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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간증하나 (눅 6:43-49)
[본문]
눅 6:43-49=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사도바울은 일찍이 고린도 지역의 교회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편지하기를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경고 하였다.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다르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예를 들어 말하면 복사 용지 한 장을 찢으면 다른 두 개로 나누인다. 찢어진 각각의 종이는 모양새가 다르지만 한 본질에서 나왔기 때문에 겉은 다르면서도 본질은 하나이다.
여기서 다르다고 할 때는 겉모양으로 다르다고 한다.
둘째로 다른 것은 똑 같은 크기의 신문지와 복사용지가 있다고 하자. 신문지와 복사용지는 겉모양은 같지만 본질은 전혀 다르다. 이럴 때는 모양은 같지만 본질이 다른 둘이 된다.
정리하면 겉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이 같은 다름이 있고, 겉모양은 같지만 본질이 다른 다름이 있다.
사도바울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라고 말하는 다르다는 것은 겉모양은 같은데 그 속의 본질이 다르다는 뜻이다. 언어적으로 들으면 같은데 그 안에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라고 해서 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확대하면 교회라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니고 성도라고 해서 다 성도가 아니란 말이 된다.
그러니 누가 “나 교회 다닙니다” “나 예수 믿는데요” 라고 해도 본질을 알기 전에는 한 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양의 탈을 쓴 이리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의 특징을 한마디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이라고 하였다.
갈 1:6-10=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른 복음의 특징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다른 복음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것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참 복음 속에는 인간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없다” 는 뜻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없으니 복음을 좋아할 리가 없다.
반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고 인간의 것을 자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을 판단한다면 다른 복음을 믿고 있음이 드러난다.
교회가 자랑하여야 할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어야 하는데 실상은 반대로 인간들의 행함이 자랑되어지고 있다.
교회마다 자기 교회 자랑하기에 바쁘다. 경쟁적이다. 우리 교회는 이런 이런 일을 합니다 라고 자랑들을 하고 있다. 세상에서 한 일들을 자랑하고 있다.
교회마다 많은 일을 하였다거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되면 여지없이 교회 안에서 간증이 되어진다. 예를 들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땃다거나, 유명한 연예인이거나, 어떤 선한 일을 하여서 사회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이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거나, 여하튼 유명인들을 불러다가 간증을 한다.
그러나 이런 간증과 사도바울이 간증한 내용과 비교하여 보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간증은 예수 믿기 전에는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었는데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나서 완전히 망하였다는 간증이다.
고전 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바울은 예수 믿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거지 같이 살았다고 간증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망했다고 한다.
고후 6:3-10=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의 간증은 하나같이 인간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피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아직까지 예수 믿고 바울처럼 망하였다는 사람의 간증을 들어보지를 못하였다. 전부 예수 믿고 잘 살게 되었다는 말만 들었다.)
만약에 바울의 간증을 세상 사람들에게 한다면 단 한 사람도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로 전도를 한다는 것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생생한 증거들이다.
사도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저주 받아야 할 교회들이다.
간증이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흔히들 은혜를 받았다거나, 복을 받았다거나, 병 고침을 받았다거나 라는 것들을 자랑하고 간증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간증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의 신앙관을 알 수가 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신앙 따라서 귀한 것이 다르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자랑한다고 하였다.
고전 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바울의 이 말을 뜯어보면 어떤 사람은 표적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지혜를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한다.
표적이란? 육신을 기준으로 잘 된 것을 말한다. 즉 병을 고침 받았거나 사업에 성공하였다거나, 자식이 출세하였다거나, 돈을 많이 벌었다거나 하는 등등의 일 들을 말한다.
한국교회의 대 다수 교인들이 자랑하는 간증이다.
