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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이 없어지고 나니 이제는 행장이나 묘갈명을 부탁하여 쓰기가 힘들어진 것이 현실이고 일제시대에는 조선의 벼슬이 없으니 선비가 할 수있는것은 오직 가장이나 유사가 전부였고 마지막 유산이 되었다.
한산이문의 수당 이남규의 가장이 그렇다. 끝까지 읽어본이가 없어서 삼가게시해 보고자 한다. 물론 625가 다가오니 더욱 그런것 같다.
출처 수당집(修堂集) 가장(家狀)
조고(祖考) 가선대부(嘉善大夫) 궁내부 특진관 부군(宮內府特進官府君)의 장록(狀錄)
왕고(王考) 부군께서는 휘가 남규(南珪)인데 초휘(初諱)는 만규(萬珪)이고 자는 원팔(元八)이며 호가 수당(修堂)이다. 우리 이씨는 한산(韓山)을 그 관적(貫籍)으로 한다.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휘 곡(穀)과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휘 색(穡)이 모두 그 문장과 절의(節義)로 고려 말에 이름이 났으며,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영의정 호 아계(鵝溪) 휘산해(山海)와 좌참찬 호 석루(石樓) 휘 경전(慶全)이 있었는데, 공에게는 각각 12대조와 11대조가 된다.
그리고 5대조 휘 수일(秀逸)은 동부승지를 지냈고 호가 귀호(龜湖)인데 세상에서 ‘호서(湖西)의 군자’라고 일컬었다.
고조 휘 우명(宇溟)은 성균관 생원을 지냈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휘 광교(廣敎)는 성균관 진사를 지냈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종병(宗秉)은 병조 참판을 지냈고, 아버지 휘 호직(浩稙)은 내부 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되었으며 행 동부도사(行東部都事)를 지냈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인데, 아버지인 휘 중윤(重潤)이 감사를 지냈으며, 휘가 택(澤)이며 호가 취죽(翠竹)인 분의 후예이다.
부군은 철종 을묘년(1855, 철종6) 11월 3일에 서울의 미동(尾洞) 집에서 태어났다. 이 때 협판공이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왔기에 물어 보니 ‘용(龍)을 파는 장사치’라고 했다. 그래서 협판공이 후한 값을 주고 이를 샀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자 여종이 달려와서 공이 태어났다고 알려 주었던 것이다.
부군은 준수(俊秀)하고 총명하였다. 그래서 겨우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벌써 ‘지(之)’ 자와 ‘이(而)’ 자의 뜻을 캐물었다. 그리고 벌써 글을 지을 줄 알았는데, “가고 가도 산이 나와 끝이 없는데, 느린 해는 여태껏 아침 나절이구나.[去去山無外 遲遲日未中]” 하는 시구를 남겼다.
공은 번거롭게 과정을 정하고 공부를 하라고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은미(隱微)하고 오묘(奧妙)한 뜻을 깨달아 알았으며, 조용히 책상을 마주하여 그 뜻을 음미하였으므로 일찍이 글 읽는 소리가 들린 적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벌써 경전(經傳)과 사서(史書) 및 제자서(諸子書)에 모두 통달하였는데, 무엇이든 한번 보면 곧 외웠다. 글을 읽다가 옛 사람들의 의리가 격절(激切)한 곳에 이르면 문득 책을 덮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나라의 고사(故事)나 학통(學統)과 당론(黨論)에 관한 것들은 물론이고 씨족(氏族)의 원류(源流)와 사방(四方)의 풍토며 심지어 관방(關防)의 요험(要險)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갖추어 총괄하여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혹시 어렵거나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부군을 찾아와서 물었다.
어버이를 모실 때에는 공경하고 조심하여 순종해서 받들었으며, 그 부드럽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모부인(母夫人)은 성품이 매우 엄하였는데 그럴수록 더욱 성실히 받들어서 섬겼다. 형제간에 겉으로는 까다롭고 엄한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실제로 도탑고 우애로웠다. 그리하여 동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나 또는 그 조카가 요절(夭折)하였을 때에 그 가슴아파하고 슬퍼한 정도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했다.
