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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전투 당시 화약 지급량과 전투경과
■ 쌍령전투 당시 조선군 화약지급량
쌍령전투는 '1637년 1월3일 단지 수십 혹은 수백명의 청나라 기병에게 약 4만 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참패한 전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병자호란 쌍령전투 당시 조선군의 패전 원인과 관련해서는 "조선군이 조총 10발을 쏠 수 있을 정도의 화약만 지급했다가, 전투 중 화약이 떨어져서 재보급을 하던중 청군이 돌격해 참패했다"는 줄거리도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사료를 보면 조선군이 전투 전에 지급한 화약량은 정확하게는 조총 10발용이 아니라 화약 2냥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은 쌍령전투의 경과를 설명할 때 가장 흔하게 인용되는 <연려실기술> 제장사적조 뿐만 아니라, <병자록>필사본 B유형과 필사본 C 유형, 그리고 <병자록> 필사본 C 유형과 사실상 내용이 유사한 <병자남한일기>, 그리고 병자호란에 관한 또다른 일기체 사료인 남급본 <병자일기>에서 공통적으로 기록된 부분이다.
전근대 조총에서 화약 사용량은 편차가 있으므로 이 2냥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양인지를 가늠해 봐야한다. 일단 이 화약이 문약(점화용 화약)일 가능성은 높지 않으므로, 신약(탄환 추진용 화약)으로 간주하고 이것이 몇 발을 쏠 수 있는 화약량인지 따져보자.
◆ 1603년 출간 <신기비결>, 조총 1발 발사에 필요한 화약량은 2돈, 혹은 2돈2푼~2돈3푼
◆ 1696년 출간 <강도지>, 조총 1발 발사에 필요한 화약량은 3돈, 대조총은 5돈
1냥은 10돈이므로 <신기비결> 기준으로는 8~10발, <강도지>의 일반 조총 기준으로는 6발, 대조총 기준으로는 4발이 된다. 예전에 내가 쌍령전투를 설명하면서 10발을 쏠 수 있는 화약을 지급했다고 설명한 것은 이처럼 2냥으로 기록된 화약량을 <신기비결>의 조총 화약량으로 환산한 수치를 고려한 것이다.
일본의 구경 9mm~15.5mm급의 조총이라면 소요되는 화약량이 3~7g 정도되는데, 거칠게 환산하면 1~2돈 수준에 상당한다. 내가 수년 전 모 월간지에서 쌍령전투를 설명할 때 "최대로 잡아도 20발 이하의 탄약을 발사할 수 있는 양을 지급했다"고 언급한 것은 경우에 따라 3g 정도의 화약으로도 조총을 발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조총 중 구경이 가장 작은 것은 7mm 급 정도, 최대급은 25mm급 정도이며, 가장 흔한 유형은 13~16mm급이다. 13~16mm급이라면 대체로 2돈(약 8g) 그보다 구경이 크다면 3돈 정도가 보편적인 조선시대 화약량으로 볼 수 있을듯하다. 그렇게 볼 경우 13~16mm급 조총에서 2냥으로 사격할 수 있는 양은 대체로 10발 내외가 된다.
참고로 당시 조선군 포수가 100% 조총으로 무장하지 못하고 상당수가 승자총통계열을 사용했다면, 조총보다 훨씬 화약 소모량이 많으므로 발사할 수 있는 탄환의 양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신기비결>을 기준으로 대승(자)총은 화약 6돈, 차승(자)총은 4돈이 들어가므로 2량으로 사격할 수 있는 양은 3~5발이 고작이다. 병자호란 관련 사료에서는 포수라고만 했지, 조총이라는 직접적 표현이 나오는 경우는 없으므로 당시 조선군이 조총 외에 재래식 화약무기를 일부 소지했을 개연성도 없지는 않다.
그리고 <병자록> C유형이나 <병자남한일기>는 쌍령전투에 참전했던 조선군이 모두 포수였던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지만, 남급본 <병자일기>는 포수 외에 활로 무장한 사수(射手)의 존재를 명기하고 있고, <병자록> B유형은 칼 혹은 창으로 무장하는 살수(殺手)의 존재도 명기하고 있으므로 당시 조선군이 100% 조총으로 무장했던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 쌍령전투 당시 전투경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서 과연 당시 조선군이 조총을 10발씩 사격할 수 있는 상황인지 따져보자.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쌍령전투는 '기병 돌격에 의해 순식간에 보병 진형이 무너져서 패전한 전투'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의 전투가 아니다.