지혜란? 이성을 바탕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은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적 바탕위에서 성경을 논한다. 주로 신학자들과 같이 고상한 것같이 행세하는 말쟁이들이다. 인류최고의 가치를 논하고 모든 종교가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식들의 고상한 가치들을 논한다. 대다수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행세하는 자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인데, 이는 인간들에겐 미련한 것이라서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정상인으로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여기는 십자가 도를 전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성령에 사로잡힌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속된 말로 예수 귀신에 뒤집어써야지만 십자가의 도를 전할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바울이 자신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 증거한다는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니고 예수님이 바울을 주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울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 전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일으킨 사건이다. 결국 바울의 간증은 자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간증인 셈이다.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사람들에겐 십자가는 삶에 의미이고 목적이다.
항상 무슨 일을 하여도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고 살아간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자기 인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예수님의 사건이 과거에 일어난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늘 자신의 삶 속에서 터져 나오는 사건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십자가에 예수인지 인간들이 조합해 낸 다른 예수인지 알 수가 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히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힌다고 한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제자들이 들을 때는 예수님이 지금 제 정신으로 말하고 있는가? 라고 의심할만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
성질 급하고 입 빠른 사람이라면 아니 예수님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포도나무가 포도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하지 그걸 무슨 큰 깨달음이라도 되는 냥 가르치고 있습니까? 라고 힐난할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덤벙거리기 잘하고 나서길 잘하는 성질 급한 베드로 같은 위인은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말은 제자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이 스스로는 좋은 나무라고 하면서 나쁜 열매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도 모르면서 따라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교인들이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있으며 믿음 믿음 하면서도 전혀 믿음이 없는 것과 같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문 46절을 보면 그렇게 유추 할 수가 있다.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한마디로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 제자들은 아연실색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아니 언제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있느냐 이다.
100% 마음에 들게는 못하였을지라도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따르고 있지를 않는가? 라고 항변 할 수가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온갖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을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잘 아시는 주님이 “너희들은 내 말을 안들어 쳐 먹는 인간들” 이라고 하셨다면 이 말씀 속에 다른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그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추적해 보자.
본문은 산상보훈을 마치면서 하신 말씀이다.
잘 알다시피 산상보훈은 문자적으로 보면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라는 식의 명령법들이다. 마치 윤리 도덕적 규범들을 말하고 있다.
즉 너희를 저주하는 자가 있다면 같이 저주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고 기도해 주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누가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돌려 대 주고,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에 팬티까지 벗어주고, 때리면 맞고 보복하지 말고, 오른 눈이 범죄하면 빼내 버리고 손이 범죄하면 찍어내고, 성질도 내지 말고 여자를 보고 이쁘다고 생각지도 말고,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누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거든 받을 생각하지 말고 빌려 주고, 누구를 비판하지도 말고, 맹세하지도 말고, 좁을 문으로 들어가고,,,,,
위의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일차적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산상보훈 말미에 본문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화가 나서 “에이 이 나쁜 놈들아 너희 놈들은 내가 말할 땐 예~ 예~ 하면서 돌아서고 나면 딴 짓하는 놈”들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 할 수가 있다.
(실제로 이 시대 한국교회에서 설교되어지는 모습들이 그러하다. 목사들은 설교를 하면서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 라고 닦달한다. 그러면서 당신들이 천국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고도 빛과 소금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불교 신자들보다도 착하게 살지 않느냐 라고 입에서 불을 뿜어 댄다. 그러면 교인들은 “아이구 잘못 했습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지켜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한다. 교인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주눅이 들고 신앙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힘이 들어진다. 아! 예수 믿는게 이렇게 힘이 드는가? 짜증이 난다. 성경은 예수 믿는 것이 복음이라고 하는데 복음(福音)이 아니라 고음(苦音)이다. 즉 기쁜 소리가 아니라 고생의 소리이다.)
그럼 산상보훈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또한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 안 듣는다고 책망한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제자들은 도대체 예수님의 어떤 말씀을 안 들었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산상 보훈을 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눈여겨보면 특이한 대목들이 나온다.
즉 “옛 사람에게 말한 것은 이런 것인데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라는 식의 말씀이다.