고종 을해년(1875, 고종12)에 감시(監試)에 합격하였는데, 병자년(1876, 고종13)의 예조의 복시에 연이어 실패한 뒤 임오년(1882, 고종19)의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인 계미년에 분관(分館)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었다. 그 뒤 을유년(1885, 고종22)에 발탁되어 홍문관 교리와 문신겸선전관에 제수되었으며, 이 해 겨울에 휴가를 청하여 예산(禮山)의 고향으로 돌아가 어버이를 뵈었다. 병술년(1886, 고종23)에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공고(公故)에 지체하였다 하여 나처(拿處)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뒤 후영 군사마(後營軍司馬)와 부수찬을 역임하고, 10월에 옥사(獄事)가 있을 때에 문사 낭청(問事郞廳)으로 차출되었다.
다음 해인 정해년(1887, 고종24)에 서학 교수가 되었다가, 3월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여 분상(奔喪)하여 돌아왔는데,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을 더없는 한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거의 몸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이었으며, 그 수제(守制)가 매우 엄하였다.
그러다가 기축년(1889, 고종26)에는 또 아버지 협판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집상(執喪)하였다. 그 뒤 신묘년(1891, 고종28)에 상을 마친 뒤 홍문관 수찬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멀리 외부에 있다 하여 체직(遞職)되었다.
그러다가 6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동벽(東壁)에 소통(疏通)되어 부응교가 되었다가 장악원 정과 사간원 사간을 거쳤으며, 무시소(武試所)의 사헌부 시관(試官)에 차임(差任)되었다. 그 뒤 임진년(1892, 고종29)의 대보단(大報壇) 제향 때에 집준(執尊)한 공로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라 공조 참의에 제배되었고 옷감을 하사받았다.
다시 곧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이어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외부에 있었던 관계로 체직되었다.
갑오년(1894,고종31)에 형조 참의가 되었다. 그런데 이 때 무격(巫覡)의 풍습이 널리 번져서 민폐가 되고 있었으므로 부군께서 그 괴수를 잡아서 엄형(嚴刑)에 처하고 마을 거리의 음사(淫祠)들을 모조리 철폐하여 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들 이를 통쾌하게 여기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최복술(崔福述 최제우(崔濟愚)의 초명)이란 자가 좌도(左道 이단(異端)의 도)를 가지고 민중들을 현혹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사(有司)가 법을 집행하여 이자를 처형하였는데,
그러자 그 무리 수천 명이 궐문 밖에 몰려와서 울부짖으면서 저들의 괴수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래서 부군이 상소를 올려서 이들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 끝에 일본 군사들이 함부로 대궐을 범하는 일에 대하여 매우 준절히 성토하였다. 그리고 우부승지에 승진하였다.
그리고 이 해 여름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제수되었다. 영흥은 북방의 고을로서 본래부터 다스리기가 어렵다고 일컫는 곳이었다.
부군께서는 부임하는 즉시로 그들의 광액(鑛額)을 감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제거하였으며, 문교(文敎)를 장려하여 선비들의 기풍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일본 군사 수백 명이 들이닥쳐서 군루(郡樓)에 올라가서 으쓱대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군께서 문지기를 잡아들여서 엄장(嚴杖)을 쳤다. 그러자 저들 중의 대관(隊官)이 심지어 칼을 뽑아들기까지 하면서 공갈을 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부군의 사기(辭氣)가 더욱 엄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물러났다.
그 뒤 을미년(1895, 고종32)에 도망갔던 역신(逆臣)들이 다시 돌아와서 외구(外寇)의 무리와 서로 결탁한 채 지존(至尊)을 핍박하여 황후 민씨(閔氏)를 폐해서 서인(庶人)을 삼는 칙명을 내렸다. 부군께서는 이 칙명에다 서명하기를, “신이 비록 죽을지언정 감히 이 칙명은 받들 수가 없습니다.[臣雖死 不敢奉勅]” 하였으며, 단발령이 내리자 또 말씀하기를, “이 머리는 베일지언정 머리털은 깎을 수가 없습니다.[頭可斷 髮不可斷]” 하였다. 인하여 나라 일을 생각하니 울분이 북받쳐올랐으므로, 홀로 밤중에 고을 동쪽에 있는 군자루(君子樓)에 올라가서 강개(慷慨)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마침내 인끈을 풀어서 내던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떠나오면서 상소를 올려 모후(母后)의 지위를 다시 회복할 것을 청했으며 겸하여 원수를 갚고 도적을 칠 것을 아뢰었다. 그러나 권간(權奸)들의 방해를 받아서 위에 전달되지 못하다가 나중에 임금의 명이 있어서 들여보내 보시게 되었다.
