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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경주 시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대릉원은 경주의 고분군 중 가장 큰 규모로 크고 작은 20여기의 삼국시대 신라 고분이 남아 있는 곳이다. 경주고분공원이라고도 한다. photo 변희석 |
‘GYEONGJU
is Korea!’
경주 시내로 들어서면 바로 눈에 띄는 구호다. 차량으로든 도보로든 일단 경주 시내를 돌아보면 단번에
홀딱 반하게 된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도시. 아니다, 영원(永遠)과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이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도시는 없다. 신라 역사가
그 막을 내린 것이 서기 935년이니, 최소 1000년에서 2000년 세월을 죽은 자의 집이 산 사람의 집보다 더 견고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그 긴 세월 동안 겁도(?) 없이 사람들은 무덤 곁에 작은 집을 지어 어울려 살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 어디에서 이런
도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라도 있던가.
싱겁게도 경주의 귀신은 아주 너그럽거나, 경주에서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기에 그러한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싱겁거나 말거나, 일단 영원을 꿈꿀 수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가!
날이
풀리면 두꺼운 책 한 권과 와인 한 병을 챙겨 들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 마땅한 능(陵) 언저리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깔고 하루 종일 와인을
홀짝거리며 책을 읽다가 졸다가 하고 싶다. 문득문득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을 연인이나 친구가 있으면 더욱 멋질 테고. 실제 경주의 봄 여름
가을에는 능원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다. 도회의 삶에 찌든 이들이여, 갑갑한 콘크리트 공간에서 좁은 의자 위에 쪼그려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이여, 영화에서나 보던 가슴이 설레는 환상 아닌가!
토암산·불국사·남산…
게다가 천년왕국이다.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자그마치 천년왕국의 수도를 오롯이 독식해 온 욕심 많은 경주.
그래서 며칠을 둘러보아도 질리지 않는 볼거리들이 지천이다. 대릉원, 첨성대를 거쳐 계림을 둘러본 뒤 최부자 고택을 찍고 월성터를 오른 다음
곧바로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으면 돈은 받지 않고 기념으로 간직할 만한 입장권을 준다. 흔히 봉덕사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은 예술적 감각과
거리가 먼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박물관 전시물들의 품격은 또 어떤가.
경주 시내를 벗어나 먼저 석굴암을 찾은
뒤 등산길을 따라 불국사로 내려와 본 적이 있는가. 토암산의 운치도 그렇지만 특히 불국사에 거의 이를 무렵 펼쳐지는 숲의 풍경은 사람에게 저절로
평화와 사랑을 느끼게 한다. 여인이여, 기어이 그대를 모시고 한번 걸어볼지니….
불국사며 남산이며 보문단지며… 더
늘어놓기에는 감수성의 필력이 부족하니 이쯤해도 ‘GYEONGJU is Korea!’에 조금도 이의 없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다.
일단 경주터미널 앞에 가면 다인승 자전거에서부터 스쿠터까지 개별적 영화 찍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소품대여점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안전하게 스쿠터를 타기도 어려운 도로 여건이지만 자전거 전용도로조차 없다. 보문단지로 가는 길 인도에 비슷한
구색이 드문드문 보이지만 그냥 흉내 내기다. 안전하지 않은 도로에 자전거를 빌려서 어떤 봉변을 감수하라는 건지, 원. 그렇다고 대중교통 사정이
좋기나 한가. 불국사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경주 토박이라는 사람이 경주 시내의 버스는 한 회사가 독점이라 엿장수 마음대로니 마냥
기다리시란다. 택시요금은 또 어떤가.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낮이건 밤이건 할증이 적용된다. 사정을 모른 채 택시 한 번 타고 나면 된통
바가지라도 쓴 것 같아 울화가 치밀고 경주에 대한은 인상은 구겨지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경주도 식후경이니 밥은 먹어야
한다. 천년왕국의 수도였으니 당연히 전통의 음식이 있으려니 했다. 모를 땐 그 지역 택시기사님이 최고다. 그런데 “경주음식? …
○○빵이요”한다. “아니, 간식 말고 식사요.” 다시 물으니 한참 생각하다가 “순두부도 있고, 비빔밥도 있고…”.
특정
브랜드의 빵을 비난하자는 뜻은 아니지만 기껏 일제강점기 침략자의 화과자(花果子)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은 팥빵이 천년왕국의 대표음식으로
회자되다니. 더군다나 간식 아닌가.
