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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동 자율방범대원들과
태고교 - 장군약수터 - 상여봉바위 - 낙조대 - 낙조산장 - 마천대 - 금강구름다리 - 대둔산관광호텔 - 공용주차장
6km
대둔산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이며 하나의 산을 두고 전북과 충남에서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대둔산은 한국 8경의 하나로 산림과 수석의 아름다움과 최고봉인 마천대를 중심으로 기암괴석들이 각기 위용을 자랑하며 늘어섰다. 안심사는 1759년(영조 35)에 세운 것이나 6·25 때 소실되고, 지금은 석종계단(石鐘戒壇)과 부도전중건비(浮屠殿重建碑)만 남아 있다. 화암사에는 보물 제662호인 우화루(雨花樓)와 명부전·극락전·대불각 등이 있다.
암봉 주위 빽빽한 나무들의 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제각각 다른 모습의 바위가 그 자태를 드러낸 위로 흰 눈이 쌓인 풍치는 대자연이 빚은 조각 전시장. 그러나 단풍으로 물든 만추의 풍광도 놓치기 아까운 풍치. 오색단풍이 기암괴석과 어울려 협곡마다 비단을 펼쳐놓은 듯해 돌계단을 따라 오르는 등산객들 가슴까지 물을 들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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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김장을 하게 되었다. 벼락치기 하듯 했으니 방바닥에 누우려니 허리가 펴지지 않는다. 몇 시간 자고 아침
6시 30분 초소에서 만나 대둔산로 가려는데..비가 올것 같기도 하고 지도를 찾아 대둔산 산행로를 찾고 텔레비젼으로 밤
을 채우고 초소로 간다. 감사님, 총무님과 방범차에 이것저것 챙겨 200키로의 여정에 몸을 싣는다. 150키로로 검색
이 되던데 알고 보니 검색만 하고는 다르다는 거리를 알게 된다. 2시간 30분이면 대둔산 공용주차장에 도착예정일 것
같은데 가면서 안성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중간에 잘못 운행 이유로 1시간이나 늦게 배티재에 도착했다.
1시간을 기다렸다는 대장님 뵙기에 미안스럽긴 하지만 어쪄랴. 대장님 죄송해요.
얼마 전 월례회서 뵙고 산행에서는 3번째 만남이다. 대둔산 공용주차장에 방범차를 주차해 놓고 대장님차로 배티재
를 넘어 태고사로 간다. 주차장에서 태고사까지는 10여키로로 배티재를 지나 진산 삼거리에서 태고사로 가는 68번도
로를 따라가다 행정저수지를 지나 청림(靑林)골 (마을 주변에 푸른 숲이 많이 우거져 있어 청림골이라 부름)로 들어
선다.
태고교를 지나자 음식점이 있고 태고사가는 도로앞으로 '태고사 용무 외의 차량통행을 금합니다'란 간판을 보고 작은
공간에 차를 세워놓고 대둔산으로 오름을 시작한다.
태고사가는 도로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넓은 흙길이 대둔산으로 가는 입산으로 알고 진행한다. 장군약수터 - 생애대
-낙조대 - 마천대까지 3.0Km, 눈금을 긋고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게 된다. 서서히 계단의 경사는 급해지기 시작하고 떨어
진 낙엽은 땅의 흙을 덮고 가을의 마침표를 찍고 있는 것 같았다.
1.3KM를 벌써 올라왔나 하는 이정목을 보고서야 놓여있는 의자에 몸을 기댄다. 찌뿌린 하늘이 대둔산의 산밑까지 깔려 있기
도 하다. '비가 오려나, 언제나 그랬던 거처럼 , 칠갑산에서도 계룡산에서도'
오래된 괴목옆으로 계단을 따라 대둔산으로 간다.
머리위에 있던 오대산이 보이면서 날씨는 쾌청하게 가을의 빛을 내고 활짝 웃어 반긴다.