<병자록> 필사본 C 유형과 <병자남한일기>,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연려실기술>은 청군이 경상좌병사 허완 진영을 공격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청군 선봉 33명이 목방패를 들고 남산 상봉에서부터 물고기를 꿴 것처럼 (줄줄이) 공격해 왔다"는 취지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조선군이 아래쪽에 위치하고, 청군이 산 위에서 공격한 상황인 것이다. 이 같은 전투상황은 남급본 <병자일기>나 저자 미상의 또다른 <병자일기> 필사본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즉 남급본 <병자일기>에 따르면 1) 해가 뜬후 청나라 병사가 높은 산봉우리에 적기를 세우고 2) 청군의 한 병사가 병기를 들지 않고 단지 목방패와 기휘만 들고 앞서고 3) 그 뒤에 무기를 든 병사 2-3명, 그 뒤로 5-6명, 10여명이 뒤따라 모두 33명이 직진했다고 되어 있다. 또다른 <병자일기> 필사본에서는 산봉우리 위에서 좌병사 허완진영으로 충입(衝入)했다고 되어 있다.
쌍령전투의 현장인 대쌍령고개에 가보면 좌우로 넓게 산지가 포진하고 있는데 이 산줄기를 타고 전진한 청군 기병부대가 고개 바로 옆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던 조선군 진영으로 공격해 온 것이다.
최초 전투 당시 조선군은 진영 내부에서 적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조선군 50~60명이 진영 밖으로 나가 33명으로 구성된 청나라 기병 선봉부대의 척후병을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병자록> 필사본 C 유형은 외면 포수가 일제 사격했다는 식으로만 설명하고 있지만, 남급본 <병자일기>에서는 "五六十人出迎與戰"이라고 했으므로 외면 포수 중 일부 병력이 진영 밖으로 나가 사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30여명 정도에 불과한 청군 선봉 척후들이 물고기를 꿴 것처럼 일렬로 줄지어 접근해 왔으므로 조선군 일부가 병력 우위를 믿고 진영 밖으로 나가 사격한 것이 틀림 없다. 이때 청군 병사 1명이 총알에 맞아 즉사한 것으로 보아, 청나라 기병 척후 중 일부와 진영 밖으로 나간 조선군 병력 사이의 거리는 100m 내외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군 기병 중 1명이 즉사하자 청군 기병은 진영으로 접근하지 못했는데 조선군은 "砲手連續亂放" 다시 말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았다. 즉 조선군이 대략 10발로 추정되는 탄환을 모두 쏠 때까지 청군은 더 이상 조선군 진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청군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화약은 이미 떨어졌다"고 기록한 것은 그런 사정을 설명한 것이다.
이 같은 조선군의 상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한글 병법서인 <진법언해>에서"포수(조총수) 도적(적)을 만나 싸울제 먼저 겁내야 도적이 멀리 있어 철환이 못미칠 곳에 불을 다 놓아, 화약 철환이 없는 줄을 도적이 알고 몰려오면 할일이 없어 공연히 다 죽기를 면치 못한다"고 지적하는 바로 그 상황이다.
조총병들이 겁먹어서 명중시키기 힘든 원거리에서 조총을 마구잡이로 사격하다 탄환이 일찍 떨어지면 대응할 방법이 없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경고다. 마치 현대 군대에서 사격 군기를 강조할 때 하는 말과 비슷한 내용이 조선시대 병서에도 나온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런 처절한 경고는 아마도 쌍령전투의 뼈아픈 실전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화약이 떨어진 조선군 출영부대는 화약 추가 지급을 요청하면서 소란을 떨었는데 그 같은 사정을 지켜본 청군 기병은 공격을 재개해 목책을 넘어 조선군 진영으로 뛰어 들었다. 청군이 조선군 목책 내로 돌입할 당시에 조선군 일등포수와 정초군은 단 1발의 조총 사격도 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군 진영이 오직 화약 부족 문제 때문에 붕괴한 것은 아니다. 이점은 남급본 <병자일기>에서 "일등포수와 정초군이 단 1발의 탄환도, 단 1시의 화살도 쏘지 못했다"고 기록한 대목을 봐도 알 수 있다. 안동영장 선약해는 활을 쏘며 저항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만 사수 병력 대다수는 활을 쏘지도 못하고 심리적으로 공황 상태로 빠진 것이다. 다시 말해 총으로 무장한 포수 뿐 아니라 활을 쏘는 사수도 미처 공격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방어진영이 붕괴한 것이다.
