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스마트폰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다. 사진은 삼성의 엑시노스
스마트폰은 그 자체로 조그만 PC다. 인터넷에 접속하고, 게임을 띄우고, 음악과 동영상을 재생한다. 이렇듯 스마트폰은 PC에서 하는 일과 다름 없는 일들을 해낸다. PC에 인텔이나 AMD의 x86 프로세서가 들어가듯, 스마트폰에도 프로세서가 있다. 이를 모바일 프로세서 혹은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라고 부른다. 스마트폰의 성능을 가늠하는 핵심 요소다.
중앙처리장치(CPU)아니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프로세서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라고 부르기 시작한 까닭은 무엇일까. 휴대폰의 역사부터 짚어보자. 전화와 문자메시지만 나누던 초기 휴대폰에선 프로세서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프로세서보다 기지국 신호를 잘 잡아주는 모뎀에 더 신경을 썼다. 휴대폰 속 CPU 역할은 모뎀 속에 간단한 ARM 코어를 넣는 것으로 충분했다.
ARM의 설계는 프로세서 하나에 CPU코어와 부동소수점 처리 엔진, 캐시메모리, 버스 인터페이스까지 통합되는 구조다. 이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각 제조사들이 프로세서를 설계한다.
하지만 휴대폰에 컬러 화면을 표시하는 그래픽 디스플레이가 들어가고 자바(JAVA)나 위피(WIPI) 기반의 애플리케이션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점차 CPU의 역할이 늘어났다. 모뎀 속 프로세서 성능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MP3이나 동영상을 재생하기 위한 보조칩이나 보조프로세서가 붙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이 대중화하면서 보조프로세서의 성능이 더 크게 요구됐다. 이때부터 모뎀 속 ARM 프로세서는 모뎀과 통신, 하드웨어를 제어하는 쪽으로 특화되고 모뎀 외부에 자리잡은 별도 프로세서의 성능을 끌어올려 운영체제와 응용프로그램, 즉 애플리케이션을 구동하는 쪽으로 설계 방향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애플리케이션을 돌리는 데 특화된 프로세서라는 뜻에서 업계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마트폰을 고를 때 보게 되는 ‘엑시노스’, ‘스냅드래곤’, ‘테그라’ 등이 이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의 브랜드 이름이다. PC를 살 때 펜티엄, 애슬론 등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오히려 최근에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안에 모뎀을 통합하는 방식이 인기다. 통합되면 마냥 좋은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일단 칩 하나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기에 기판 설계가 쉽고 전력 소비도 줄어든다. 가격도 덩달아 떨어진다. 최신 아키텍처에 모뎀을 합치기에는 기술적으로 부담이 있다보니 아직까지는 기술이 안정화된 저가 스마트폰에 통합되는 경우가 많다.
저전력 프로세서를 만드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현재는 ARM의 아키텍처를 라이선스해서 쓰는 게 가장 일반화돼 있다. 코어 설계 라이선스를 가져와 마음대로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라이선스를 구입할 수 있고 기본적인 설계와 양산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제공하기에, 비교적 쉽게 프로세서 설계 시장에 뛰어들 수 있다. PC에 쓰는 x86 프로세서를 인텔과 AMD 외 다른 회사들이 만들지 못하다시피 하는 것과 비교된다.
ARM의 라이선스는 여러 버전을 두고 있다. 초기에는 ARM7, ARM9, ARM11 등의 프로세서가 저전력 위주의 시장에 채택됐지만 스마트폰 대중화 이후 고성능을 내기 위한 아키텍처로 ‘코어텍스(Cortex)’ 시리즈가 등장한다. 2013년 1월 기준으로 대부분의 스마트폰은 코어텍스 A9 아키텍처 기반 프로세서 코어를 기반으로 만든다. 삼성과 엔비디아는 이 아키텍처를 직접 구입해 반도체와 메모리, 콘트롤러 등을 집어넣어 하나의 칩으로 만든다. 칩 하나가 거의 컴퓨터의 역할을 도맡기 때문에 이를 SoC(System on Chip)라고도 부른다.
같은 아키텍처로 설계하면 성능도 같을까. 그렇진 않다. 삼성전자의 엑시노스4와 엔비디아의 테그라3은 똑같은 코어텍스 A9를 기반으로 만든 프로세서지만 실제 성능은 차이가 있다. 코어 자체의 성능은 같지만 SoC로 조합하면서 메모리 성능, 버스, 콘트롤러, 공정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해 성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ARM은 아키텍처 외에도 명령어 세트만 라이선스하기도 한다. 각 프로세서가 쓰는 명령어 세트를 처리할 수 있으면 같은 특성의 호환 프로세서를 만들 수 있다. 명령어 세트를 처리하도록 직접 칩의 설계를 하기 때문에 개발은 어렵지만 프로세서의 특징을 직접 손볼 수 있다. 전력 소비를 더 낮추거나 작동 속도도 높일 수 있다. 최신 아키텍처인 코어텍스 A15 기반의 프로세서를 당장 만들어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A9과 A15의 기술 일부를 섞어 중간 단계의 칩도 만들 수 있다.