'그래, 이랬다 저랬다, 호랭이 방귀꾸는 것도 호랭이 맘대로 라더만 너 맘대로 해라' ㅋㅋ
'내가 바라는 건 빛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구름도 아닌 눈이였으면 어떨까!!'
이러저런 맘속 궁딩이 말벗삼아 산을 오르게 된다.
장군약수터다. 생애바위아래 먹을 수 있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장군약수터에 있는 약수물을 마시며 기도하면
만병통치(萬病通治) 된다고 하니 필히 한 모금 먹어볼 만했다.
서기 660년 백제(百濟)가 라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滅亡)하게 되자 허둔장군(許芚將軍)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심으로 대둔산에 입산하여 지금의 장군절터에 집을 짓고 은둔(慇遁) 생활을 하면서 약수를 마신 곳이라 하여 장군약수터라 전 (傳)하고, 약수터의 근원(根源)인 상여봉(喪與峰)을 멀리서 바라보면 용(龍)이 하늘로 구름을 타고 힘차게 승천(昇天)하는 형상( 形象)을 볼수 있고 상여봉(喪與峰)이 용(龍)의 머리라면 장군약수터는 용의 입으로 물을 내뿜는다하여 일명 용천수(龍泉水)라고 도 한다. 이 약수를 마시며 100일 기도하면 만병통치(萬病通治)된다고 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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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간판에 써 있는 말이 옛말이 된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끝에 식장산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식장산이다'하는 큰 소리가 대원님들 귓가에 들렸고 나를 7년 전으로
돌려 놓았다. 그곳이 대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더 가까이는 만인산이지 싶다.
'보만식계,47km의 대전 둘레산'이 눈물겹도록 다가온다. 봄눈이 흩날이는 산을 걷고 걷다가 잠시 쉬어 화장실 안에 털석
주저앉아 먹던 떡이 생각난다. 밤 8시 30분쯤 보문산에 오른 것 같은데 47km을 걸어 힘겹게 올랐는데 또 다시 밤은 계족
산이었다. 전국에 내노라 하는 지리산태극종주의 왕복하신 분들이 모여들고 편도하신 분들도 처음 보는 얼굴였다.
여수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김해에서 서울에서.... 그 열정으로 2005년 장거리카페를 만들고 처음으로 내가 제안하여
산행했던 곳이다.
그 산행이 토대로 지리산 태극종주의 산길을 만들고 밤을 벗삼아 걷던 길들이 스쳐온다.
그래서 늘 산에 오면 추억이 어덴가에 있다. 뒤에 있던 머리위에 있던 어느 산줄기에서 나를 뒤돌아 본다. 추억이 있기
에 산에 오른다란 말이 더 어울린다.
생애대,생여봉, 상여봉(喪輿峰) 다 같은 봉우리를 말한다. 상여봉(喪輿峰) 사면을 돌아 간다.
생여봉을 외면하듯 나를 칠성봉으로 자꾸 자꾸 끈다. 칠성봉을 오르는 산님들이 바위에 붙어 있다.
생여봉을 돌아 안부에 닿는다. 바람한 점 없는 산행길에 따뜻한 물 한잔이 훈훈한 기운을 돌게 한다.
배티재에서 올라온 산님들인 것 같다. 산님들을 보니 산에 오른다는 기분도 가진다.
산죽길에서 만난 칠성봉은 나를 유혹하고 '석봉 일곱개가 병풍처럼 아름답게 서 있는데 용문골에서 용이 승천하기
직전에 일곱개의 별이 이곳에 떨어졌다하여 그 후부터 칠성봉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잡아 본 태고사의 범종루가 들어 온다. 가 보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하로 올라 왔는데 그 마음은 나를
잡고 있었다.
다섯봉우리를 달고 있는 가장 끝봉우리를 오대산으로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금산군 진산면이다.
차를 타고 올라왔던 행정저수지와 청림골은 노오란 낙엽송에 수를 놓아 가을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는 것 같았다.
마천대로 가는 길에서 낙조대로 향한다. 낙조대로 가는 길의 이정목을 보면 짧은 거리에 있어 잠시 들려 볼수
있을 것 같아 오른다.
