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초 황성신문은 희망찬 기사 하나를 실었다. “이 나라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보성전문’이 탄생하니 기대하라”는 것이었다. 기대할 만도 한 것이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뜻의 교명 ‘보성’은 고종 황제가 직접 지은 것이었고 설립자는 이용익이라는 사람이었다. 후일 손기정이 다리로 세계를 제패했다면 이용익은 다리로 자기 인생을 바꾼 사람으로 유명하다.
임오군란 당시 장호원으로 몰래 도망갔던 민비와 고종 간의 메신저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는 빠른 다리를 이용해서 2백 리 길을 왕복하면서 민비의 근황과 정국의 판세를 양쪽에게 전해 주었다 하니 후대에 태어났으면 분명 마라토너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함경도의 궁벽진 고을 명천 태생의 보부상이었던 그는 고종의 신임을 잔뜩 받으며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경이 되었고, 그 신분의 한계 때문에 시기와 모함에 시달리면서도 고종에게 충직하고 청렴했던 인물로 기억된다. 한때 일본에 납치되어 생활하면서 일본의 발전상을 본 그는 귀국 후 자신의 사재를 들여 보성 소학, 중학, 전문학교를 세운다.
…이 학원에서 배움을 받는 준재 여러분은 나라와 겨레를 이끌 독립과 자주를 이룩하기 바란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그저 외국어의 습득에만 급급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신문화의 창조를 위해 모든 분야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이에 법률경제 등의 새 학문을 닦아야 한다.
잘난 보부상 하나가 천 명의 양반 뺨을 때린다.
흡사 왕립학교처럼 직원 봉급도 왕실의 내탕금으로 지급되던 보성전문학교는 경술국치 후 이용익이 망명하고 일본이 왕실 재산을 차지하면서 재정 파탄 위기에 처했고 이때 구원투수로 나선 이가 천도교주 손병희였다. 손병희는 천도교도들의 성미를 모아 보성전문 살리기에 나섰고, 보성전문은 300만 천도교인들이 보낸 성미로 그 이름을 유지한다.
이후 1924년 교사를 종로구 송현동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때부터 5월 5일을 개교기념일로 삼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원래 이용익이 학교를 연 것은 4월 3일이지만 보성전문의 후신인 고려대학교가 개교기념일을 5월 5일로 잡으니 그를 따르고자 한다)
해마다 신학기에 고려대학교 앞에 가면 술 취한 고대생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주로 하는 ‘지랄’ 가운데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코 칼 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이라는 교호 외치기가 있다.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를 이 교호는 보성전문 시절부터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이 요령부득의 단어들의 유래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하다못해 고려대학교 응원단에 물어봐도 모른다. 그럼 적어도 70년은 넘었을 이 교호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들은 설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들어지는 이름들은 유럽의 혁명가나 반란자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칼 마시 케시 케시’다.
이 요령부득의 구호는 “칼 맑스가 계시다 계시다.”라는 말의 격음화 겸 축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물론 이 얘기를 하면 어떤 이들은 얼굴을 붉히며 아니라고 우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는 쪽이나 아니라는 쪽이나 명확한 근거 없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정황적으로 볼 때 칼 맑스설의 개연성이 큰 것은 사실이다. 보성전문은 반골의 기운이 꽤 강한 학교였고 따라서 좌익세가 만만치 않았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3.1 운동의 학생 지도부의 핵심은 보성전문 학생 강기덕이었고, 교장부터 강사 학생까지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한 학교였으며 이후 쟁쟁한 좌익들이 두각을 몸을 담았던 학교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남부군 총수 이현상도 보전을 다녔고, 강동정치학원 원장을 지냈고 빨치산으로 내려 왔다가 목 없는 귀신이 된 이호제도 보전 출신이었으며, 쌍룡그룹 창업주이면서 남로당 골수이기도 했던 김성곤도 보전을 나왔다. 꼭 좌익까지는 아니더라도 반골 기질은 일종의 교풍처럼 자리 잡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바대로 반골 기질과 꼴통 기질은 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이를테면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했던 유명한 깡패 신마적 엄동욱도 보전 출신이었다.
아무튼 해방 이후 종합대학교 고려대학교로 바뀐 뒤에도 반골 기질은 꽤 유별나서 4.19 때는 하루 앞서서 (원래 19일이 서울 시내 대학생들의 거사일이었는데 ‘고대’가 먼저 나서야 한다는 마음에 그 약속을 깼다는 설도 있다.) 거리로 나섰다가 깡패들과 육박전을 치르기도 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밟아도 밟아도 악으로 깡으로 데모하고 나서는 이 학교를 너무나도 미워한 나머지 일개 대학교에 대고 자그마치 ‘대통령 긴급조치'(7호)를 내리고 학교 문을 닫아거는 황당한 일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
학내 구성원들의 자긍심도 꽤 야무져서 전 총장 김준엽은 정권 측이 총리를 제안했을 때 “고대 총장을 지낸 내가 더 낮은 자리로 가면 되겠는가.”라고 일갈하여 단순하기 그지없는 ‘꼬드애’ (술에 취한 고대생들은 종종 자신들의 학교를 이렇게 발음한다) 생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학교의 자긍심과 명예와 품질은 21세기 들어서 급전직하한다. 이제는 냄새나는 막걸리 집어치우고 ‘와인 고대’를 하겠다고 기념식까지 열며 분위기를 잡다가 갑자기 막걸리 열풍이 불자 입맛만 다시는 모습까지는 그냥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하지만 이 학교의 요즘 풍모는 ‘갈수록 태산’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특목고생 몇 명이라도 더 받겠다고 온갖 편법과 비판과 심지어 교육부의 견제까지도 오불관언하고 모습은 재학생의 반 이상이 지방 출신이었으며 막걸리로 대변되는 서민 대학을 자처하던 과거와는 비교조차 어렵다.
몇 년 전 이건희 회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학생들을 발 빠르게 잘라 버리던 모습은 한때 대통령과 맞장을 뜨던 저항의 이미지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으며, 또 다른 학내 문제로 학생들을 출교시켰다가 학생들이 법원의 복교 판결을 받아오자 또 다른 징계를 내리는 꼼수 노릇까지 자행하는 데에 이르면, 과연 저 학교가 민족의 대학, 서민의 대학으로 자처하던 때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된다.
2007년 12월 이후 이 학교는 이른바 잘 나가는 동문들로 풍년과 만선을 이루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하지만 잘나가는 만큼 그들의 명예와 위신이 예전에 비해 탁월해졌다고는 볼 수 없는바, 나로서는 그 풍년가와 뱃노래 듣기가 매우 거북하고 불편하다. 연전에 읽었던 책 『검사님의 속사정』 중에서, 저자인 이순혁 기자가 어느 검사에게서 들었다는 말을 나는 어떤 송년회 자리에서 토씨 하나 틀림이 없이 접했던 것이다.
고대 출신들 봐라, 엄청 욕먹고 있잖아. 자기들이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줄 알고 날뛰는데 정권 바뀐 뒤에 어떻게 될 줄 알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원… 그런데 이 기자 (나한테는 김 PD) 혹시 고대 아니지?
아마도 웃음으로 얼버무린 것은 나나 이 기자나 같았을 것이다. 아. 어느 고연전엔가의 연대생의 구호를 들었을 때 허무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너희에게는 김연아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