그 다음 상황은 잘 알려져 있듯이 대량 압사 사태다. 현장 지형과 조선군의 병력 규모, 그리고 병자호란 쌍령전투와 관련된 여러 사료의 내용을 조합해 보면 조선군은 좁은 지역에 아주 높은 밀도로 밀집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지가 아니라 산지 사이의 완만한 구릉과 약간의 급경사가 뒤섞인 지형에서 병력들이 일제히 도주를 시도하다 압사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병자남한일기>는 당시 상황에 대해 "경상 좌병사 허완이 늙고 겁이 많아 말을 타지 못했는데, 주변에서 말에 세번이나 태워줬으나 떨어졌고, 세번째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진영 중견이 붕괴되면서 밟혀 죽었다"는 취지로 묘사하고 있다. 지휘관이 도주하는 병력에 밟혀 죽을 정도면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병자남한일기>는 그 이후 상황에 대해서도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때 청군이 사방으로 흩어져 단병으로 마구 죽였다는 것이다.
남급본 <병자일기>에는 더욱 드라마틱한 묘사도 보인다. "흩어진 병사들이 목책에 도달했으나 목책을 넘지 못하고 넘어지면 그 뒤로 계속 시체가 쌓였고, 목책을 넘은 병사는 목책 밖이 험준해 추락해서 죽었다"는 취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죽은 시체가 계속 쌓이면서 마지막으로 넘은 자는 살아났다"는 기록도 보인다.
즉 목책을 넘기 전에 넘어졌다 뒤에서 밀어닥치는 병력들에 의해 1차 압사 사고가 벌어졌고, 요행히 목책을 넘은 병사들은 목책 밖의 경사지역에서 추락사를 했으며, 추락사를 한 시체가 쌓여서 목책 높이와 비슷해지자 목책을 넘어 탈출하는 병사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쌍령전투의 좌병사진 진영 함락 마지막 단계에서 조선군이 전사하는 장면은 만 단위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좁고 경사진 지역에서 밀집한 상태에서 발생한 대형 압사 사고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남급본 <병자일기>를 통해 당시 조선군의 진영과 주방어 방향에 대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청군이 조선군 경상 좌병사 진영 목책을 넘는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특별한 기록이 없다. 단순히 "목책을 넘어 돌입했다"(踰木柵突入)이라는 기록만 보인다. 다시 말해 청군이 공격해 온 방향의 목책 높이는 상대적으로 낮았고, 그 주변 지형도 완만한 경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조선군이 청군이 쫓겨 탈출했을 때는 기껏 목책을 넘고도 추락해서 죽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목책 밖이 상대적으로 높고 급경사 형태의 지형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청군은 애당초 조선군이 예상한 방향에서 공격해 온 것이 아니다. 조선군은 애당초 급경사 지역으로 청군이 공격해 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방향처럼 사람이 떨어져 죽을 정도의 높이라면 청군 기병이 돌격해오는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군은 아마도 청군이 대쌍령고개를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 공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아마도 목책으로 둘러싼 진영에서 대쌍령고개를 관통하는 도로 방향에 이 같은 급경사 지형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조선군의 생각과 달리 청군은 대쌍령고개를 통과한 것이 아니라 산줄기를 따라 남하해 산정상에서 산 아래로 공격해 왔다. 이 방향은 조선군이 예상한 주공격 방향이 아니었으므로, 목책 높이도 그리 높지 않아 청군이 손쉽게 목책을 돌파했을 것이다.
■ 쌍령전투 당시 청군 병력 규모
쌍령전투 당시 청군의 병력에 대해 <병자남한일기>가 "경상 좌병사진은 청군 기병 선봉 30명, 경상우병사진은 청군 기병 300명에게 사실상 전멸했다"고 기록한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전투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병력의 수치일뿐 전투에 참가한 전체 병력일 수는 없다.