마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는 옛날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재 해석을 해 주시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그렇게 이해했지만 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이런 뜻이다” 라는 것이다.
이는 곧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말씀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안 지켰다고 몰아세우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들은 좋은 열매를 맺었다고 자부하였는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나쁜 열매만 주렁주렁 맺었다는 하는 것과 같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기들 딴엔 신앙생활 잘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있느냐?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옳고 그름을 모르는 무지이다.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보지 못한다고 하였더면 죄가 없을 터인데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져 있다” 고 하셨다.
본문이 말하는 나무와 열매를 유대인들에게 비추어 본다면 자기 신앙의 주제를 모르는 유대인은 나쁜 나무란 것이다.
마 15:8-9=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평가이지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헛되이 섬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헛 신앙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은 나쁜 나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다.
즉 나쁜 나무라는 것이다.
나쁜 나무이기 때문에 나쁜 열매를 맺힐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좋은 신앙이라고 믿어 왔던 유대인이나 제자들은 환장할 노릇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유대인들과 같은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는 자는 나쁜 나무이다.
즉 유대인들과 같은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나쁜 나무란 것이다.
유대인들을 나쁜 나무라고 한다면 좋은 나무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럼 누가 좋은 나무인가? 예수님 말씀을 듣는 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옳습니다! 맞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좋은 나무이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의 말씀에 옳다고 동의 할 수가 있는가?
산상보훈의 내용만 가지고도 동의할 사람은 없다.
어느 인간이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고 욕하지 않고 자기 눈을 빼내고 손을 찍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면 나쁜 나무인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나쁜 나무이다.
예수님만이 신상보훈대로 사셨으니 예수님만이 좋은 나무가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시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좋은 나무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고, 나쁜 나무를 악한 사람이라고 한다.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사람인가?
그것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말을 들어 보면 안다고 한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말을 열매라고 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선이 쌓여 있기 때문에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쌓여 있기 때문에 악한 말을 한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이든 악이든 “그 마음에 이미 쌓여 있다”는 것이다.
마음 속에 가득 쌓여 있기 때문에 자연히 내어 놓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로보건데 선한 사람은 선을 내어 놓을 수 밖에 없고,
악한 사람은 악을 내어 놓을 수 밖에 없다.
이걸 믿음으로 표현하면 그 속에 믿음이 있으면 믿음을 내어 놓을 것이고,
그 속에 믿음이 없으면 믿음과 반대되는 것을 내어 놓을 것이란 말이 된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반대는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곧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해답이 나왔다.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사람인가?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믿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자기가 한 일을 믿는 자는 악한 사람이다.
왜? 인간의 것을 내어 놓으면 악한 자가 되는가?
성경은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롬 3:23)” 고 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10)” 고 한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갇혔다 (갈 3:22)” 고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 (롬 11:32)” 고 한다.
이는 한마디로 인간 중에는 선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선한 사람이 없으니 인간의 것은 악한 것이 된다.
그럼 선한 사람은 누구인가? 죄 없는 사람이다.
아담 안에선 태어나는 자는 다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없다.
죄 없는 사람은 아담(세상) 밖에서 오신 분이라야만 한다.
아담 밖이란? 인간 밖에 세상인 “하나님 나라”에서 와야 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담의 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씨”로 와야 된다는 말이다.
그럼 하나님의 씨로 오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죄가 없는 참 사람” 이다.
“예수그리스도만 좋은 나무이고, 선한 사람” 이다.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말만 선한 말” 이 된다.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만 선한 일” 이 된다.
인간은 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인간에게선 선한 말이 나올 수가 없다.
당연히 인간이 하는 일은 악한 일이 되고 인간이 하는 말은 다 악한 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믿지 않는다.
설령 유대인들처럼 말씀대로 살았다 할지라도 선한 일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모두가 선한 일이 된다.
성전을 뒤집어엎는 일도 선한 일이 된다.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라고 한 말도 선한 말이 된다.