그 뒤 같은 해 11월에 경연 부시강(經筵副侍講)으로 불러들였다. 병신년(1896, 건양1)에 대령(大嶺 조령) 남쪽에 이른바 의려(義旅)라고 일컫는 자들이 일어나서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고 심지어 수령들을 죽이기까지 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다.
그러자 부군을 불러서 안동부(安東府)의 관찰사를 제수하였다. 이에 부군께서 누누이 상소를 올려서 사퇴하였으나, 심지어 부군께 입대(入對)하라는 명까지 내렸으며 매우 간절하게도 면대하여 직접 타이르기까지 하였다. 부군께서는 드디어 비장한 마음으로 부임하였고, 도착하는 즉시 성지(聖旨)를 선포하고 백성들을 초유(招諭)하여 어루만져 주었는데, 얼마 안 되어 해임되어서 돌아왔다.
그 뒤 무술년(1898, 광무2)에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이에 부군께서 상소를 올려 민회(民會)를 배척할 것을 주장하고, 겸하여 경효전(景孝殿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의 궤전(饋奠)을 때가 지나도록 거두지 않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 하여 이를 중지할 것을 진달(陳達)하였으며, 또 진신(搢紳)들의 민회 참여에 대하여 논핵(論劾)하는데, 뒤이어 해직되어 시골로 돌아왔다.
기해년(1899, 광무3)에 비서원 승(秘書院丞)에 제수되었으며, 경자년(1900, 광무4)에 인조와 효종에게 존호를 추상(追上)하고 책보(冊寶)를 올릴 때에 대거(對擧)를 한 공로로 인해 가선대부의 품계에 올라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시 밀칙(密勅)을 받들어서 함경남북도 안렴사의 명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그 칙유(勅諭)에서 “경(卿)은 본래 공정하고 정직하고 청렴하고 명민하며 충성을 바친 바가 많다.[卿本公直廉明效忠爲多]” 하는 하교까지 있었으므로, 할수없이 명을 받들고 나갔다.
그리하여 한번 안찰하여 덕원 부사(德源府使) 윤치호(尹致昊)가 소요(騷擾)를 초래한 죄를 탄핵하고 두번째로 안찰하여 영흥 군수(永興郡守) 이윤재(李允在)가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된 죄를 탄핵하니, 이에 여러 고을들이 모두 이 소문만 듣고도 숙연해졌다. 그런데 채 몇 달이 못 되어서 도리어 모함을 받아 곧 소환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인하여 소를 올려서 자신이 보답하지 못한 바를 스스로 탄핵하고는 마침내 남쪽으로 내려와서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 오로지 독서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 뒤 을사년(1905, 광무9)에 여러 역적들이 외인(外人)들과 서로 결탁하여 거짓 조약을 맺어서 외부(外部)를 폐지해 버렸다. 부군께서 이 소식을 듣고는 통곡을 하면서 말씀하기를, “이제 가문과 나라가 모두 다 끝장이 나고 말았구나. 우리 임금님께서는 어떻게 지내는고.” 하였고, 마침내 봉장(封章)을 올려서 여러 역적들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이로부터 그 근심과 분노가 마침내 병이 되고 말았다.
그 뒤 병오년(1906, 광무10)에 홍양(洪陽)의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이 우리 집을 지나다가 들러서 묵게 되었다. 그런데 저들 무리들이 부군께서 뒤에서 이를 책동하는 것으로 의심을 하고는 부군을 공산(公山 공주(公州)) 감옥에 가두어서 유폐시켰는데, 순월(旬月) 만에 비로소 풀려나 돌아왔다. 그러나 저들은 이미 부군의 지조와 절개를 굽힐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정미년(1907, 광무11) 8월 19일 밤에 부군과 선군(先君)이 모두 온양군(溫陽郡)의 평촌점(坪村店) 시골 길가에서 동시에 해를 입고 말았다. 아, 슬프다. 저 막막하기만 한 하늘이시여.
