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41 ( 충남 서천 신성리 갈대숲 –춘장대해수욕장 –홍원항)
꼼짝하지 않을 듯 그토록 더웠던 여름에게 갈대가 쓰고 있는 흘림체 이별편지를 읽기 위하여 서천으로 간다. 자신의 시절을 맞이하기 위하여 갈대는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이별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한산면을 휘돌아 흐르는 금강의 물결은 소리 없이 잔잔한데 비단결 손수건을 하염없이 흔들고 서 있는 신성리 갈대숲으로 가을처럼 파고들고 싶어 아침 일찍 서둘렀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서해안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이미 가을이 지천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어디서나 같은 것은 아니다. 조용한 낙지거리에 점심시간이면 우-하니 몰렸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잠깐의 소란이 아니면 마냥 적적하다. 시 한 편을 낭송하다가 거울 속을 들여다보며 노래 한 가락 흘리다가 세상이 돌아가는 풍경을 만나기 위하여 텔레비전에 눈을 꽂고 있다가 끝내는 내 손가락이 울리는 타이핑 소리에 흥분되는 시간으로 매일이 행복했었다. 그것으로 날마다 만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나와 보면 분명 소소한 행복과 특별한 행복의 색깔이 구분되어진다. 목포톨게이트를 지나면 수많은 자동차들이 달리다가 중간 중간 빠져나가고 새로 합류하면서 고속도로 위에서도 쉼 없이 만남과 헤어짐의 역사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그 틈에 내가 속하여 내가 원하는 목적지를 향하여 마음껏 달리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특별한 행복이다. 이곳에 오기 위하여 가을을 기다렸다. 아름다운 이별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때로는 작별의 인사도 없이 각자 제 갈길 바삐 돌아서는 이별이 있는가 하면 깨끗한 재회를 위하여 다시 만나자고 손 흔들어주는 갈대가 서 있는 가을 능선의 이별은 그지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곳 신성리 갈대밭은 금강과 서해 바다가 만나는 지대에 형성된 대단히 넓은 갈대밭이다. 갈대밭 초입에 도착해보니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드라마 [킹덤]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활용되어 남겨진 사진들이 친숙하다. 옆으로는 잔잔한 가을 햇볕이 여울지는 금강 물결이 아름다워 어디든지 덥석 주저앉아도 편안할 것 같았다. 올려다보면 신비롭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하늘과 새들이 함께 어우러진 여유가 진한 가을 커피 향처럼 가슴에 파고들어 머문다. 가을을 기다렸다가 비로소 가을과 함께 왔지만 사실 여름이었다면 푸른빛을 띠는 매력이 있었을 것이며 계절별로 미묘하게 다른 갈대의 소리를 느껴 볼 수 있었으리라. 갈대밭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진 샛길을 걷는 것도 재미있었다. 구부러진 모퉁이 길을 돌아보면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여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와 문득 돌아보면 연인들의 예쁜 모습에 뜬금없이 민망하여 돌아서면 다시 금강의 물결로 환해지는 이곳 신성리 갈대밭의 매력이었다. 한편 입구에 있는 갈대 체험관이 있었으나 여기까지 온 김에 춘장대 해수욕장까지 둘러볼 욕심으로 갈대밭만 한 바퀴 둘러서 서둘러 나왔다. 아마도 농경지 개간 이전에는 더 넓었던 갈대밭의 모습과 용도 또한 다양했으리라 여겨진다. 누구라도 꽃이라고 말한 적 없는 꽃 같은 꽃, 새어서 새어서 비로소 깨끗하고 그지없이 아름다운 꽃으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예쁘게 늙고 싶은 욕심하나 건져 본 서천 신성리 갈대밭 투어였다. 일찍 출발해서 여행을 시작하면 하루가 참으로 알뜰해서 좋다. 이제 점심시간이니 말이다. 춘장대해수욕장을 향해 가다보면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군산 휴게소를 지난다. 여행 중에는 그 지역의 맛 집을 찾아 즐거움을 더해보는 것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휴게소 분위기 즐기기를 좋아한다. 어느 휴게소나 같은 메뉴와 별 특별함은 없으나 몰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 눈에 넣고 사람 사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 참 좋다. 군산 휴게소로 들어간다. 그리고 군산의 유명한 꽁당 보리비빔밥을 주문한다. 군산은 매년 오월 이면 꽁당 보리 축제를 한다. 배고픈 시절 보리밥을 먹고 살아왔던 우리 세대는 꽁당 보리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 한편이 시큰해온다. 보리밥은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보리밥 속에 쌀밥은 어른들 몫이라지만 우리 집은 달랐다. 그나마 보리라도 섞인 밥은 할아버지 몫이었고 모조거나 고구마가 섞인 밥을 먹었기에 사실 어른이 되어서는 보리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릿대로 불렀던 보리피리 정도는 그 시절 자연과 함께 했던 낭만이었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 나는 시대라서 보리로 빵을 만들고 보리로 만든 음식이 건강식이라 하여 모두의 관심이 쏠릴뿐더러 그 꽁당 보리가 건강에 좋은 식품이라는 생각으로 그토록 싫어하던 보리비빔밥을 주문해 놓고 세월 참 격세지감을 느낀다. 군산휴게소에서 약 40km 떨어진 춘장대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길이 익숙하다. 주변도 익숙하다. 지난해 남편과 함께 다녀갔던 곳이다. 춘장대해수욕장에서 저만치 보이는 홍원항까지도 날마다 지나는 길목처럼 익숙한 풍경이다. 그렇다. 이렇게 다녀 놓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사전 인터넷 답사를 열심히 하고도 와서 보면 왔던 곳일 때가 있다. 그러나 익숙하기에 반갑고 활발해서 이미 아는 동네처럼 휘 둘러보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산다는 것은 시작도 끝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 또한 사실 별거 아닌 것들이다. 그러나 어디든 무엇이든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꿈을 가져 볼 일이다. 가을 맞으러 왔다가 벌써 봄을 기다린다. 군산의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 볼 요량으로 어느 오월이 무르익으면 그때도 역시 내가 주인공이 되어 군산항을 찾아오리라 여행 노트에 체크해 놓는다.
* 신성리 갈대밭 -충남 서천군 한산면 신성리 22-50 * 춘장대해수욕장 -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 산 46-1 * 홍원항 -충남 서천군 서면 도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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