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뉴스]
노트북 컴퓨터가 단돈 79만9천원(부가세 포함). 중소기업 엠에스디가 출시한 이 제품은 14.1인치 LCD 모니터에 DVD/CD-RW 콤보 드라이브가 장착되어 있다. 사양만으로 본다면 나무랄 데 없는 제품이다. 노트북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디지털 장비들의 가격이 바닥을 모른 채 하락하고 있다. 지난해 말 100만원대 벽을 허문 삼보컴퓨터의 에버라텍 제품이 등장한 이후, 채 두 달이 안되어 20만원이나 싼 신제품이 등장한 것이다.
노트북의 가격 파괴는 국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9만 엔대 노트북이 판매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5백 달러가 안되는 노트북이 대형 할인점을 중심으로 공급되고 있다. 그동안 비싼 가격 때문에 노트북 구입을 미루어 왔던 사용자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데스크탑의 경우에는 가격 하락의 폭이 더욱 커서, 요즘은 17인치 LCD 모니터를 포함한 데스크탑 컴퓨터는 100만원대면 살 수 있다. 물론 본체만 산다면 신제품을 40만~50만 원에 살 수도 있다. 비싸기로 유명한 애플 매킨토시도 얼마 전 4백99 달러짜리 데스크탑 신제품을 내놓았다. 국내 판매가는 62만원, 파격적인 값이다.
가격 인하 열풍, 전세계 강타
2005년 컴퓨터 업계에서는 엄청난 가격 파괴가 일어날 전망이다. 단순히 국내 이야기라면 경기 침체로 인해 매출이 줄면서 수요 진작을 위한 마케팅의 한 가지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격 인하 열풍은 전세계에서 불고 있다. 왜 올해 들어 갑자기 가격 인하 전쟁이 일어난 것일까?
빌 게이츠는 1999년 자신의 책 <생각의 속도>에서, 1980년대가 질(質)의 시대, 1990년대가 리엔지니어링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속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사용자들은 조금 달랐다. 단 1초라도 작업을 빨리 끝내주는 제품도 좋아했지만, 성능이 비슷하다면 싼 컴퓨터를 더 선호했던 것이다.
컴퓨터 소비자들, 속도보다 가격 중시
△99만원에 팔리는 디보스의 23인치 LCD 텔레비전. | 업무에 사용되는 컴퓨터가 느리고 답답하면 비용을 들여 신형 컴퓨터를 산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형이 확연히 성능이 좋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때가 많다. 물론 수천 명의 데이터를 담은 자료를 검색하거나, 매일같이 수백여 장의 프레젠테이션 자료와 문서 파일을 다루어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주로 간단한 인터넷 서핑과 e메일, 문서 작성과 게임 정도만 한다. 따라서 속도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최고 속도 제품과 저가형 제품 간의 체감 속도는 생각보다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바로 이같은 사실이 소비자와 기업 모두를 저가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물론 개별 부품의 가격 하락도 큰 원인 중 하나이다.
디지털 제품 전체를 살펴보아도 비슷한 흐름이 느껴진다. MP3 플레이어의 경우, 국내 업계 선두인 아이리버의 512MB 크래프트 시리즈는 20만원대 중후반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세계 시장을 이끌고 있는 애플 사가 최근 ‘단순하지만 우아한 디자인’을 앞세운 아이팟 셔플 제품을 그 절반 가격으로 내놓았다. 512MB짜리를 12만원, 1기가 제품을 18만원에 판매하자 경쟁 업체들도 덩달아 가격 인하를 단행했다.
△삼보컴퓨터는 100만원 안팎의 노트북 컴퓨터를 출시했다(사진 아래). 주연테크는 가격을 20만~ 30만 원 낮춘 데스크탑 컴퓨터를 출시했다(사진 위). | LCD 제품도 마찬가지이다. 1년 전만 하더라도 23인치 초대형 LCD 모니터의 경우 3백30만원대, 저가형 제품도 2백40만원대에 판매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 델 컴퓨터 일본 법인은 24인치 와이드 LCD를 1백57만5천원에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성능 면에서 LCD 모니터와는 차이가 있지만, 컴퓨터와 연결해서 사용할 수도 있는 HD급 LCD 텔레비전도 무서운 속도로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 중소기업 디보스의 제품은 23인치 LCD TV가 99만원, 30인치가 1백99만원에 판매되고 있고, DIY 쇼핑몰 LCD119는 HDTV 수신이 가능한 고해상도 23인치 LCD 모니터를 1백60만원대에 판매하고 있기도 하다.
렌즈분리형 디지털 카메라(D-SLR) 가격도 떨어지고 있다. 캐논의 D60 카메라는 2002년 카메라 본체만 4백50만원대에 거래되었지만, 현재는 저가형 제품이 등장하면서 기본 렌즈를 포함해 100만원 안팎에 살 수 있다. 성능으로 본다면 큰 차이가 없는 제품이 불과 몇년 사이에 4분의 1 수준으로 싸진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 가격, 75% 떨어져
디지털 제품의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부품 가격 하락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는 시장이 급격히 확대되고 사용자들이 과거와 다른 사용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아날로그 제품들은 대부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했다. 더 쓰더라도 두어 번 고장이 날 때까지 고쳐 쓰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렇지만 디지털 제품은 근본적으로 다른 소비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일단 사용 기간이 눈에 띄게 짧아졌다. 신제품이 나오면 맨 먼저 구입하는 얼리어답터들은 제품을 교체할 때가 되면 인터넷 경매 사이트나 중고 유통 사이트를 이용해서 처분한다. 값은 구매가보다 20% 정도 하락한 수준.
△아이리버는 512MB 크래프트 시리즈(왼쪽)를 20만원대 중후반에 팔고, 애플은 아이팟 셔플(오른쪽) 제품을 12만 ~18만 원에 판다. | 알뜰한 소비자들은 바로 이 제품을 노린다. 상태가 좋은 중고 제품을 싸게 살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제품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평균 9개월에서 1년 정도가 되면 제품 가격은 10% 가량 인하된다. 이같은 가격 변동은 마지막 남은 구매 대기자를 흡수하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일부 사용자들은 누가 쓰던 중고 제품이라는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처음부터 박스와 작은 부품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물론 이렇게 판매하면 값을 훨씬 유리하게 매길 수 있다. 이같은 소비자 간의 재판매 형태는 이제까지는 찾아보기 힘든 소비 형태였다. 기업들이 신제품 판매에 애를 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개당 제품의 부품 원가에, 모든 경비를 더하고, 거기에 적정 마진을 붙인 제품 가격으로는 이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렵게 되었다. 제품의 수명 주기가 짧아지고, 가격은 떨어지고, 성능은 향상되면서,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을 경우 소비자들의 리콜 요청을 받아들여야 하는 디지털 제품들. 저가형 디지털 제품 등장은 이같은 복잡한 시장 변화를 반영한 결과이다.
기사제공= 시사저널 (곽동수 한국싸이버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