낙조대의 일몰 사진이 있다. 오대산을 전경으로 그 뒤로 하루의 해가 지는가 보다.
자꾸만 쳐다봐도 오대산 줄기가 멋스러워 보이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걸어온 자욱이 묻어있는 청림골과 행정저수지
때문일 꺼다. 그래서 사진 한 컷으로 기념 사진으로 낙조대의 증표를 남겨본다.
오대산 뒤로는 논산과 진산이다.
다른 분들도 아마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제일 좋은 곳인가 발걸음은 여기에 멈춰 낙조대를 내려가지 못하고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해가 지는 저녁이었으면 금상첨하였겠지..
칠성봉에서 마천대까지 기암과 첨봉들이 도열해 있는 대둔산릉이 멋스럽다.
배티재의 휴게소 전망대로 방향을 틀어 본다. 전형적인 산골마을의 평화스러운 전경은 쳐다만 보아도 좋다.
높지 않되 부드럽다.
낙조대에서 되돌아 오면 또다시 이정목이 있는 안부, 이곳에서 낙조산장으로 내려갈 수 있다.
그래서 난 산장뒤 마애불이 보고 싶어 대원님들께 가자고 한다.
산장 바로 뒤 계단을 오르면 산죽이 마애불을 지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오랜 세월 풍우에 씻겨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다.
문화재 자료 제276호, 논산시 벌곡면 수락리 산 14-1, 고려말 조선초로 추정되는 마애불(磨崖佛)은 대둔산 정상부 북서향의 바위 벽면에 양각(陽刻)하여 만든 불상이다. 이 불상은 대둔산에 위치한 어느 사찰에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의 법의(法依)는 양쪽 어깨에 걸쳐 발 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오른쪽 팔은 쭉 펴서 자연스럽게 느려 뜨렸고, 왼쪽 손은 가슴 부위로 올려 손가락을 펴서 몸체에 붙힌 형태이다. 제작연대와 제작자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말 또는 조선초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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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의 설명을 읽어보고 나도 마애불처럼 오른쪽 팔은 쭉 펴서 느려 뜨리고, 왼쪽 손은 가슴 부위로 올려 손가락을 펴서
몸체에 붙혀 마애불처럼 해 본다. 잠시라도 마애불을 이해해 보려는 것이다.
마애불 아래 탁자에 앉아 컵라면을 먹는다. 산장에서 컵라면 한개에 4,000원인데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산장까지
가져오는 운반비와 산장의 유지비에 비하면 어떨런지는 모르나 아묻튼 컵라면 한 개에 포만감을 채울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으리.
바글바글 산장에는 산님들이 붐빈다. 올들어 처음 보는 눈이 흩날린다. 반갑다.
마천대까지 펼쳐진 겨울산을 보는것 같다. 아주 작은 싸래기 눈이 대둔산을 스쳐 옆으로 내린다. 산에서 보는 눈은
낭만의 대상이 되지 싶을 정도다. 그 시간도 잠시였나 보다.
낙조산장을 떠나 산릉을 사면으로 돌아 간다.
산릉의 기암을 사진아 담아 칠성봉사면으로 내려선다. 마천대로 가는 길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워진 암봉이기에
..
용문골로 내려가는 길도 안내를 해 주고.
탑이 있어 멀리서도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마천대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드디어 마천대 878m의 개척탑이 우뚝 솟아 있는 대둔산의 정상에 올랐다. 사람들이 북새통이다.
내 살면서 3번 째 올라보는 정상에 서 본다. 처음은 20대였고 두번째는 7년 전였었다.
칠성봉과 생애대에도 조망을 해 보고
칠성봉과 생애대를 더 가까이 조망해 보고..
구름다리와 완주방면 쪽으로 금강산 못지 않은 기암절벽과 최고 비경으로 꼽히는 대둔산이 절경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사진을 미쳐 찍지 못했는데 가까이는 천등산이 있고 방향을 틀어보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과 진안 마이산이 조
망된다 했으나 알 아볼 수 없다. 서해바다의 변산반도까지 보인다 했는데 구름은 저 멀리 산을 가렸는가 보다.
