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자료 제451호
이 건물은 예조좌랑(禮曺佐郞),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 옥천군수(沃川郡守)를 역임한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盖國 ; 1548~1603)이 건립한 정자이다. 김개국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제(公濟), 호는 만취당이다. 선조(宣祖) 24년(159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워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가 되고 효종 1년(1650)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그는 건물 서쪽에 있는 수백 그루의 솔들이 설한(雪寒)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음을 보고 본보기로 삼아, ‘만취당(晩翠堂)’이란 당호(堂號)를 짓고, 또한 스스로 아호로도 삼았다고 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몰익공계 납도리 소로수장집으로 오량가(五樑家) 팔작(八作)지붕이다. 평면구성은 마루방 4통칸, 온돌방 2통칸을 연이어 놓고 사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렸다. 온돌방 후면에는 반침 흔적이 남아 있고 마루방 우측칸 뒤에는 반침이 설치되어 있다.
김개국(金蓋國) - 위키백과
본관은 연안으로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몽득(金夢得)이다. 자는 공제(公濟),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소고박승임(朴承任)의 문하생이 되어 수학하였다. 1573년(선조 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 뒤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2년 7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피신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598년(선조 31년) 전란 종결 후,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녹훈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정성껏 모셨으며 이후 관직은 예조정랑(正郞)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1]
학맥으로는 이황학파로, 당색으로는 동인이었으나 동인이 정철을 처벌하는 의견을 놓고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는 북인이 되었다가 다시, 선조 말년에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당할 때는 유몽인, 남이공 등과 함께 소북파가 되었다. 저서로 《만취일고》가 있다.
첫댓글 만취당의 현판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 마디 했는데요. 그것 또한 편견이겠지요?
그런 편견은 발전을 가져오지 않나요 ?
무조건 좋은게 좋은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