광암성당.
그럼에도 이 강학회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을 흠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강학회 참가자들은 강학회를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고 즉시 천주교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바로 파공(罷工), 기도, 묵상, 소재(小齋) 등을 실천했던 것이다.
파공은 십계명 중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을 지키는 행위다.
그러나 아직 일주일, 요일이라는 개념도, 양력도 알지 못했던 신앙선조들은 서학서를 통해
“7일 가운데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내용을 읽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모든 일을 쉬고 묵상에 전념했고, 소재, 곧 금육을 지켰다.
또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바쳤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곳에서 열린 10여 일의 강학회를 두고
“그들은 정직하고 진리를 알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인지라, 천주교의 도리에는 아름답고 이치에 맞는
위대한 무엇이 있음을 이내 어렴풋이 느꼈다”면서 “완전한 지식을 얻기에는 설명이 부족했으나,
그들이 읽은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했다”고 묘사했다.
다만 강학회에 참가한 이들이 이곳에서 하던 신앙실천을 그리 길게 이어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달레 신부는 “그들이 얼마 동안이나 이런 실천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련의 사실로 보아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그 일에 오랫동안 충실하지 못했음을 짐작케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강학회에서 활동한 창립선조들은 이후 더욱 적극적인 활동으로 굳건한 신앙공동체를 이룩한다.
특히 조선인 최초의 세례를 일군 것은 이벽의 활약이 컸다.
- 천진암성지 내 이벽 묘지.
신앙공동체를 이루다
정약용은 권철신의 묘지명에 “기해년(1779년) 겨울에 천진암 주어사에서 학문을 닦고 연구하고 있을 때
눈 속에 이벽이 밤중에 와서 촛불을 켜고 경(經)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벽은 밤중에 설산을 헤치고 강학을 찾을 정도로 천주교에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권의 서학서만으로는 충분하게 천주교를 알 수 없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중국에서 더 많은 서학서를 가져오는 것이었지만, 조정이 허락한 이들만 중국을 찾을 수 있었다.
이때 이벽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승훈이 동지사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을 찾아갔다.
더 많은 천주교 서적을 구하고, 나아가 이승훈이 세례를 받도록 권하기 위해서였다.
황사영(알렉시오)이 집필한 「백서」에 따르면 이벽은 이승훈에게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천
주당 안에는 서양 신부가 있다”며 “그를 만나 신경(信經) 한 부를 구하고 아울러 세례 받기를 청하면
신부가 반드시 그대를 아주 사랑하여 기묘하고 신기하며 보배로운 물건들을 많이 얻을 것이니
반드시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천진암성지 내 이승훈 묘지.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이승훈은 이벽의 조언대로 북당(北堂)을 방문해 서양 신부를 만날 수 있었고,
마침내 1784년 2월 무렵 예수회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천주교 서적들과 십자가상, 성화, 묵주 등을 들고 귀국했고,
1784년 겨울 무렵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을 비롯해, 권일신,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줬다.
이때 세례를 통해 공동체를 이룬 초기교회 지도자들은 주변에 교리를 전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이벽이 가장 적극적으로 선교했다.
이때 복자 윤지충(바오로)을 비롯해 호남의 사도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내포의 사도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등 여러 신자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활동하면서 신앙공동체가 빠르게 확산됐다.
마침내 당시 베이징교구장이었던 구베아 주교는 교황청에 조선의 신앙공동체 탄생을 보고했다.
구베아 주교는 1790년 10월 6일 교황청 포교성성에 보낸 편지를 통해 “그(이승훈)는 천주님의 은총의
도우심으로 그의 동포들의 전도사가 돼, 몇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개종시키고 세례를 줬다”면서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서 다시 전도사들을 임명했는데, 이들은 베드로(이승훈)보다 더 열심해져서
머지않아 1000명이 넘는 남녀 동포들이 세례를 받고, 새 조선교회를 세웠다”고 전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3년 6월 18일,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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