연석산 아래 만경강의 발원지가 되는 만경강이 높은 산에 있음이 어찌 그쪽 산의 감회가 있지 않을까.
호남알프스의 개척당시 밤에 발원지에 섰던 생각에 울컥한다.
대둔산(大芚山)마천대(摩天臺) 정상 측량삼각점은 2등 삼각점이라 하지만 사실 알아 볼수 없다.
돌계단을 따라 산을 내려간다. 삼선계단이 있는 바위아래서 사과 한쪽을 먹고 목탁소리 울려 퍼지는
대둔산을 내려간다.
고려말 한 재상이 딸 셋을 거느리고 나라가 망함을 한탄하여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는데 재상의 딸들이 선인으로
돌변하여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 형태가 삼선인이 능선아래를 지켜보는 모습과 같아 삼선바위라 하였다는 삼선
바위를 알게되고..
1984년 9월 11일 공사를 시작으로 1985년 9월 27일 공사완료를 하였으니 꼭 일년 걸린 삼선계단은 길이가
40m였다. 교폭이 0.50m,옛날에는 계단을 오르고 내려오는 왕복이었으나 지금은 오르는 편도만 계단을
이용할 수가 있다고 했다.
동학혁명당시 순국하신 추모비도 지난다. 추모비는 없고 안내판만 있다.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연결하는 금강구름다리를 건넌다. 높이 70m, 길이 50m의 금강구름다리에 서니 다리가 떨려
아래로도 옆으로도 쳐다볼수 없어 그냥 종종걸음만 걸어 나온다. 대장님은 남자라 그런가 전혀 무서운 기색없이 패
스다.
금강구름다리와 삼선계단을 한폭에 담았다. 대둔산의 대명사가 되겠다.
위에 왕관을 보고 왕관바위라 하는가 보다.
케이블카 승강장 아래로 돌아 가보니 말로만 듣던 장군바위가 햇빛에 발하고 있다.
[장군바위]
장군바위를 보고 내려서자
[금강문]
마천대에서 금강문으로도 내려올 수 있다. 금강문위로 구름다리가 놓여져 있다.
금강문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금산을 점령하였을 때 영규대사가 의병과 함께 싸우기 위해 연곤평으로
진군할 당시 이 금강문을 통과하였고 권율장군의 전승지인 이 계곡은 대둔산 제일의 절경으로서 기암괴석
이 금강산을 방불케한다 하여 금강계곡으로 불리운다.
[동심바위]
동심바위는 신라 문무왕때 국사 원효대사가 처음 이 바위를 보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3일을 이 바위 아래서 지냈다는
전설속에 지금도 이곳을 찾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는 동심바위에 나의 발도 몸도 멈춘다.
바위마다 전설또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나무들은 빨강과 노랑으로 옷을 갈아입은지 언제였는지 꼬깔옷이 되었고
대원님들은 나란히 꼬깔옷에 더 붙혀본다. 함박웃는 모습도 겸연쩍은 모습도 오늘 대둔산은 지난번 계룡산보다
훨씬 수월했다고 하는데 산은 쉽게 올라가 쉽게 내려올 수 있는 길 또한 산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
이제 대둔산을 내려 가면서 가을도 가네.
동학농민혁명 항생전적비를 담고 내려오는데
머리위 케이블카가 하늘을 난다. 대둔산을 내려온다. 공용주차장에서 방범차를 타고 태고사아래 대장님차를 회수
하러 간다. 배티재를 넘어 태고사로 가는길은 아침에 갔던 길과 같다.
나는 태고사까지 차를 타고 가 보기로 하자고 했다. 대둔산 높이보다 낮은 곳에 자리잡은 태고사가 있기 때문이다.
대장님차로 구불구불 좁은 산길을 오른다. 태고사아래 차를 주차해 놓은 곳은 해발 540m였다.