이 날 오후에 느닷없이 보병과 기병을 갖춘 원수놈의 병사들 백여 명이 집에 들이닥쳐서 부군께서 잡혀 가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 때 외시형(外緦兄 외종형, 곧 이장규(李章珪)를 가리킴) 진사공(進士公)이 길에 나와서 작별을 하였다. 그러나 저자들의 창칼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중이라 다른 말은 할 수 없었고, 다만 부군께서 탄식하면서 말씀하기를,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몸일 뿐이라오.[不直一文錢]” 하였다.
아, 슬프다. 저처럼 화를 당하였는데도 아무도 이를 본 사람이 없었다. 이때 다만 두 종이 견여(肩輿)를 메고 따라갔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함께 해를 입고 말았으나 한 사람은 마침 칼을 맞고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남아서 나중에 그 당시의 일을 대강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이 날 왜병들은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걸어서 날이 저문 뒤에야 평촌 마을 앞에 있는 길에 도착을 했는데, 인가(人家)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때 통역이 부군에게 말하기를, “공은 본래부터 일본을 원수처럼 보고 있으니 장차 의병장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만약 머리를 깎고 귀순(歸順)한다면 살 수 있겠지만 그렇게 못 한다면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분노하여 꾸짖기를,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참으로 장차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그러나 죽으면 죽었지 굴복을 할 줄 아느냐.” 하면서 계속하여 호통을 쳐서 꾸짖었다. 그러자 마구 칼날이 날아들었다. 이에 선군(先君)과 두 종들이 몸으로 이를 막다가 마침내 함께 팔이 잘리고 부군께서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가다가 그만 동작이 멎고 말았다.
선군께서는 대신 죽기를 청하였지만, 역시 놈들의 독봉(毒鋒)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전후의 정황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어떤 자는 말하기를, 원수놈들이 칼을 내려칠 때에 선군이 부군 옆에 붙어서서 이를 가로막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선군이 먼저 피해를 당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온양 사람 유진원(兪鎭元)이 밤에 이 곳을 지나다가 이와 같은 변(變)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홀로 그 시신을 지키고 있었는데, 새벽녘이 되자 검은 구름이 몰려와서 한참 동안 시신을 가리고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튿날 시신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시신의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그 늠연(凜然)한 기품이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이 때 향년(享年)이 겨우 53세였다. 이 해 9월 모일에 예산(禮山)의 대술면(大述面) 한곡(閒谷) 모좌(某坐)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선조(先兆)를 따른 것이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휘 동석(東奭)의 딸이다. 우아하고 정숙하여 여사(女士)다운 행실이 있었다. 묘소는 당진군(唐津郡) 당진면(唐津面) 시동(柿洞) 모좌(某坐)의 언덕이다. 따로 묘지(墓誌)와 행장(行狀)이 있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충구(忠求)로 바로 우리 아버지이시다. 전주 이씨(全州李氏) 참봉 이희민(李熙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부실(副室) 소생의 아들 동구(同求)는 참판 조병건(趙秉健)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리고 손자 승복(昇馥)은 양천(陽川) 허근(許近)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창복(昶馥)은 특진관 이상설(李相卨)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고령(高靈) 신영호(申鑅浩)는 손서(孫婿)가 된다.
아, 슬프다. 부군께서는 기상이 대범하여 기개와 절조가 있었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억센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설(邪說)을 물리치기에 매우 힘썼으며 의리를 변석(辨析)함이 매우 밝고 투철하였다. 그리고 대사(大事)를 만나서 구차함이 없었으며, 혹시 누가 과오를 범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즉시 이를 꾸짖어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단지 집안의 항렬이 낮고 어린자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였다.
