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楊根縣. 이재호 박사의 주석에 따르면, 오늘날의 경기도 양평군의 일부라고 한다 – 옮긴이) 소수(小守. 신라의 벼슬 이름. 지방을 다스리던 벼슬아치를 일컫던 말이다. 군[郡]의 태수[太守]보다는 낮고, 현령[縣令]보다는 높은 벼슬이었다 – 옮긴이)로 삼았다.
집사성(執事省. 원래는 ‘집사부[執事部]’로 불렸던 신라의 관청.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맡아서 관리했다. 위로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었고, 아래로는 행정을 나누어 맡은 여러 관부[관리들의 부서]들을 거느렸다 – 옮긴이)의 사(史. 여기서는 ‘갈마[역사]’가 아니라 벼슬 이름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신라의 중앙 관직이며, 관청에서 말단의 행정 실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 옮긴이)인 ‘모초(毛肖)’는 (자옥을 소수로 삼은 조치에 – 옮긴이) 반박하여 (임금에게 – 옮긴이) 아뢰었다.
“자옥은 (비록 – 옮긴이) 서적을 읽었지만, (예전에 – 옮긴이) 관직에 등용되지 않았으니, 지방 행정의 직책을 맡길 수 없습니다.”
시중(侍中. 집사성의 으뜸 벼슬 – 옮긴이)은 (자옥을 소수로 삼은 일을 – 옮긴이) 논평하여 (임금에게 – 옮긴이) 아뢰었다.
“비록 책을 읽어서(그러니까, 공부하느라 바빠서 – 옮긴이) 관직에 등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학생이 되었으니(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스웨덴이나 도이칠란트나 영국에 유학해서 박사학위도 땄으니’ - 옮긴이), 어찌 (그를 – 옮긴이) 쓰지 못하겠습니까?”
왕(후기신라의 임금인 ‘김경신[金敬信]’. 시호 원성왕 – 옮긴이)은 이 말(시중의 말 – 옮긴이)에 따랐다.
- 『 삼국사기 』 「 신라본기 」 < 원성왕 > 5년( 서기 789년 ) 조
이를 논평한다.
오직 학문을 하고 나서야 도(道. 이치/가르침 – 옮긴이)를 들어서 알게 되고, 도를 들어 알고 난 뒤에야 (모든 – 옮긴이) 일의 본말(本末. 일의 처음과 끝 – 옮긴이)을 밝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한 뒤에 벼슬하는 이는, 일을 하는 데에 근본이 되는 것을 먼저 하게 되므로, 말단(末端. 맨 끄트머리/마지막 – 옮긴이)은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한 개의 벼리(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놓은 줄. 이것을 잡아당겨 그물을 오므렸다 폈다 한다 – 옮긴이)를 들게 되면 많은 그물코(그물의 매듭이나 실 사이에 열린 공간 중 하나 – 옮긴이)가 이에 따라서 모두 바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설령 벼슬길에 올랐다 하더라도 – 옮긴이) 학문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이와 반대로 일의 선후(先後. 앞뒤/먼저와 나중 – 옮긴이)와 본말(本末. [일의] 처음과 끝/ [일의] 근본과 대수롭지 않은 일 / [일의]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부분 – 옮긴이)의 차례가 있음을 모르고,
다만 자질구레하게 지엽적(枝葉的. 본질적이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 옮긴이)인 것에만 정신을 기울여서 혹은 백성들의 재물을 거둠으로써 (자신의 – 옮긴이) 이익을 삼고, 혹은 (일을 – 옮긴이) 너무 까다롭게 살핌으로써 (자신과 같은 부류와 – 옮긴이) 서로 존중하니,
비록 (그가 – 옮긴이)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해도 (그 결과는 – 옮긴이) 도리어 이(나라와 백성 – 옮긴이)를 해치는 것이다.
이 때문에 「 학기(學記. 유교 경전들 가운데 하나인『 예기(禮記) 』의 편 이름 – 옮긴이) 」 의 말은 ‘근본을 힘쓰는 것’에서 끝을 맺었으며, 『 서경(書經. 또 다른 이름은 『 상서(尙書) 』. 유교 경전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른바 ‘요순시대’부터 서주[西周] 왕조 때까지의 문서들을, 더 정확히는 행정상의 문서들을 모아서 펴낸 책이다 – 옮긴이) 』 에도 또한 “배우지 못하면 담벼락을 마주하듯 아무런 소견(所見. ‘생각하는[見] 바[所]’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 옮긴이)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이 – 옮긴이) 일에 임하면 오직 답답할 뿐이다.”하고 했으니, 집사성 모초의 그런 말을 어찌 ‘만세의 본보기’라 할 수 있겠는가?
