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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를 솎아서 한컷의 사진으로 만든다면 어떤 모습들을 담으려고 애쓸까?
어떠한 삶이 다 아름다운게 아니며,어떠한 삶이 모두 불행한건 아니라고 정의부터 내려 놓고 보자.
이 두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뒤섞여서 흥고성쇠(興苦盛衰)하며 인간에게 희비를 안기는 것이다.
한(漢)나라 원제(元帝)에게는 후궁이 셀수 없이 많았던 모양이다.
자신이 친히 고를 수 없으리 만큼 많았다면 그 수효가 얼마나 됐을까??
그래서 꾀를 내기를 화공(畵工)에게 그리게 해서 그림을 보고 그날의 파트너를 골랐다.
문제는 절대 권력을 쥔 화공에게 있었다.
그 성총을 빌어 축재의 수단으로 삼았다.
돈 푼 깨나 찌르면 예쁘게 그려서 원제의 선택을 유리하게 만드는 기교를 부렸다.
그런 탐관오리( 貪官汚吏)의 농간에 도도하게 목을 외로꼬고 한푼도 안준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왕소군이다.
화공은 당연히 그녀를 추녀로 그려서 황제의 그림자도 못밟게 세도를 부렸다.
밖의 사정은 흉노(지금의 터키)의 선우가 힘을 길려 중원을 압박했다.
그런 선우가 "중원여자 어떻느냐며"사자를 보내 묘한 악수를 청해온다.
그래도 자존심은 살았던지 원제는 화공이 그린 그림을 나열해 놓고 가장 못생긴 여자를 골랐다.
당연히 왕소군의 얼굴에 낙점(落點)이 찍혔다.
그러나 막상 떠나는 왕소군을 본 원제는 가슴이 진탕되도록 그 미색에 놀랐다 하니,여자의 울 속에서 사는 황제의 가슴을 진탕시킨 미색이라면 얼마만 했을까?
화공의 목을 자를 만큼 노염난 황제에게서 우매한 광대의 질펀한 널음새(말이나 사물을 펼쳐 놓는 솜씨)만 느껴지니 이를 어쩌나.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呼韓邪)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呼韓邪)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呼韓邪)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呼韓邪)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王昭君)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리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王昭君)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王昭君)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毛延壽)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王昭君)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王昭君)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王昭君)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王昭君)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昭君)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왕소군(王昭君)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王昭君)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 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王昭君)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 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王昭君)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커다란 창밖으로 벗꽃은 버그러지고 미풍에 눈가루 처럼 꽃잎지매, 흔들의자는 지향없이 까불고, 잘 익은 커피를 예쁜잔에 담아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뜻대로 성장해가는 자녀의 진로를 생각한다.
입체 영상물을 얻을 수 있다면 이만한 풍경이 있을까?
왕소군이 선우에게 가던 그 봄에...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이(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
시인들은 그녀의 불운을 그렇게 노래했다.
봄은 왔고 또 벗꽃은 벙그러졌다.
올 봄엔 회원 모두의 가정에 웃음이 만개하길 기원한다.
"춘래불사춘"은 우리와는 무관한 울 너머 먼 곳의 이야기다.
계절은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그 봄, 3월하고도 상순(上旬)을 넘겨 중순이니 봄임에 틀림이 없으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 날씨도 영하를 체감할 정도의 차가운 날씨다.
문득 이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싯귀가 머리에 떠오른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뜻이겠다.
날씨가 그렇고, 아마튜어 정권의 말기에 이르기까지 오만한 국정운영이 그러며, 오히려 더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서민들의 삶이 그러하고, 의지할 데 없어 방황하는 인생 말년의 심경이 또한 그러함에서다. ‘꽃샘추위에 중늙은이 얼어죽는다'더니 봄 날씨 한번 매섭고 야멸차구나 싶다.
꽃샘추위를 언급하며 「그래도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열변을 토하던 말들을 떠올려 본다...
밖으로 나오니 모퉁이 기와집의 정원에 흰 목련이 소담스레 활짝 피어있다. 이 한파에도 백설같은 윤기로 목련이 만개한 것을 보니 내가 지금 봄에 와 있는지 겨울에 머무르고 있는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추위에 떨고 있을 하얀 목련에 시선을 한번 준다.
오늘 우리가 갖가지의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을지라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봄이 되듯이 우리의 인생살이에도 은총과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강조하시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머잖아 따뜻한 봄햇살이 다시 이 대지를 포건히이 보듬어 안을 것이려니...
삶에 애환이 없으면 멋이 없는 삶이겠다. 곡절없는 인생살이를 어찌 아름답다고 할 수 있으랴. 눈물도 흘려야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분노할 줄도 알아야 세상이 공의로워질 것이라 믿는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의‘소군원(昭君怨)'이란 시에서 유래했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떠올려본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
자연히 옷의 혁대가 느슨해지니
이는 허리와 몸매를 위함(미녀가 되려함)이 아니었도다.
--왕소군(王昭君).
대단한 미색이었다죠?
별명을 "낙안(落雁)"이라고 했답니다.
왕소군이 켜는 비파소리에 날아가던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또다른 그녀의 이름.
중국의 4대 미녀(왕소군, 서시, 초선, 양귀비)로 불려졌다니 필설로 어찌 그 미모를 다 형용할 수 있으랴.
회한을 안고 살아가기란 왕소군이나 나나.
꽃샘추위에 원망을 품고 있자니 느닷없이 운명에 희롱 당한 미색 짙은 한 여인의 탄식이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져 오늘 내 가슴도 답답히 미어지는 듯 하다. 어이하여 이런지, 정녕 봄은 내 뜨거운 가슴 가까이 와 있다는 말인가.
삶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를 솎아서 한컷의 사진으로 만든다면 어떤 모습들을 담으려고 애쓸까?