관광도시임을 자부한다면 음식은 관광객에 대한 예의이다. 아니, 먼저는 역사에 대한
예의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음식에 관한 기록이 마땅히 없다면 추측하고 생각해 보면 감은 잡히지 않겠는가. 옛 신라지역에는 아주
오래된 그림기록이 있다. 인류 최고(最古)의 포경기록으로 세계적 보물인 울주군 반구대암각화가 그것이다. 해설사의 설명을 따르면 사람들의
주거지로부터 2㎞ 이상 떨어진 암각화 유적지는 하늘에 제(祭)를 올리던 곳으로 추정된다. 고래, 상어, 거북, 물개, 사슴, 멧돼지, 호랑이,
표범, 여우, 늑대…. 하늘에 올리던 음식이었다면 제사장을 이어 촌장, 왕실 등 권력이 커질수록 더욱 풍성하고 맛나게 향유했을 터. 형산강을
따라 배가 드나들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데다 들은 넓으니 다양한 해산물, 오곡에 산나물도 지천이었을
것이다.
전승되어온 역사의 흔적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인근 지역에서는 제사상에 반드시
상어 돔배기 산적을 올린다. 지금은 식용유에 구워 익히는데 아주 옛날에도 고래기름에 구워 익혔을 법하지 않은가. 전라도의 홍어찜처럼 돔배기찜도
비린내 없이 담백해 안주로 제격이다. 고래고기도 여전히 매니아층이 두껍고 탕도 있다고 들었으니 옛 왕실에서도 고래탕을 해장용으로 즐겼을 수 있지
않은가. 눈치챘겠지만 스토리텔링과 상상의 요리 개발이 관건이다.
주부는 살림이라는 종합예술의 지휘자다. 더군다나 여성의
섬세함까지 더하면 아름다운 창조는 특별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다. 일 년에 몇 차례 ‘집안 전통음식 맛 소개전’만 열어도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천년까지 이어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문중(門中)의 음식이란 결국 전통과 변화의 숙성 아니겠나. 같은 재료에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해지는 조미료의
배합과 응용을 전통의 망실(亡失)이라 할 일도 아니고 말이다.
돈 쓰고 바보
되고
‘신라 음식 재현전’은 어떤가. 청춘의 재기발랄함도 좋고 잠자고 있던 장년의 끼에 불을 붙여도 좋다. 역사의
화두를 던져놓으면 그들의 무한 상상에서는 무엇이 나올까! 토함산, 무장산, 단석산 기슭에서 잡아들인 멧돼지, 사슴, 여러 산새들은 어떻게
요리했을까. “마마, 오늘은 동해에서 엄청난 크기의 상어를 잡아 보냈사옵니다. 하여 저희들이 이리 볶고 저리 굽고, 어느 부위는 날 회로
준비했사옵니다.” “저희는 지난 번 사냥에서 말려두었던 멧돼지와 사슴을 옛 고구려와 백제의 조리법을 가미해 새롭게 준비했나이다.” 그럴 법한
요리가 제법 나오지 않겠는가.
그렇게 가능성 있는 요리가 하나둘 발굴되면 개발자에게는 특혜를 주는 거다. 예산 끌어다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업장에 ‘신라왕실 지정 ○○점’ 같은 식으로 이름을 주고, 각종 시 홍보물 및 인터넷 사이트에 적극 홍보해 주는
특혜 말이다. 오래지 않아, 경주를 들른 세계인이 저마다 입소문 낼 신라왕실 정찬(正餐)이 제대로 갖춰지리라
확신한다.
기왕 음식 이야기가 나왔으니 부메랑 각오하고 돌직구 한번 던져야겠다. 보문단지에서 열린 학술세미나에 아내와
아들을 동반하고 온 교수가 있었다. 친구끼리야 소주 한잔이면 되지만 가족 동반인데 그럴 수 있나. 제일 좋다는 한정식집으로 모시고 갔다. 조금
저렴한 세트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술안주까지 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아 6만원쯤 하는 세트로 주문했다. 결론, 부부 합창으로 “서울에서
2만~3만원이면 더 맛있고 풍성한데 이걸 왜 시켰어요!”였다. 아, 돈 쓰고 바보 되는 비애여∼. 더군다나 나눔과 절제로 한국인의 표상(表象)이
되는 그분의 이름을 딴 식당에서.
