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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선조실록과 安邦俊의 역사기술을 중심으로-
鄭求福(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논문개요.
본 논문은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 임진왜란에 관해 남긴 기술을 사학사적 관점에서 분석 검토한 논문이다. 이를 사학사적으로 고찰하자니 이에 관한 기본 사료인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록에 대한 사료비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은 본인이 일찍부터 가졌던 생각이지만 이를 전반적으로 다루지 못 했다. 기초적인 연구에 불과하다. 안방준은 성혼과 이이의 서인계의 학자로서 과거시험장의 모습이 엉망인 것을 보고 일생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절의를 지킨 사람들의 전기를 씀에 헌신하였다. 그가 16세기 말의 사림으로서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에 관한 연구는 조선후기 사림의 문화를 이해함에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그는 의병을 주로 다루었고, 호남지방의 의병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호남지방의 연구에는 이미 그의 저술이 이용되고 있지만 그 전반적 성격에 대한 파악은 미진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서인의 당색을 뚜렷이 가진 학자이고 그는 당쟁을 시정되어야할 것으로 주장하면서도 그의 저술은 당색을 강하게 띠었다, 거기에 현재 한국사학계에서는 당색을 띈 저술을 다룸에 있어서는 회피하는 성격하는 점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적극적으로 다루기를 기피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 시대를 다룸에 있어서 좋건 싫건 간에 당색을 초월해 역사를 연구할 수는 없다. 또한 객관적인 사료비판을 거쳐 그의 역사학이 가지는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임진왜란 연구 상 아직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을 보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본고를 집필했다. 그의 임진왜란 중 호남지방의 의병활동에 대한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임진왜란에 대한 관점은 선조실록 중의 임진왜란 기사를 서수한 백사 이항복(1556-1618)의 역사관과 여러 가지 점에서 달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 기술은 중앙관료의 임진왜란에 대한 관점을 비판한 것으로 이런 그의 견해는 선조수정실록에 반영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역사학은 증인을 대어 서술한 점 등 탄탄한 증거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배층인 사림 위주의 의병장 중심의 역사였다는 한계점을 지적했다. 그의 역사학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호란을 겪은 집권층은 의병 중심의 임진왜란사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의병이 중시된 것은 광해군 대에 시도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을 위해서 열녀와 열사를 조사했기 때문이고, 임진왜란시의 의병과 그 구국정신은 지방의 사림문화인 사우의 건립과 사액을 받거나 추증을 받는 조처로 확대되어 조선후기 사상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1 머리 말
임진왜란은 1592년 일본군의 침입에 의하여 조선의 전국토가 7년간 유린되고 많은 사람이 죽어가거나 포로로 잡혀갔으며 원군인 명나라 군대가 참전한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조선의 국왕은 평양으로 그리고 의주로 파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느냐고 큰 혼란을 겪었다. 일본군이 연 30만 군대가 참전했고, 명나라 군사가 연 12만 명이 참여하였으며, 우리나라 군대도 수십만이 참여하였다. 미증유의 전국적 대전란을 전체적,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료의 성격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조선시대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이용되는 기본 자료는 실록이다. 실록은 역사학자만이 아니라 많은 일반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자료이다. 이는 실록 자료가 국역되고 디지털화되어 일반 사람에게 보급되고 있기 때문이다.1) 그러나 임진왜란의 실록 자료는 다른 실록과 달리 충실하게 기술되지 못하였다.
