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섭은낭>을 보았습니다.

아트하우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관객이지만 저를 제외한(저는 중년도 아닌, 청년도 아닌...^^;) 대부분이 중년의 관객이었습니다.
중년의 관객이 아트하우스 영화를 보는 걸 의외라고 생각한 것은 저의 편견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협영화에 대한 향수도 분명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1:1에 가까운 비율의 흑백화면이 나타납니다. 뭔가 새로운 느낌입니다.
흑백화면은 자주 보지만, 이런 비율의 흑백화면은 낯선 경험입니다.
‘역시 예술영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새롭습니다. 과거 흑백 브라운관 TV를 확장해서 보는 듯 합니다.
그 흑백 브라운관 속으로 눈에 익은 여성이 등장합니다. ‘서기’입니다. 극중 이름은 ‘섭은낭’입니다.
스승으로 보이는 백의의 여성에게 암살 임무를 하달받습니다. 이 스승의 말에 살짝 웃음이 납니다.
‘날아가는 새를 찌르는 만큼 쉬울 것이다.’
‘보다’가 아니라 ‘만큼’이라고 합니다. 잘못 봤나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날아가는 새를 찌르는 것은 아무일도 아닌가봅니다.
대륙 무협영화의 허세는 예술영화에서도 여전하다싶다가도 이들 자객집단의 실력을 강조하기에는 적절해 보입니다.
과연, 자객 ‘섭은낭’은 말을 타고 있는 암살 목표의 목을 간결하고도 깔끔하게 그어버립니다.

‘은낭’은 더 이상의 기술적으로는 절대적 실력의 암살자이지만, ‘인륜’ 앞에서 약해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또 다른 암살 임무에서 암살 대상이 아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그냥 돌아서고 만 것입니다.
그의 스승은 ‘은낭’이 냉혈한 자객으로 완성될 가능성을 시험 또는 완성시키기 위해 새로운 임무를 지시합니다.
그녀의 고향인 ‘위박’으로 돌아가 사촌인 ‘계안’을 살해하라고 합니다. ‘계안’은 ‘위박’지역의 절도사이고, 과거 ‘은낭’과는 마음을 나누던 사이였습니다.
‘은낭’은 이 지시를 받들어 고향인 ‘위박’으로 향합니다.
이제 흑백의 화면에서 강렬한 붉은 빛의 컬러 화면으로 바뀌고 영화 타이틀 <자객 섭은낭>이 뜹니다.

흑백의 프롤로그를 보면서 이 영화의 전체적인 영상은 절제되고 소박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컬러의 현재에 들어서는 과감하고 화려한 영상이 전시됩니다.
당시(당나라 시대)의 건축과 복식에서 볼 수 있는 왕실과 귀족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장예모 감독의 과시적인 인공미를 넘어섭니다.
스크린에 크게 펼쳐지는 자연경관도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이 영화의 화면비는 1.37:1이 주를 이루지만 수시로 화면비가 늘어납니다.
현대 영화의 화면비는 1.85:1, 2.35:1이 주로 쓰이고, 이 화면비의 선택에는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하게 쓰이지 않는 1.37:1 화면비의 선택과 화면비의 변화에 담긴 감독의 의도가 궁금해집니다.
식견이 짧은 저로서는 영화를 보면서도 답을 찾을 수도 없었고, 어느샌가 그것에 적응하여 결국 아무 생각없이 관람을 마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혼자 생각해보고, 감독의 인터뷰도 찾아보니
감독은 결국 자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을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1.37:1의 비율을 선택한 것은 감독의 취향이며,
단순히 ‘칠현금’이라는 악기를 온전히 담기 위해 비율을 늘기도 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화면비의 변환이 수월해진 디지털 기술을 액자처럼 활용한 셈입니다.
아무튼 감독은 자신이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들을 과하지 않게 관객에게 보여주는데 성공했고,
실제로 이 영화는 굉장한 영상미의 영화입니다.
카페를 운영한다면 큰 스크린을 통해 계속 전시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꼭 큰 스크린으로 봐야 합니다.



영화가 중반을 지납니다.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잠이 부족하기도 했고, 영화가 매우 느립니다.
인물들의 움직임이 적고, 롱테이크도 많습니다. 솔직히 지루한 감도 있습니다.
상영관이 워낙 적어 쉽게 보기도 힘들테지만, 어쨌든 추천하기가 쉽지 않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한 장면 장면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인물의 감정은 여운이 오래 갑니다.
그리고 그 느린 흐름 덕분에 간간히 펼쳐지는 '은낭'의 액션이 매우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여느 무협영화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하진 않지만,
간결하고 절도있는 그녀의 움직임은 강렬하고 이전 장면과 완전히 대비됩니다.
잠이 오다가도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습니다.

‘은낭’은 ‘계안’을 암살할 기회를 앞에 두고 머뭇거립니다. 이 머뭇거림을 묘사하는 연출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계안’의 침소에 잠입한 ‘은낭’은 커튼 뒤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엿봅니다.
‘계안’은 후처인 ‘호희’에게 ‘은낭’과의 과거 관계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이때 커튼 뒤에 숨은 채 이를 듣고 있는 ‘은낭’의 시점숏에서 커튼이 카메라를 가리워졌다 걷어졌다 합니다.
이것이 ‘은낭’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이라면 바로 탄로가 나는 것 일텐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머뭇거리고 있는 ‘은낭’의 마음을 나타내는 연출임을 이해하면서 감탄하게 됩니다.

결국 ‘은낭’은 ‘계안’의 암살을 포기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가게 된 자객의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자 소박한 여정을 떠나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언제부턴가 중국 영화를 극장에서 잘 보지 않습니다.
근래의 중국영화들이 화려한 영상미를 뽐내지만 아름다움보다는 과시적인 태도가 느껴져서입니다.
<자객 섭은낭>은 비록 굉장히 느리고 보아내기 쉽지 않은 영화이지만,
오히려 일반적인 중국 상업영화들보다 중국의 아름다움에 더욱 감탄할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첫댓글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는 항상 도전만 할뿐... 끝까지 본적이 없네요. 카페 뤼미에르는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 앞에서 신나게 헤드뱅잉.... ㅋㅋ
비정성시도 dvd 까지 구입했지만 아직 다 보지 못했습니다(언젠가는 다 볼수있는 날이 오겠죠^^;)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제 처음 봤습니다. 보기가 쉽지는 않죠ㅎㅎ
저는 무협을 가장한 섭은낭의 성장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맞습니다. 은낭에겐 아마 첫 성장기가 아닐까 합니다.
정말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ㅎ 평은 제가 영화를 보고 읽을게요 ㅎ
네엡~~ㅎㅎ
영화가 끝나는지도 모르게 끝나기까지 해서 관객의 절반 이상이 당혹스러워 하는게 느껴지더군여;;; 영화중간 코고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리고요.ㅎㅎ 암것도 모르고 그냥 무협물인 줄만 알고 오신 어르신 분들이 꽤 많더라구요. 저는 화내시는 분이나 중간에 나가는 관객도 보고 그랬네요;;;
그럴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래도 조금만 알아보고 오셨으면 좋으련만...^^;
"근래의 중국영화들이 화려한 영상미를 뽐내지만 아름다움보다는 과시적인 태도가 느껴져서입니다." <- 크게 공감합니다. 정성스런 리뷰 잘 읽었습니다.
볼만한 중국영화를 보기 힘들어요. 요즘은 주성치도 뜸하고...
허우 샤오시엔이 갑자기 왜 무협영화를 만들었나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섭은낭이 중국 무협소설의 시초가 되는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더군요. 속편도 만드실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