부군께서는 구차하게 세상 사람들과 야합하지 않았으며 오직 청의(淸議)만을 붙들었다. 그리하여 조정에 나간 이후 30년 동안에 비록 하찮은 직함(職銜)이라도 모두 저절로 위에서 주어진 벼슬들이었으며 일찍이 한번도 그 지름길을 찾거나 사사로이 구한 적이 없었다.
부군께서는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서 위아래가 모두 마치 조정처럼 엄숙하였다. 족당(族黨)들 간에는 서로 돈목(敦睦)하여 하나같이 환심(歡心)을 얻었으며, 집이 가난하여 혼례나 상례를 치르지 못하는 자라도 있으면 반드시 이를 넉넉하게 도와 주었다.
어느 날 반정(泮庭 성균관(成均館))에서 밤중에 돌아왔는데, 이 때 날씨가 몹시 추웠다. 마침 이웃집에서 아이를 해산을 하였는데 덮을 이불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들에게 신혼(新婚) 때의 이불을 가져다 주고, 또 옷을 전당 잡혀 쌀과 미역을 마련해서 이들을 도와 주었다. 이와 같이 위급한 사람들을 도와 주는 일들이 실로 많았다.
평생에 빈객(賓客)을 좋아하여 손님이 찾아오면 매번 주안상을 차려 내놓고는 경사(經史)를 이야기하고 고금의 인물들을 담론하면서 즐거워하였다.
집이 원래 청빈(淸貧)하였는데, 안팎의 벼슬들을 역임하면서 일정한 녹봉을 받게 되자 이것으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여 조복(朝服) 이외에는 비단 따위를 몸에 가까이 하는 일이 없었다.
외가의 족속 중 젊어서 과부가 된 이가 우리 집에 와서 의지해 살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재산을 나누어 주고 그 후사(後嗣)를 들여서 가문을 이어 주었다. 그리고 사촌 아우들 및 여러 숙모들과 함께 한집에 살면서 한솥밥을 먹은 것이 10년이었으나 집안들 사이에 간언(間言)이 없었다.
부군께서는 세상이 날로 글러지는 것을 보고는 벼슬길에 대한 생각이 없어졌으며, 오직 후진을 양성하는 일만을 당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그래서 멀리서부터 책을 싸 들고 찾아오는 자들이 많았다. 또 인심(人心)의부동(浮動)에 대한 것을 먼 계획으로 삼아서 물헌(勿軒) 이공 명익(李公明翊)과 함께 월과(月課)를 열고 절간에서 회합을 가졌으며, 마을에 향약(鄕約)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그만 몇 년이 못 되어서 난리가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의병이 홍성(洪城)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 부군께서는 초요(招邀 초청(招請))가 있을까 염려해서 문을 굳게 닫아걸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에 칩거(蟄居)하며 누워 지낸 것이 여러 달이었다. 부군의 기민하고 밝으신 통찰로써 어찌 시대의 대세를 미리 보지 못하고 잠깐 모였다가 금방 흩어져 버리는 그와 같은 일을 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국가의 변고가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아, 막막하기만 한 하늘이시여.
이 때 나는 겨우 열세 살이었다. 그러므로 부군의 모습을 겨우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며, 문장과 덕행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부군의 문하에 드나들던 분들의 말을 들어 보았더니, “그 문장은 탁월하였고 그 지조(志操)는 청고(淸高)하였으며, 몸가짐과 행동은 활달하고 광명(光明)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우람하여 마치 드높은 산봉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화기롭고 푸근해서 마치 봄바람처럼 훈훈하였다. 그런데 그만 아깝게도 그 온축(蘊蓄)한 것들을 펼쳐 보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 어찌 나라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지금 불초한 내가 그 문하에 드나들던 분들의 말을 통해서 부군의 평소 지행(志行)에 대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얻어듣게 되었으므로, 들은 것들을 위와 같이 찬술하고 이로써 장차 입언(立言)할 군자에게 자료로 제공코자 하는 바이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씀에 있어서는 차라리 질박할지언정 지나침이 없고자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불초손 승복(昇馥)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쓰다.
수은공파 대은 이수영 후손 수당 이남규 선조님 가장을 읽어보면 글을 남기다
첫댓글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잘 지내시지예. 매번 답변이 늦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