- < 원성왕 > 5년 조에 들어간 김부식의 논평
(이재호 박사가 배달말로 옮긴 『 삼국사기 』 제 1권에 실린 번역문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이를 바로잡는다. 이 박사는 “執事毛肖一言 可爲萬世之模範者焉[집사모초일언 가위만세지모범자언]”을 “집사성 모초의 한마디 말은 능히 만세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로 옮겼지만,
내가 한자의 뜻을 찾아본 바에 따르면 ‘언[焉]’에는 ‘어찌’라는 뜻이 있고, ‘위[爲]’에는 ‘인정하다.’는 뜻이 있으므로, - 그리고 김부식 본인의 논평에서 “학문을 배우는 게 먼저고, 벼슬길에 오르는 일은 나중에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므로 – 이 문장은 “집사성 모초의 그런 말을 어찌 ‘만세의 본보기’라 할 수 있겠는가?”로 옮겨야 한다.
대학에서 “사학과를 졸업”하고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문학박사 학위”도 받았던 지식인[이재호 박사]이 한문[漢文]의 문장을 이렇게 잘못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대중에게 ‘학자나 지식인이 하는 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며, 그들도 사람인 이상 잘못 알거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거나, 실수/실패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우리가 그들을 의심하며 따져보아야 할 때가 있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하긴, 만약 학자가 ‘완벽하고 착한 사람’이라면, 식민사학자들이나 사대주의/중화사상에 물들었던 근세조선의 역사학자들이나 독재정권에 봉사한 어용학자들이 왜 나오겠는가? 마크 램지어 ‘교수’ 같은, 피해자(한국인 여성들)를 모욕하고 가해자(왜군[倭軍]의 성노예 착취를 부추긴 근대 왜국[倭國] 정부와 왜국 군대)를 편드는 뻔뻔한 인간이 왜 나타났겠는가? “인종에는 우열이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서기 19세기의 서양 백인 학자들이 왜 나타났겠는가?]
반지성주의는 당연히 미덕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의 극으로” 가서 엘리트주의를 ‘대안’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교사나 교수나 학자나 지식인은 신[神]이나 슈퍼컴퓨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임을 명심하자! - 옮긴이)
☞ 옮긴이의 말 :
나는 김부식 공(公)의 논평에 동의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 그러니까 공부를 하고 나서 그 일을 해야 일을 잘 할 수 있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는데 무턱대고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배움이 먼저고 등용되는 건 그 다음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화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악기를 다루는 법을 알고 나서야 음악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요리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다!
나는 비록 김부식 공의 신라 중심주의나 중화사상이나 남성 우월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이 논평처럼 그 세 가지에서 벗어나 논리와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글에는 충분히 공감하며,
이 논쟁과 논평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주는 바가 있다고 여겨, 그 논평이 달린 『 삼국사기 』 기사와 논평을 함께 인용/소개한다.
(참고로, 이 논쟁이 일어난 게 지금으로부터 무려 1234년 전의 일이다. ‘학문이 먼저냐, 벼슬살이한 경험이 먼저냐?’ 하는 논쟁은 이미 그 때부터, 그러니까 고대 후기나 중세 초기부터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 공이 이 논쟁에 대해 논평하면서 “학문을 익히는 게 먼저고, 벼슬살이는 나중이다.” 하는 결론을 내린 게 지금으로부터 878년 전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9세기 전인 서기 12세기 전반의 후기 고리[高麗] 사회에서, 보수파이자 고위관리고 유학자인 지식인/역사가가 ‘입신양명이나 출세보다는 먼저 배워서 기본을 갖춰야 하고, 옳고 그름부터 알아야 한다.’/' 벼슬을 요구하려면, 먼저 공부하고 나서 요구해라! ' 하고 주장한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학위나 재산이나 생김새나 집안을 자랑하지 말고, 재물이나 자리를 탐내지 말고] / [옳고 그름을 제대로 배워서] 먼저 인간이 되어라.’하고 말한 셈이라고나 할까?
‘벼슬을 맡아서 나랏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을 중세시대의 유학자가 “벼슬보다 배움이 더 중요하다.”/"배워서 자격을 갖춘 자라야 벼슬에 나설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은, 우리가 ‘낡고, 형편없다.’고 여기는 전통사회/전근대사회가 과연 “버릴 것만 가득한 사회”였는지, 그리고 유학자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100% 옳은 것인지 의문을 품게 하는 근거가 된다)
― 단기 4355년 음력 12월 23일에, “우리는 고전(古典)이나 역사책에 ‘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온고지신(溫故知新)>은 진리다.”고 생각하는(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사는 시대나 국적도 다른 사람이 남긴 책에서 내가 공감/동감/동의할 수 있는 말이나 글을 찾아낼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