어떠한 삶이 다 아름다운게 아니며,어떠한 삶이 모두 불행한건 아니라고 정의부터 내려 놓고 보자.
이 두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뒤섞여서 흥고성쇠(興苦盛衰)하며 인간에게 희비를 안기는 것이다.
한(漢)나라 원제(元帝)에게는 후궁이 셀수 없이 많았던 모양이다.
자신이 친히 고를 수 없으리 만큼 많았다면 그 수효가 얼마나 됐을까??
그래서 꾀를 내기를 화공(畵工)에게 그리게 해서 그림을 보고 그날의 파트너를 골랐다.
문제는 절대 권력을 쥔 화공에게 있었다.
그 성총을 빌어 축재의 수단으로 삼았다.
돈 푼 깨나 찌르면 예쁘게 그려서 원제의 선택을 유리하게 만드는 기교를 부렸다.
그런 탐관오리( 貪官汚吏)의 농간에 도도하게 목을 외로꼬고 한푼도 안준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왕소군이다.
화공은 당연히 그녀를 추녀로 그려서 황제의 그림자도 못밟게 세도를 부렸다.
밖의 사정은 흉노(지금의 터키)의 선우가 힘을 길려 중원을 압박했다.
그런 선우가 "중원여자 어떻느냐며"사자를 보내 묘한 악수를 청해온다.
그래도 자존심은 살았던지 원제는 화공이 그린 그림을 나열해 놓고 가장 못생긴 여자를 골랐다.
당연히 왕소군의 얼굴에 낙점(落點)이 찍혔다.
그러나 막상 떠나는 왕소군을 본 원제는 가슴이 진탕되도록 그 미색에 놀랐다 하니,여자의 울 속에서 사는 황제의 가슴을 진탕시킨 미색이라면 얼마만 했을까?
화공의 목을 자를 만큼 노염난 황제에게서 우매한 광대의 질펀한 널음새(말이나 사물을 펼쳐 놓는 솜씨)만 느껴지니 이를 어쩌나.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呼韓邪)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呼韓邪)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呼韓邪)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呼韓邪)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王昭君)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리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王昭君)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王昭君)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毛延壽)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毛延壽)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王昭君)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王昭君)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王昭君)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王昭君)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소군(昭君)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왕소군(王昭君)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王昭君)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길 없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 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王昭君)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 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王昭君)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커다란 창밖으로 벗꽃은 버그러지고 미풍에 눈가루 처럼 꽃잎지매, 흔들의자는 지향없이 까불고, 잘 익은 커피를 예쁜잔에 담아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뜻대로 성장해가는 자녀의 진로를 생각한다.
입체 영상물을 얻을 수 있다면 이만한 풍경이 있을까?
왕소군이 선우에게 가던 그 봄에...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
이(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
시인들은 그녀의 불운을 그렇게 노래했다.
봄은 왔고 또 벗꽃은 벙그러졌다.
올 봄엔 회원 모두의 가정에 웃음이 만개하길 기원한다.
"춘래불사춘"은 우리와는 무관한 울 너머 먼 곳의 이야기다.
계절은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그 봄, 3월하고도 상순(上旬)을 넘겨 중순이니 봄임에 틀림이 없으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 날씨도 영하를 체감할 정도의 차가운 날씨다.
문득 이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싯귀가 머리에 떠오른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뜻이겠다.
날씨가 그렇고, 아마튜어 정권의 말기에 이르기까지 오만한 국정운영이 그러며, 오히려 더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서민들의 삶이 그러하고, 의지할 데 없어 방황하는 인생 말년의 심경이 또한 그러함에서다. ‘꽃샘추위에 중늙은이 얼어죽는다'더니 봄 날씨 한번 매섭고 야멸차구나 싶다.
꽃샘추위를 언급하며 「그래도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니 어찌하겠습니까?」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려 열변을 토하던 말들을 떠올려 본다...
밖으로 나오니 모퉁이 기와집의 정원에 흰 목련이 소담스레 활짝 피어있다. 이 한파에도 백설같은 윤기로 목련이 만개한 것을 보니 내가 지금 봄에 와 있는지 겨울에 머무르고 있는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추위에 떨고 있을 하얀 목련에 시선을 한번 준다.
오늘 우리가 갖가지의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을지라도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봄이 되듯이 우리의 인생살이에도 은총과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강조하시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머잖아 따뜻한 봄햇살이 다시 이 대지를 포건히이 보듬어 안을 것이려니...
삶에 애환이 없으면 멋이 없는 삶이겠다. 곡절없는 인생살이를 어찌 아름답다고 할 수 있으랴. 눈물도 흘려야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분노할 줄도 알아야 세상이 공의로워질 것이라 믿는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의‘소군원(昭君怨)'이란 시에서 유래했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떠올려본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구나!
자연히 옷의 혁대가 느슨해지니
이는 허리와 몸매를 위함(미녀가 되려함)이 아니었도다.
--왕소군(王昭君).
대단한 미색이었다죠?
별명을 "낙안(落雁)"이라고 했답니다.
왕소군이 켜는 비파소리에 날아가던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또다른 그녀의 이름.
중국의 4대 미녀(왕소군, 서시, 초선, 양귀비)로 불려졌다니 필설로 어찌 그 미모를 다 형용할 수 있으랴.
회한을 안고 살아가기란 왕소군이나 나나.
꽃샘추위에 원망을 품고 있자니 느닷없이 운명에 희롱 당한 미색 짙은 한 여인의 탄식이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져 오늘 내 가슴도 답답히 미어지는 듯 하다. 어이하여 이런지, 정녕 봄은 내 뜨거운 가슴 가까이 와 있다는 말인가.
첫댓글 옮긴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