태고사가는 이정표가 안내를 하는 나무계단을 오른다. 투벅투벅 산속의 발자욱 소리가 장단을 맞춘다.
양 옆으로 바위가 있는 좁은 석문이 태고사를 맞는다.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태고사의 일주문격인 석문은 , 절 입구의 바위에 ‘석문(石門)’이라는 우암의 필적이 움푹 들어가게 새겨져 있다. 이 절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수학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석문을 지나자 경사가 심한 도량임을 알수 있다.
축대를 쌓아 올린 범종루와 바위가 제일 먼저 내 눈에 선보인다.
태고사가 있고 가람뒤 원효대사가 이 절터를 발견하고 춤을 추었다는 의상대와 관음봉이 올려다 보인다.
극락보전이 대웅전격이라고 했다. 그 옆으로 지장전과 관음전과 삼성각으로 이루어진 태고사는 관음성지라 한다.
보통 절에는 대웅전이 있는데 왜 대웅전이 없을까 궁금했다. 옛날 태고사를 창건할 때 도천스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한다. '큰절이나 대웅전으로 하지, 대웅전으로 표현하기는 소규모다" 이 말은 도천스님의 크지 않은
작은 절의 의미하는 것 같았다.
범종루에서 바라보는 오대산과 향로봉이 막고 있어 절경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범종루에서 종을 치면 범종루아래 바위있는 터가 원효대사는 '도인이 나올터라'하여 선방(스님들이 공부하는 곳)
을 지었다라고 한다.
관음전옆으로 보살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총무님의 배려였다.
태고사는 도천스님의 손길이 곳곳에 머무르고 있는 곳이었다. 아까 올라 오면서 보았던 층층계단과 축대와 태고사의 법당들
그 앞으로 잣나무들이다. 잣나무에서 묘한 기가 흐르고 있다고 했다. 묘한 기란 좋은 기라고 했다.
'일하는 것이 선이요 수행'
일념 전진하면
마음의 지혜
저절로 생기는 법
한가지 집중해서
땀흘려 일하면
탐.진.치 눈녹듯
계곡 울리는
곡괭이 소리
마치 법문처럼
도천스님은 365일 일을 했다고 한다. 낮에는 울력, 밤에는 참선했고 ‘一日不作 一日不食’(일일부작 일일불식) ,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마라’는 도천스님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도천스님의 법문과 가르침을 벽에 걸고 보살님은 이행하고 있는가 보다.
법문의 내용을 옮겨보면
o 천이 천말하나 만이 만말하나
내말만 믿고 따라.
o 업따라 지껄인걸 뭘 신경써.
o 공부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
할 만만 해야지.
o 도 하나만 얻으면 천하를
줘도 안 바꾼다.
정말 무슨말이 필요할까요.
법문을 알고 가르침을 이행하면 되는것을.. 법문아래 '인연'이란 글도 큰 글씨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한다.
차 한잔 공양하고 관음전을 나왔다. 범종루가 어둠에 있다. 보름달이 아닌 둥근달이 태고산을 비춘다.
도천스님은 움막을 짓고 나물죽을 쑤어 먹으며 지금의 태고사를 세웠다고 했다. 옷을 기워 입었고 수백리길을
장보러 걸어 다녀다고 했다. 거지라고 돈을 던지기도 했다고, 태고사의 종이었다고 ..
'나는 깨친 것이 없어 수미산 주인집에 머슴살이 하러 갈거여'태고사에 은둔하며 머슴을 자처하며 수행정진하셨던
도천스님의 영결식에 써 놓은 글귀가 태고사를 내려오는 어둠속 입가에 맴돈다.
을씨년스럽게 춥다. 산사의 밤에서 구불구불 차도를 내려왔다. 저수지를 지나 불빛이 비치는 우아한 식당에서
버섯전골로 저녁을 먹고 대장님과 헤어져 부천으로 왔다.
대장님은 오늘 이곳, 어느곳에서 하루밤을 묵을지, 추운데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