지옥에 가고 저주를 받으라는 말도 선한 말이 된다.
그럼 본문을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보자.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을 포도나무라고 표현하였다.
그렇다면 그 나무에 붙어 있는 성도 또한 포도나무가 된다.
이런 논리로 보면 선한 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사람은 자연히 선한 사람이 되고 예수님과 붙어 있지 않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 예수님의 말을 하게 되어 있고, 예수님과 떨어져 있으면 사람의 말을 하게 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말이 된다.
그럼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사람인가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그 속에 선이 쌓여 있으면 선한 말을 하고, 그 속에 악이 쌓여 있으면 악한 말을 하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제 그 말을 들어 보자.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를,,,,,
유대인들처럼 “우리가 말씀을 지킵시다” 라고 하면 그 속에 악한 놈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악한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안 되도록 불 순종 속에 가두어 놓았는데 순종하겠다고 설쳐 되니 하나님께서 가두어 놓은 것에 반항하는 것이므로 악한 놈인 것이다.
반대로 말씀 앞에서 “예수님께서 다 하셨는데요” 라고 하는 자가 선한 사람이 된다.
설령 자기가 그 말씀을 지켰다 할지라도 내가 지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키게 해주셔서 지킨 것입니다 라고 한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치고 이는 자신들이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친 것이라고 고백한 것과 같다.
행 3:12-16=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이런 상태를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한 것이라고 하였다.
벧전 4: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고 하는 것도 그 속에 선한 분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고백이다.
즉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 예수님이 하셨다고(하신다고) 할 것이고,
그 속에 예수님이 없으면 자신이 했다고(하겠다고) 할 것이다 라는 말이다.
이제 예수님은 나무와 열매를 집 짓는 비유로 결론을 맺고 있다.
예수님께서 조근 조근 제자들에게 말씀 하신다.
자! 어떤 두 사람이 집을 짓는다.
한 사람은 흙에다 집을 짓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여기 봐라! 흙은 나쁜 나무와 같은 너희 인간들이고,
반석은 좋은 나무와 같은 “나 예수” 다.
집 짓는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흙에다 집 짓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고,
반석에다 집 짓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은 인간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이고,
예수님의 사고방식은 예수님께서 대신 지켜 주신다는 사고방식이다.
즉 인간들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흙에다 집을 짓는 것과 같고,
예수님께서 대신 말씀을 지켜 주셨다고 믿는 것은 반석 위에다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심판관이신 하나님이 집을 준공 검사하는데 외형으로 하지 않고 터를 가지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느냐! 로 판단하시겠다고 한다.
선한 사람이 순종했느냐! 악한 사람이 순종했느냐! 로 따지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이냐! 인간이냐! 이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집을 지어 주시겠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 귀를 못 알아 먹고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들은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째서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느냐” 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왜? 내가 너희 대신에 이런 모든 말씀들을 지켜 낼 것이란 것을 왜 믿지 못하느냐 이다.
간증이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 속에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심이 들어 있는 사람은 입만 열면 예수님 자랑이 나올 것이고,
그 속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랑만 나올 것이다.
천국을 일컬어 “아들의 나라” 라고 한다.
아들의 나라란? 아들만 영광을 받는 나라 란 뜻이다.
인간의 영광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터에 집을 지은 자는 다 쓸어버리신다.
그럼 당신의 간증은 무엇인가?
당신 안에 누가 있는가? 당신인가? 예수님인가?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어렵지가 않다.
신앙생활을 억지로 하지 말라. 그러면 반드시 원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어 준다고 해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믿어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고, 믿어지지 않도록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
좋은 열매가 맺혀진다면 그 열매는 당신이 맺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맺은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자랑하지 말라. 오직 예수만 자랑하라.
예수님만 자랑하는 그대가 좋은 나무이고 성도이다.
좋은 나무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예수그리스도만을 자랑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예수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성도는 감사 이외에 할 것이 없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당신에게 이런 것들이 깨달아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