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 5,14)
해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시월 마지막 주일에는 글라렛 성인 축일을 기념하여 인제군에 살고 계시는 지역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을 경로잔치를 연다.
작년 시월 가을 경로 잔칫날.
아침 6시. 강원도 산골 인제 원통의 시월 말 아침은 한겨울의 추위를 느끼게 한다. 군불을 넣었지만 아직 한기가 느껴지는 경당에서 주님을 찬미하는 아침기도 찬미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수 안드레아, 레이첼, 바오로, 비오, 말구, 베드로, 예사네 식구들, 원기와 혜린이. 오늘 잔치의 나누미로 서울에서 온 안토니오 형제 친구들, 시몬, 요셉, 미카엘, 빈첸시오 형제 부부들. 인천 검단에서 온 토마네 식구들. 그 찬미의 소리에 평화와 기쁨이 묻어난다.
막바지 추수만을 앞둔 동네는 새벽 어스름 속에 아직 고요한 시간이다. 두툼한 겨울 잠바의 옷깃을 여미며 정수 안드레아가 나를 힐끗 돌아보며 미소를 보낸다. 애써 떨치고 나온, 장작불로 데워진 따끈한 잠자리가 그리운 모양이다. 누나의 손을 잡고 먼 공소 길을 걸어가던 어린 시절 글라렛 성인의 모습이 보인다.
아침기도를 마치고 식구들이 밖으로 나오자, 누리와 마루와 나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짖어대며, 폐분교 수도원은 낮의 활기를 찾는다. 식구들은 저마다 바쁘게 움직인다. 여기저기 서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자매들은 주방에서 아침식사와 잔치 음식들을 준비하고, 남자들은 청소와 잔치가 열릴 자리를 준비하며 손님맞이 채비를 차린다. 레이첼 팀장은 이력이 난 잔치집 과방장답게 능숙하게 전체를 통솔한다. 비오는 숙달된 솜씨로 두 개의 가마솥에 불을 지핀다. 어제, 말따, 살로메 자매와 월학3리 아주머니들이 다듬어 준비해 놓은 소머리를 다시 삶고, 해안에서 잡아온 흑돼지도 가마솥 약한 불로 계속 삶아야 한다. 7시 반. 식구들은 서둘러 아침식사를 한다. 활력과 기쁨으로 상기된 식구들의 모습에서 숙달된 직물공으로 활발히 살아가던, 그러나 동시에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을 위해 고민하던 청년시절의 글라렛 성인의 모습이 보인다.
9시. 오늘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를 도와줄 나누미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속속 도착한다. 봉사자로 오신 해안 공소, 천도리 공소, 월학리와 원통 신자들과 함께 식구들은 글라렛 성인의 천상 탄일을 기리며, 오늘 이 기쁘고 아름다운 날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의 주일미사를 드린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며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한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는 말씀과 함께 다들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한 기쁨에 넘쳐 잔치 준비에 나선다. 마당에서는 오늘의 주 메뉴인 소머리 국밥을 위해 고기를 썰고, 가마솥에 불을 지펴 밥을 한다. 잘 삶은 돼지고기를 썰어 편육을 만들고, 숯불을 피우며 생고기 숯불구이를 준비한다. 재가복지 주방에서는 해물파전, 잡채, 오징어무침, 시금치나물을 만든다. 모세가 준비하고 있는 잔치 무대 노래방에서 신나는 삼태기 메들리 노래소리가 흘러나오자, 신이 난 해안 요세피나 자매가 일하다 말고 고무장갑 낀 손을 흔들며 관광버스 춤을 춘다. 루시아 자매의 걸쭉한 입재담과 함께 작은 주방이 웃음소리로 들썩인다.
오전 11시. 말구 형제가 깨끗한 한복으로 곱게 단장하신 신남에 사시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운동장으로 들어서고, 바오로와 베드로 형제가 어르신들 가슴에 예쁜 꽃을 달아드리며 잔치 자리로 안내한다. 연이어 천도리, 서화리, 월학리, 기린 현리, 용대리, 원통리로 차량봉사자들이 어르신들을 모시고 속속 들어선다. 번쩍이는 교통 지휘봉을 들고 호각을 불며 주차를 안내하는 토마도 신이 났다. 술과 떡과 과일과 식사가 잔치 상에 차려지고, 운동장 한 가운데서 동네 농악팀의 농악 한마당이 펼쳐지면서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마이크를 잡은 우리 동네 반장, 김씨가 능숙한 솜씨로 어르신들을 춤과 노래 마당으로 이끌며 신명과 흥을 돋운다. 서화리 전씨 할머니, 부평리 옥금씨, 서흥리 광식이가 제일 신이 났다.
해마다 봄과 가을 경로잔치 때면 식구들과 나누미들, 그리고 우리 어르신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보여주신 혼인 잔치의 그 기쁨과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실감한다. 또한 가진 재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갖추어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우리가 이런 풍성하고 아름다운 잔치를 차리면서, 식구들은 ‘야훼 이레’,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다는 말씀과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한다.
1807년 12월에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 살렌트에서 태어나신 글라렛 성인께서는 일찍이 하느님의 이 크신 사랑을 체험하고, 이 사랑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으셨다. 하느님의 이 사랑을 모르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기쁨도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자신의 온 삶을 바쳐 기꺼이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그 부르심에 응답하셨다. 그리고 다섯 분의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수도회를 창설하시어, 땅 끝까지 복음을, 곧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신 하느님 나라를 전하라는 선교 사명을 이루신다.
올해는 글라렛 성인께서 탄생하신지 이백년이 되는 해다. 글라렛 성인과 같은 부르심을 받은 글라렛 선교사 형제들은, 이 위대한 선교사를 보내주시고, 사부로 맺어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오늘도 강원도 원통에서,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위대한 선물인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지금은 천상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열정적 선교사 마누엘 따르디오 신부님이 작곡한 ‘글라렛 선교사의 노래’를 마음으로 흥얼거리며.......
“주님 주신 위대한 선물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불타는 선교사,
가는 곳마다 사랑의 불꽃이 피어오르게 하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사랑에 불타오르기를 기도한다.
주님 주신 아름다운 이 세상을 위해 온 삶을 바쳐 사랑을 노래하는 선교사,
그 어떤 역경과 가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주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에 온 삶을 바친다.”
(2006년 가을 경로잔치. 동네 농악팀의 흥겨운 농악 한마당)
첫댓글 기도합니다. 그리고,드립니다. 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