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봉산(鳳山)은 황해도 은파군과 봉산군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 휴암군(鵂嵓郡) 또는 조파의(租坡衣)·휴류성(鵂鶹城) 등으로 불리었다. 신라 때에는 서암군(栖巖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봉주(鳳州)로 개칭하여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으나 현종 때 폐하고 황주(黃州)에 속하게 하였다. 충렬왕 때에 봉양군(鳳陽郡)으로 고쳐 지사(知事)를 두었다가 후에 다시 봉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봉산군으로 고쳤고, 1947년에 사리원면이 사리원시로 승격하면서 봉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82년 10월에는 해서리가 사리원시에 포함되는 대신 은파군의 청룡리가 봉산군에 이관되었다.
성씨의 역사
봉산이씨(鳳山李氏)의 시조 이수(李隨)는 자가 수경(隨卿), 호는 심은(深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갑인보(甲寅譜)》 세록(世錄)편에 따르면 그는 1374년(공민왕 23)에 태어나 1396년(태조 5)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알성문과에 올라 황해감사(黃海監司), 동지총제사(同知摠制使)를 거쳐 병조·이조판서(吏曹判書),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또한 태종이 인재를 구할 때 성균관의 천거로 뽑혔으나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사퇴하였고, 이듬해 충녕대군(忠寧大君: 世宗)의 사부가 되었다.
특히 그는 문장과 덕행이 높았으며, 왕이 그의 청렴결백함을 높이 사서 봉산의 토지를 하사 하였는데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을 봉산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런데 《갑인보》 권수(卷首)를 보면 고려시대 예의판서(禮儀判書)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이사윤(李士贇)을 시조로, 이수는 4세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수는 중조가 된다.
분적종 및 분파
부사공파(府使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주요 세거지
전라북도 정읍군 정주읍
전라북도 정읍군 북면 일원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대방리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만무리
경상남도 거창군 태양면 죽림리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하삼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봉산이씨는 2,284가구 총 7,38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