우선 전쟁 중 중앙 정부가 지방으로 옮겨 다니면서 평상적인 기록이 그 때 그 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전란으로 지방의 보고가 제대로 수합되지 못했으며, 또한 이 시기는 극심한 당쟁으로 인하여 실록편찬에도 당파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 등이 이전 실록과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실록 자료를 만드는 춘추관의 사관 기능이 전쟁 중 한동안 중단되었으며, 그 결과 실록 자료의 내용이 대단히 부실할 뿐만 아니라 서술에서 파당적 입장이 강하게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임진왜란의 중요 기사를 담고 있는 선조실록에 대한 사료학적인 연구가 제대로 깊이 있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직 실록에 대한 수십년전에 영인본을 출간할 때에 신석호가 쓴 해제가 유일하게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 연구에 이용되고 있는 자료는 이 밖에 당시 관련 일기자료와 문집자료 등이 있는데 16세기 이래 지방의 사림이 형성되어 그들에 의한 일기자료나 문집 자료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임진왜란 연구가 주제별로 연구됨으로서 필요한 자료만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 연구에서 문헌에 대한 비판을 한 업적으로는 이형석의 연구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도 관련 사료에 한하여 다른 기록이 전할 때에 문헌의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문헌를 언급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자료의 성격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는 충분한 연구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사료학적인 연구는 이후 진척된 것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본고에서는 연대기의 중심자료인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임진왜란 기사에 관한 서술과 편찬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고, 안방준이 남긴 임진왜란 기술에 대한 성격, 그리고 이것이 선조수정실록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안방준의 사료를 이해함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안방준은 당시 호남 지방의 의병활동에 대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실록 편찬자의 견해와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선조수정실록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이는 선조수정실록에는 재야의 기록이 대폭적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안방준이 인진왜란의 의병에 대한 이러한 공로와 관련하여 그의 역사학이 사림시대라는 역사의식과 깊은 관련이 됨을 밝히고 그의 역사학이 가지는 한계점도 지적될 것이다.
2. 선조실록의 사료적 문제점
임진왜란의 사료는 사료학 상의 일반 구분 원칙에 따라 1차 사료, 2차사료, 3차사료로 나눌 수 있다. 대체로 일반적인 실록은 춘추관에서 사관이 1차 사료를 매년 연말에 모아서 월일 순으로 기록 정리한 자료인 ‘시정기(時政記)’를 편찬한다. 이런 시정기를 춘추관에서 보관했다가 왕이 죽으면 그 왕에 대한 실록을 편찬한다. 이 점에서 실록은 엄격히 말하면 2차 사료에 속하지만 실록이 편찬되고 나면 원래의 모든 문서가 폐기되기 때문에 1차 자료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정부가 지방으로 옮겨 다녔기 때문에 임진왜란기의 실록 자료는 정상적인 실록의 자료 수집과는 판이하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임진왜란 이전 선조 즉위년으로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까지의 모아둔 춘추관의 자료도 국왕이 1592년 4월 30일 서울을 빠져나가자 성난 민중에 의하여 경복궁이 불 질러지면서 궁 안에 설치되어 있던 춘추관의 사고의 자료가 모두 소실되어 임진왜란 이전의 자료가 극히 엉성하다 함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즉 선조 24년까지의 기록은 매년 1권의 실록으로 편찬되었다. 또한 1592년 전쟁이 발발한 해의 1월부터 3월까지의 기록은 전혀 없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실록청에 많은 편찬관이 참여하여 많은 자료를 모아 놓은 것 같지만 임진왜란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전쟁사의 연표를 작성할 수 없을 정도로 빠진 부분이 너무나 많다. 특히 임진왜란 동안의 기록이 부실했음에 대하여 이를 수집 정리하자는 안을 백사 항복(1556-1618)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 춘추관 낭청이 춘추관의 영사(領事) 감사(監事) 등 당상의 뜻이라 하여 아뢰었다. ‘근일에 관상일기(館上日記)를 살펴보니 임진 1년은 전혀 기록하지 않았고, 계사(1593), 갑오(1594), 을미(1595) 3년 중 기록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경우 10개월의 분이나 되니 그 당시의 사관의 성명조차 기록해 둔 곳이 없어 기록을 찾아 보완할 길이 없으며, 병신(1596), 정유(1597), 무술, 기해의 4년의 일은 1년 중 기록되지 않는 것이 많은 경우 8-9개월이고 적어도 4-5개월 이상이 되지 않으니 지금 만약 이대로 방치하면 조선은 끝내 역사가 없는 나라가 되어 후일 논하는 자가 금일의 성패의 자취를 찾으려 해도 근거가 없게 될 것이다.(중략)
이는 비각(秘閣)의 일이라서 밖의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지금까지 유유히 9년을 보냈다. (중략) 임진 1년은 좌우 사관이 임명되지 못하였으나 혹 참상관으로 춘추직을 띤 사람이 임시로 사관의 일을 행하였으니 그 당시 붓을 잡은 관원을 일일이 조사하여 추수(追修)하도록 독촉하고 계, 갑, 을 3년간에 재직했던 사관(史官)의 성명과 직급, 임용 일월의 선후는 이조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혹 가히 살필 수 있는 문서에 의거하거나 본원이 외임에 있거나 휴직 중이거나, 상중에 있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추수(追修)하도록 할 것이며, 병신 이하 4년 간은 사관 성명을 근거 자료에 의해 모두 일일이 조사해 내어 기일을 정하여 그 안에 자료를 추수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 하였다.