퀄컴은 명령어 세트만 구입해 직접 칩을 설계한다. 현재 ARM 프로세서들이 1.5~1.7GHz 수준인 것에 비해 스냅드래곤 800 프로세서는 2.3GHz까지 클럭을 올릴 수 있다.
퀄컴의 스냅드래곤S4에 쓰인 ‘크레잇(Krait)’ 아키텍처가 이런 방식으로 설계됐다. 같은 작동속도에도 A9 프로세서보다 성능이나 전력 특성이 좋다. 작동 속도도 더 끌어올릴 수 있다. 애플도 4세대 아이패드와 아이폰5에 쓰인 A6와 A6X 프로세서를 비슷한 방식으로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에는 코어텍스 A15 기반의 프로세서가 주력 제품이 된다. 코어텍스 A9보다 2배 가까이 성능이 좋기 때문에 해상도가 더 높아지는 고성능 디스플레이를 원활하게 돌리기 좋다. 기술 발전 속도는 계속 빨라졌다. ARM은 2014년에는 다음 세대인 코어텍스 A57 프로세서를 내놓는다. 지금과 전력은 비슷하게 쓰지만 성능은 크게 늘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반대로 지금 나오는 제품들과 비슷한 성능을 내면서 전력은 훨씬 적게 쓰는 코어텍스 A53 프로세서 아키텍처도 나온다.
이는 각각 쓰일 수 있지만, 하나의 프로세서 안에 포함될 수도 있다. 고성능 코어와 저전력 코어가 각각 짝을 이루는 것이다. 높은 성능이 필요 없을 때는 저전력 프로세서로 돌리다가 버거워지면 고성능 프로세서로 일을 넘겨주는 방식이다. 이를 ‘빅리틀(big LITTLE)이라고 부른다. 각 단어를 뜻과 반대되게 소문자와 대문자로 표기한 것이 이 기술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 빅리틀의 원리를 보여주는 표다. 성능이 높아질수록 전력을 많이 쓰는데 낮은 성능이 필요한 구간에서는 저전력 프로세서 코어텍스 A7이 일을 맡고 임계점에 이르면 고성능 코어텍스 A15에 일을 넘겨준다.
빅리틀 기술을 처음 도입하는 프로세서는 삼성전자의 ‘엑시노스5 옥타’다. 고성능 4개, 저전력 4개가 합쳐진 4+4 코어 프로세서다. 2013년 주력 스마트폰에 들어갈 계획이지만 실제 이 프로세서가 기대를 모으는 시장은 저전력 서버 시장이다. 대기상태와 일처리가 늘어나는 상태가 뚜렷하게 구분돼 작동하는 것이 서버이기 때문이다. 작은 칩 하나에 많은 코어가 들어가다 보니 일을 여러 코어에 나누는 병렬처리 컴퓨터를 설계하기에 좋은 구조다. 서버 한 대에 수백 개의 코어를 집어넣는 설계가 서버 제조사들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CPU 제조사는 단연 인텔이다. 인텔은 노트북, 데스크톱을 비롯한 PC와 고성능 워크스테이션, 서버까지 ‘컴퓨터’라고 부르는 시스템에 쓰는 CPU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유난히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낯설다.
인텔도 ARM 프로세서를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1999년 스트롱암(Strong ARM)을 내놓고 PDA 시장의 문을 두드렸고, 2002년 엑스스케일(Xscale) 프로세서를 통해 ARM 프로세서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PDA 시장이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고 모바일 컴퓨팅의 중심이 노트북 쪽으로 흐르면서 인텔은 ARM 사업부를 마벨테크놀로지에 매각하고 펜티엄, 셀러론 등 PC용 x86 프로세서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당시에는 ‘잘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수백 달러씩 하는 프로세서가 날개돋친듯 팔리는 상황에 10달러 안팎의 칩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매출에는 큰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인텔이 스마트폰용으로 개발한 아톰 프로세서 Z2460이다. 싱글코어지만 자체 성능이 좋고 하나의 코어가 두개의 스레드를 처리하는 하이퍼스레딩(Hyper Threading) 기술이 적용된다. 모토로라와 레노보의 스마트폰에 쓰인다.
하지만 불과 2~3년만에 스마트폰 시장이 폭발하면서 인텔은 하루아침에 구경꾼 처지가 됐다. 물론 스마트폰이 많이 팔리면서 제온 프로세서를 쓴 서버가 기록적으로 팔렸지만, 스마트폰 그 자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었다.
최근 인텔은 저전력 x86 프로세서인 ‘아톰(Atom)’을 스마트폰에 넣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성능 높은 x86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전력 소비를 낮추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저전력을 바탕으로 성능을 올리는 ARM 진영과 직접 맞부딪치게 된다. 현재 인텔의 모바일 아톰 프로세서는 레노버와 모토로라를 통해 생산되고 있다. 공정과 아키텍처 개선으로 ARM 진영이 독식하고 있는 모바일 시장을 되찾고자 인텔은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