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29-30 부활이 없다면 죽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침례를 받지 않을 것이고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전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실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그 사명을 완수하신 뒤에는 그 분 자신도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나님은 모든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만약 부활이 없다면 죽은 사람들 때문에 침례를 받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며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매 순간마다 위험을 직면하는지 묻는 내용이다.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일은 없다며 당시 로마 황제를 통해서 누리는 로마 제국의 영광이 바로 영원한 나라라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그러니 세상의 권력자들을 의지하며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자고 고린도 성도들을 속인 것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반대 질문을 하면서 부활을 증명하고 있다.
첫번째와 두번째 반대 질문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것에 관한 것이다. 29절은 두개의 질문으로 되어 있다. 첫째 질문은 부활이 없다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이미 침례 받은 사람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거냐는 질문이다. 이들은 이미 죽은 자들을 위해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둘째 질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현재 성도들이 무엇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고 있느냐는 것이다. 두 질문은 부활이 없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 과거에 이미 침례를 받은 사람들과 현재 침례를 받고 있는 사람들 모두 다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 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구절들 중 하나로 꼽힐 수 있다. 실제로 이 구절에 대해 30가지가 넘는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오늘 그 모든 해석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그 중 3가지만 소개하겠다.
첫번째 죽은자의 침례에 대한 몰몬교의 해석이다. 몰몬교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친구나 가족들을 대신해 침례를 받으면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천국간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의 문제가 무엇인가? 전 후 문맥을 무시하고 뜻이 불분명한 한 구절을 잘라서 교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려운 구절은 다른 성경 구절로 풀이하거나 앞뒤 문맥을 통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 해석의 일반적인 원칙이다. 이들의 해석은 이러한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만약 몰몬교의 이러한 해석이 사실이라면 신약성서 다른 부분에서도 이렇게 죽은 자들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자들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은 없다. 이처럼 한 구절을 전후 문맥과 상관없이 잘라내어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단들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성경구절을 해석하고 교리화한다.
두번째 주목할 만한 해석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 미처 침례를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죽은 자를 위해서 침례를 행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도 성경을 조금만 찾아보면 옳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사도행전 2:41절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한 사람들에게 즉시 침례를 주었는데 하루에 삼천명이나 침례를 주었다고 했다. 또 사도행전 8:35-38에 보면 이사야 53:7에 나온 메시야 예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던 이디오피아 내시가 빌립의 가르침으로 깨닫고 즉시 침례를 받았다. 또 사도행전 10:47절에 보면 고넬료의 집안 식구들이 성령 받았을 때 즉시 침례를 받았다. 이처럼 바울 당시에는 깨닫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즉시 침례를 주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사람이 침례 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해석은 오늘날 교회에서 일정기간을 거친 뒤 침례를 주는 것을 근고로 2000년전의 침례를 판단하는 시대착오적 해석이다. 만약 분명히 믿고 죽었다면 침례를 받고 안 받고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침례란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선언하는 것이지 어떤 마법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죽은자를 위한 침례가 무슨 뜻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례가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 침례가 무엇인가? 침례가 구원받는 조건인가? 아니다. 침례는 단지 구원 받은 것을 성도들 앞에서 고백하고 증거하는 의식일 뿐이다. 아무도 침례식 그 자체를 통해서 구원 받을 수는 없다. 신약성서에서 침례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받는 것이었다. 신약성서에서 침례라는 말은 구원 받은 것과 주로 함께 쓰였고 따라서 침례란 단어가 구원과 동의어로 쓰일 때가 많았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 핵심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라는 말에서 “위하여”라는 말에 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 핵심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라는 말에서 “위하여”라는 말에 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어떤 이는 임종 직전의 침례로 해석한다. 그러나 문맥성 설득력이 거의 없다. 오늘날 대다수의 서구 학자들은 어떤 이들은 위하여 라는 말의 의미를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침례를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관행이고 바울이 찬성한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학자들이 대리 침례라는 의미라고 한다고 해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이 문장 자체보다 15장 전체의 문맥을 봐야 한다.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죽은 사람들이라는 말은 15장에서만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이전 문맥을 보면 죽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주로 장차 부활할 믿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그런데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 이미 죽은 믿는 자들 중에 침례를 받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죽은 사람들이라고 막연하게 말할 가능성이 없다. 당시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하는 순간 즉시 받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는 죽을 몸을 위한 침례로 해석한다. 모든 사람은 다 죽을 몸을 가졌기에 일반적인 침례로 해석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전체에서 죽은 자들은 항상 부활할 성도들을 가리킨다며 부활의 소망 때문에 침례를 받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29절에 이어지는 문맥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기에 모든 믿는 자들을 다 죽은 사람으로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위하여" 보다는 “때문에” 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근거는 15장에서 죽은 자들이란 표현은 항상 부활할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활할 성도들이 부활할 소망 때문에 침례를 받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만약 침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성도들을 위한 대리침례라면 너희 중에 침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몇 명을 위해라고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를 위하여 침례를 받는다는 말은 불신자들이 죽은 신자들 때문에 침례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다.
어째서 죽은 신자들 때문에 불신자들이 침례 받고 구원 받는가? 이는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 장면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를 잘 믿던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 그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이 너무 안타까워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이 위로하면서 예수 믿으면 죽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 믿으면 나중에 천국에서 그리운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즉시 주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지 않겠는가? 바울 당시 고린도에 살던 불신자의 가족 중에서 주를 믿고 죽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 때문에 예수를 영접하고 침례 받았을 것이다.
오늘날도 신자의 장례식을 통해서 믿지 않는 가족들이 구원 받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때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길 간절히 바라던 사람들을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37:35절에 보면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말을 듣고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탄식하며 말했다. “아니다 내가 울면서, 나의 아들이 있는 스올(무덤)로 내려가겠다.” 또 사무엘하 12장 23절에 보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 낳은 아들이 죽었을 때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 올 수가 없소.”
죽은 자 때문에 구원받고 침례받은 사람들은 바로 아들을 잃은 야곱과 다윗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주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아들 딸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다시 만날 소망을 갖고 주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고린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쓸데 없는 짓을 한 것이라는 것이 29절의 뜻이다.
본인과 본인의 아내는 가족들 중 첫번째 기독교인들이다. 우리는 결혼 이후에도 가족 구원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날 장인어른께서 꿈에서 산에서 나무를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데 어떤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지게를 벗고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했다는 꿈을 꾸었다며 그 때부터 교회에 나가셨다. 하지만 처가 형제들은 아무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어른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 가족들 모두 예수 믿으라고 유언하셔서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처럼 불신자인 가족들이 믿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믿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세번째 질문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때문에 시시각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사느냐는 질문이다. 이는 바울 일행이 부활의 소망 때문에 그렇게 죽음의 위험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며 산다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31절에서 바울은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당한다고 말한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하며 복음을 전하는냐는 뜻이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침례를 받는 것이고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