이 내용은 임진왜란 중의 사관의 기록의 상황에 대한 대단히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실록을 사관의 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1592년의 사관의 기록이 전혀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사관을 지낸 사람들로 하여금 당시의 기록을 추수(追修)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춘추관의 이런 건의에 대해 왕의 답변은 “史官이 사실을 기록함에는 반드시 근거할 말한 사실에 따라 해야 하며 이를 후세에 전해야 하니 자의로 미루어 편찬해서는 안 된다. 만약 혹 사실을 잃으면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하여,2) 사관의 추수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위 인용문은 이항복의 白沙集에 전하는 내용이다. 이 글이 올려 진 때는 위 인용문 중 9년의 세월을 허송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는 1600년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내용의 기사가 선조실록 33년(1600) 12월 1일 자에 그대로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3) 그러나 왕의 답변에서 왕은 사료의 수집을 거부함을 명백히 적고 있다.4) 어떠튼 선조는 상계한 안건에 대해 즉각적인 조처를 취하라 하지 않고 엉뚱한 답변을 하고 있다. 이는 왕의 답변으로서는 정상적인 처리라고 할 수가 없다.
선조가 이런 답변을 내린 것은 혹 당시의 선조의 사관에 대한 불신에 기인하는지 모르겠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임진년 6월에 왕이 평양을 탈출하여 의주로 갈 때에 중국에 귀부하겠다고 하자 전임 사관이었던 조존세(趙存世), 김선여(金善餘)와 승지로서 겸임사관이었던 임취정(任就正), 박정현(朴正賢) 등 4명의 사관이 기록해 둔 사초를 모두 불태우고 도망친 일이 있었다5). 물론 선조가 이를 의식하고 이런 답변을 내렸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선조로서는 사관을 지냈다고 하여 그들의 기록을 신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선조의 조처는 큰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선조는 자신의 부끄러운 전쟁의 수행이 역사가 올바르게 기술됨에 부담을 느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진 왕이 이를 거부한 명분은 역사의 자료는 진실되어야 한다는 점이었지만 이는 단지 구실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선조 34년(1601)에 춘추관에서 당시 사관이었던 조존세 등으로 하여금 사초를 수정하게 하자고 건의하였을 때 역사상 사초를 버리고 도망친 사관에게 국사를 더럽히게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6)
하기야 당시 사관들로 하여금 자료를 모으게 한다고 해서 없는 자료가 나올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철저한 자료 확인 조사를 전국적으로 실행하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의 기록이 거의 없다는 춘추관의 건의를 중요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왕이었던 선조의 역사의식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선조는 임진왜란의 기록을 정확히 서술함에 큰 부담을 가졌던 것 같다. 선조는 중국으로 귀부하려한 조처가 후일 후회스러운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선조가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 자신의 책임이었음을 내심 통감하고 있었음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관은 이에 왕이 위 상언에 엉뚱한 답변을 내린 것을 비판하는 사론을 싣고 있다.7) 사관은 왕이 사건의 顚末을 아는 사람이 많게 됨을 싫어했음에 불과하다고 논했다. 이 사론에서는 환도 직후에 경연 석상에서 신하들이 야사를 수합하여 기록을 만들자는 건의를 하였을 때에도 선조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야사는 개인이 기록한 것으로 오늘의 소설이 아니라 사실성이 높은 개인기록이다. 