쌍령전투가 벌어진 1월 3일에 해당하는 청태종실록 권33 숭덕2년 1월3일조에 보면 패륵 岳託이 전라도 심총병과 충청도 이총병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나온다. 1월3일은 우리측 기록에서 쌍령전투가 발발한 날이므로 이 자료의 전라총병은 경상총병의 오류로 보이고 심총병이 바로 경상 감사 심연을 지칭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청태종실록 해당 날짜에 청군 병력 규모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만 패륵은 대충 6000~75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므로 패륵 岳託이 쌍령전투에 지휘한 청군의 병력 규모도 그 정도 수준(수천명)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병력 수치는 추가적인 사료를 확인해 봐야할 것 같다.
남급본 <병자일기>를 보면 조선군이 쌍령에 도착한 시점부터 청군 척후가 조선군을 둘러 쌌는데 아군이 이를 몰랐다고 되어 있다. (賊之斥候已環於我軍而不知也) 척후가 이미 조선군을 둘러쌀 정도면 척후만도 상당한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쌍령전투에서 묘사된 상황 정도의 대규모 압사 사고를 일으킬 정도라면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착각할 정도의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느낄 정도의 병력이라면 적어도 수천 명 이상의 청군이 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훗날 허완의 사망 당시 상황을 <승정원일기>가 묘사하면서 청군 수천 기 운운하는 기록이 남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경상 좌우병영 포진 위치에 대한 가설
경상좌병사 허완의 진영 위치에 대해서는 좌강, 경상우병영 진영의 위치에 대해서는 우강이라고 되어 있다. 좌우는 상대적이므로 정확하게 알수는 없으나 허완의 진영을 공격한 적군이 남산(南山) 정상에서 공격을 시작했다고 되어 있고, 대쌍령고개에서 길이 완만하게 꺾이므로 남쪽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곳은 지도에서 왼쪽 아래 지점이다. 그 뒤 마름산 내지 315고지가 병자호란 관련 기록에서 말하는 남산일 가능성이 높다. 일단 조심스럽게 샘물교회 남쪽으로부터 새넘터골 사이의 어느 지점이 좌병사 진영이라고 잠정적으로 추정하고 싶다. 특히 선약해가 경상좌병사에게 산상으로 진을 옮기자고 건의한 것으로 보아 좌병사 진영은 지대가 그렇게 높지 않은 산자락 지점, 그 중에서도 도로쪽으로는 약간 급경사가 있는 지점이 바로 가장 적합한 후보지가 될 것이다. 청군은 아마도 대쌍령고개에 포진한 조선군이 청군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장지밑이나 양벌3리 방면에서 출발해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한후, 마름산 내지 315고지를 넘어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허완 진영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 경상우병영 진영은 그 건너편이 될 것이다. 대쌍령리에서 경안동 방향으로 갈때 오른쪽에 당시 조선군이 진영을 펼쳤던 진터골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현지 답사를 갔을 때도 주민들 중 이 지명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국수봉에서도 전투가 치열했다는 구비전승이 남아있는데, 현지 주민들이 지칭하는 국수봉(지도상에 나오는 국수봉 위치와 상관없이)은 뒤창개산 내지 그와 연결되는 산지 중에 하나를 지칭하는 것 같다. 이런 전투와 관련된 전승들은 아마도 주로 경상우병영의 진영 내지 그 전투기록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도평리에서도 조선군이 많이 전사했다는 전승이 남아있는데 아마도 퇴각하던 경상우병영의 조선군이 강을 만나 더 이상 후퇴하지 못하고 청군에게 잡혀 전사한 지점일 것이다.
* 이 글의 의미 (1월4일 오전 추가)
참고로 쌍령전투는 한때 거의 잊혀진 전투나 다름 없었다. 임진왜란에 비해 병자호란 자체가 그렇게 인기있는 주제가 아닌데다가 현대 이후 출간된 전쟁사 관련 서적중 쌍령전투 자체에 방점을 찍어 관심있게 다룬 사례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출간된 육군본부의 ‘한국고전사 시리즈’에서도 쌍령전투는 거의 한 줄로 처리하고 있다. 이기훈씨의 ‘전쟁으로 보는 한국역사’(1997)나 김성남씨의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2005)에서도 쌍령전투는 다루지 않는다.