예약을 안 했으니 별도의 방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넓은 거실 군데군데 상을 펴고
퍼질러 앉아 먹는 정찬은 영 아니었다. 이 테이블 저 테이블 주문소리에, 종종걸음을 치며 목청을 높이는 종업원…. 장담컨대 입식 생활에 익숙한
외국인이라면 아무리 음식이 맛있었어도 제 나라로 돌아가 ‘강추’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주뿐 아니라 지방으로 갈수록 신발
벗고 올라가 앉아서 먹는 식당이 많다. 뜨끈한 방바닥? 이제 그런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한꺼번에 밀려들 때 보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겠다는
욕심이다. 외국인, 청년, 양복바지 구겨지는 일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세상이 변하면 쿨하게 받아들이는 유연함도 필요한데
어찌 그리 고집들이신지.
대릉원 옆 관광기념품점을 보면 저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경주에서 웬 뜬금없는 자수정 타령인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분명한 조잡한 기념품은 아예 그렇다 치고 한국 골동품을 판다고 써놓았는데, 장담컨대 중국인은커녕 한국인도 절대 지갑 열 일
없다. 더군다나 일본 관광객이라면.
그렇다고 흉볼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경주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대릉원 옆 예쁜
골목길에 자리 잡은 ‘도솔’로 맨 먼저 데려간다. 날 좋으면 평상에 앉고, 추우면 작은 방에 둘러앉아 1만원 내외에, 신라 시절부터 엄마가
차려주었던 전통이 분명한 집밥을 주문하면 백이면 백 다 엄지를 치켜세웠다. 거짓말도 아니고 나는 그 주인과 아직 인사조차 나눈 적이 없으니
사심도 아니다.
왕실음식전을 개최하라
그럴 일은 결코 없지만, 내가 만일
경주시장이라면 당장 ‘왕실음식전’부터 개최할 거다. 다음에는 식당 입식(立式) 개선 지원에 나서겠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으로 가는 그 예쁜 길에
울뚝불뚝 엉망인 보도블록을 자전거도로와 병행한 쾌적한 인도로 만들겠다. 대릉원을 중심으로 한 시내 일원은 더구나 도보와 자전거의 천국으로
만들겠다. 경주만의 특색 있는 관광상품 개발전도 열겠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스토리텔링 소재를 품고서도 비실비실 말라가는 나무 같은 경주는
참으로 ‘GYEONGJU is Korea!’에 고개 끄덕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지나가는 과객이지만 경주가 제대로
대한민국이 되려면 특별조치를 취해서라도 지방자치를 일시 중지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든다. 천년 가문이니 경주 최씨, 경주 김씨… 얼마나 긍지
높겠는가. 더군다나 누구나 알 만한 인재도 수없이 배출했다. 당연히 일족, 동창 등 무리를 짓자면 일도 아니다. 무리가 만들어지면 단결도 잘되는
건 물론이다. 굳이 이권이 아니더라도 무리가 되면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굽히려 들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다. 거창한 명분이 앞에 서면 소소한
일상은 눈에 들어올 틈이 없다. 더군다나 선거 아닌가. 내 무리에서 한번 당선되면 빼앗기는 것은 치욕이 될 수 있다. 개혁은커녕 개선에 나섰다가
반발과 비난의 대상이 되면 치욕을 당하는 수가 있다. 어쩌겠는가. 예산을 받아다 현상을 지켜주는 일로 반발을 사지 않는
길뿐이다.
객관적인 눈으로, 세계 속의 경주, 대한민국 경주를 위한 개혁의 기치를 들 한시적인 지휘자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의 배경이다. 현장을 잘 알아 현실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원대한 비전으로 천년 미래를 준비할 과감한 변화의
기수도 필요하다. 예산으로 현상을 유지하고, 뭔지 알지도 못할 요란한 캐치프레이즈로 생색이나 내는 지도자로는 다시 천년왕국의 영광이 부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느닷없는 경주
이야기에 오해가 있을까봐 사족을 붙인다. 경주는 한번 다녀가 보지 않아도 한국인에게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도시이다. 오랜 중국 공부에 몸과
마음이 지쳐 귀국을 결심할 무렵 가까운 중국 지인이 등신불로 잘 알려진 김교각 스님 이야기를 한국인의 눈으로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해왔다. 더하여 고운 최치원 선생도 거론하는 것이었다. 두 분 모두 중국과 연결되는 분들이니 역사 공부의 연장선상에서도 그렇고 진작부터 관심을
두었던 분들이라 경주를 찾아봤다. 언제 다녀갔었던지 기억이 가물거려 낯선데도 푸근한 익숙함에 두 분에 관한 공부를 핑계로 임시 거처를 잡았다.
도시는 정이 들어 머물고 싶은데 점점 떠나고 싶은 생각이 커지는 갈등을 경주를 위해, 고향을 잃어가는 우리 후손들을 위해 털어놓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