환도 직후 경연 석상에서 야사의 수합을 건의한 사람은 정경세(鄭經世)였다.8) 이 사론은 선조의 정확한 역사 기술에 대한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자료이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자료가 이항복의 문집에 실렸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는 그는 이미 춘추관의 당상관 이상이었음으로 이 견해는 곧 바로 이항복의 견해를 춘추관 낭청으로 하여금 왕에게 올리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를 춘추관 영사(領事), 감사(監事) 등 당상관의 뜻으로 아뢰었다는 표현 속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위 인용문 중 ‘관상일기(館上日記)’는 시정기(時政記)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관상일기(館上日記)’라는 용어는 고유 명칭이 아니라 관(館)에 보관하고 있는 일기라는 뜻으로 ‘上’은 이두문의 표기로 이해된다. 이두문일 경우 음은 ‘자’로 읽었다고 추측된다. 어떻든 이는 즉 춘추관에 보관되고 있는 일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시정기는 전임사관이 매년 년말에 각 관청의 기록을 수합하여 연월일 순으로 기사를 정리한 기록을 뜻한다.9)
이항복이 임진왜란 기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음은 그의 문집 중에 그의 장인인 「권율의 유사(遺事)」, 「서애유사(西厓遺事)」, 「이충무공유사」 등을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진란을 당하여 자신의 가족이 왜병을 피하는 처사에서 당한 애처로운 사정을 일기로 서술하고 있으며, 삼도체찰사로 가서는 진주성 전투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10) 그의 문집은 임진왜란에 관한 소상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또한 그는 광해군 원년(1609년)부터 8년(1616)까지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총재관인 영춘추관사로 활약하다가 북인 기자헌(奇自獻 1562-1624)으로 교체되어 부책임자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서 실제적으로 실록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11) 그래서 임진왜란 기사는 그의 관심 하에 편찬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임진왜란의 공신책봉에도 깊게 간여한 것으로 이해된다.12)
임진왜란 7년의 기사는 임진년 1-3월까지의 기사가 전혀 없이 4월 13일부터 일본군이 총퇴각한 1598년 12월까지 제26권으로부터 제107권까지 전쟁 기사는 총 82권이라 할 수 있다. 전공까지 논의된 것을 계산한다면 선조 37년(1609년) 6월 25일까지 총 170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전쟁이 끝난 시기까지 만을 다루고자 한다.
7년간의 전쟁기사는 위에서 인용한 내용처럼 곧바로 정리된 것이 아니고, 후일에 정리된 내용도 함께 들어 있다. 전쟁 당시에 왕의 소재지는 평양, 의주, 해주로 전전하면서 1593년 10월에 환도하였다. 따라서 파천정부에서는 전쟁 기사를 제대로 보관할 수 없었고, 그 기록 보관 담당자도 연속되지 못하였으니 자료가 제대로 정리될 수 없었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 일어난 전투상황에 대한 보고는 지방관이 보고하는 狀啓에 의존했고, 그 장계가 도달하는 시차만큼 늦게 서야 정황을 보고 받게 되었다. 따라서 전국적인 전투 상황을 그 때 그때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선조실록」은 장계 중심으로 편찬되었음으로 지방의 전투 상황을 정확한 날자에 기술하고 있지 못하다. 예를 들면 1593년 6월 21일부터 28일까지 있었던 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7월 16일까지도 해주에 머물고 있던 왕은 성이 함락되었음을 모르고 걱정하고 있는 말을 정원에 전달한다. 7월 18일에 가서야 성이 함락되었음을 확인하지만 이에 대하여 왕의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실록은 전하고 있다. 따라서 선조 실록은 전쟁 상황에 대하여 올바른 기록을 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빠친 자료가 너무나 많다. 더구나 이 전투는 패전이 많았기 때문에 곧바로 이를 알리는 보고가 행해지지 않았다. 또한 역사 기술에서 내용의 부실은 말할 것도 없고, 달(月)의 잘못된 기술, 일간지의 잘못된 기사 등도 허다하다.