단행본 수준으로 병자호란을 정밀하게 재구성한 유재성 선생의 ‘병자호란사’(1986)에서는 쌍령전투에 수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지만 당시 경상도 총병력을 8000명으로 간주한후 좌우병사의 선봉부대를 2000명, 경상관찰사 심연의 본진 병력 규모를 6000명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참전 조선군 4만명을 기준으로 전투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기본 뼈대에서 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 고대 전쟁사와 관련해서 비교적 널리 읽혀지고 있는 책인 '한민족전쟁통사' 시리즈에서도 병자호란이나 쌍령전투와 관련해서는 유재성 선생의 ‘병자호란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설명을 하고 있다.
흔히 알려진 쌍령전투의 놀라운 특징, ‘133대 1’ 혹은 '4만대 300명'이라는 압도적 병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대참패 했다는 점 그 자체를 주목한 글은 그동안 사실상 없었다는 의미다. 사실 쌍령전투의 패전 사실이 처음으로 논쟁거리로 떠오른 것은 약 10여 년 전 인터넷 게시판에 내가 썼던 글에서 비롯됐다. 쌍령전투의 패전을 이슈화시킨 단초를 제공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월간지 등 활자 매체에 실린 몇 번의 잡문을 통해 끊임 없이 쌍령전투를 ‘우려 먹었던’ 장본인으로써 부담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진지하게 이 문제를 다룰 의도로 쓴 글이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공개했던 네 편의 글이다.
1. 병자호란 쌍령전투 참전 조선군 병력 규모 기록에 대한 검토
http://lyuen.egloos.com/4527650
2. 경상도 지역 병력자원과 인구로 본 쌍령전투 참전 병력 검증
http://lyuen.egloos.com/4527648
3. 쌍령전투 당시 조선군의 병력 구성으로 본 참전 병력 규모
http://lyuen.egloos.com/4527645
4. 시간과 이동거리로 검증해 본 쌍령전투 조선군 병력 규모
http://lyuen.egloos.com/4527643
이상 네 편의 글을 통해 조선군 병력이 최소 3만명이 훨씬 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해명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글은 전투경과에 대한 설명의 일부를 담고 있다. 이번 글에서 청군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예전에 다른 곳에서 썼던 글을 그냥 전재하는 수준으로 멈췄다. 청나라측 사료를 추가로 발굴해야 본격적인 검토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사료들 중 절반 이상은 그동안 병자호란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진 적도 없고, 병자남한일기와 병자록 B 유형 등 일부를 제외하면 그나마 대부분은 번역은커녕 해제조차 이루어지 않은 사료들이다. 병자호란 관련 사료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료가 남아있는지, 남아있는 사료 간에 어떤 상위점이 있는지, 동일한 서적에서도 판본별로 어떤 출입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정밀하게 검토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즉 병자록 필사본 B유형, C유형 운운하는 것도 관련 사료에 대해 내가 임의적으로 부여한 명칭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쌍령전투에 대한 학계의 그동안 연구 결과를 단순히 소개하거나 요약한 글이 아니며 전적으로 내 개인의 해석,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쌍령전투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글은 그동안 내가 쌍령전투에 대해 공개적으로 썼던 글들이 주로 병자록 C유형과 병자남한일기, 연려실기술에 기초해서 설명했던 것과 달리 그동안 쌍령전투와 관련해서 전혀 사료로 이용되지 않았던 남급본 병자일기와 필자미상 필사본 병자일기의 기록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토대 위에서 병종 구성, 전투경과, 진영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쌍령전투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분은 별도의 설명이 없이도 본문 내용만으로 이 글의 의도를 이미 이해하셨겠지만, 다시 부연설명하자면 이 글은 쌍령전투에 대해 그동안 알려져 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소개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판단을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일반적인 인식과 다른 내용을 제기할 의도로 쓴 것이다.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쌍령전투 논문 형태로 본격적으로 논의, 검토된 적이 없는 주제이므로 이 글에 나오는 전투경과에 대한 설명은 기본적으로 나의 주관적 판단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은 반드시 고려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