여기에 당파적인 입장의 견지와 심한 인물평으로 인해서 선조실록은 다시 편찬되어야 한다는 공론이 일찍부터 일어났고, 이에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의 북인정권 하에서 편찬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인조반정 후 경연관 李睟光(1563-1628), 李廷龜(1564-1635)가 수정을 건의하고13) 좌의정 尹昉(1563-1640)이 이를 역설하였다.14) 이 중 이수광, 이정구, 윤방은 모두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내용의 편당성이 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를 부주로 담고 있어 이전의 역대실록인 다른 실록과도 달랐기 때문에 이를 수정하자는 논의가 거의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내외의 중대한 문제가 발생함으로 인하여 실록의 재수찬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인조 19년(1641) 2월 12일 대제학 이식(李植1584- 1647)의 상소로 선조실록의 수정이 결의되고 이식에게 그 수정을 전담시켰다. 택당 이식은 인조 21년(1643) 5월 22일부터 7월 13일까지 전임사관인 예문관 검열 심세정(沈世鼎)을 대동하고 무주의 적상산 사고에 가서 선조실록 중 수정할 곳을 초출하여 온 이후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수정작업을 시작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은 매년 각 1권으로 총 42권이었다. 이 작업이 완료된 것은 효종 8년(1657) 9월이었으나 선조 즉위년부터 선조 29년(1596)까지는 이식이 정리한 것이었다.15) 따라서 선조수정실록의 임진왜란 기사는 이식의 주관 하에 정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범례도 이식이 작성한 것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의 범례가 실록의 말미에 붙여져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선조대왕실록수정 범례
1. (선조)실록은 비단 훼예(毁譽)함에 있어 진실됨을 잃고 근거 없이 잡다히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무릇 인명·지명·직명이나 대체로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있는 국사(國事)가 뒤섞이고 착오되었다. 또 명신의 주소(奏疏) 중 치란(治亂)의 기틀과 관계된 부분이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지금 비록 잘못된 것을 제대로 산개(刪改)하지는 못했으나 큰 사건의 경우에는 본말의 곡절 및 명신의 주소는 있는 대로 찬록(纂錄)하였다.
2. 실록은 임진년 이전에는 日別 기사가 없고 혹 月別 기사나 年別 기사만 있다가 임진년 이후에 들어와서야 일별 기사가 있다. 지금 야사(野史)에서 채집한 것 가운데 일별로 기록할 수 없는 것은 월별로 기록하였고 월 또한 자세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해의 끝에 써 넣었다.
3. 강령(綱領)에 실릴만한 것을 먼저 기록한 다음 잡기(雜記)와 비지(碑誌)·행장(行狀) 순의 차례로 기록하였다.16)
4. 야사류(野史類)는 문자가 황잡(荒雜)하므로 지금 요약해서 문장을 만들었고, 지장류(誌狀類)는 미악(美惡)이 너무 수식되어 있으므로 지금 한결같이 공론(公論)에 입각하여 사실을 채록해서 기록하였으며 본문(本文)대로만은 싣지 않았다.
5. 야사를 이름난 사람이 썼다 해도 사실이 아니면 없앴고,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이 쓴 것이라도 사실을 기록한 것이면 취하였다.
6. 여러 기록을 잡다하게 취하였는데 한 사건의 기록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내용을 합쳐 간략하게 줄여 썼다. 그중 논술한 뜻이 연결되지 않고 그 곡절이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우 부득이 윤문(潤文)을 가하여 내용을 완성시킨 것도 간혹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가 이미 낙착된 일이거나 제가(諸家)에서 공인한 논의들로서 모두 그 내력에 근거하여 쓴 것들이다.
7. 야사는 시비(是非)가 온전하지 못하므로 모두 연별로 고르게 배열하지 못하였고 장지류(狀誌類)는 포창(褒彰)하기만 하고 폄하(貶下)한 곳이 없어 수정실록에 삽입시키기 어려웠다. 이렇게 보면 이 수정실록이 인물의 평가에 긍정적인 부분이 많고 부정적인 부분이 적어 완전치 못한 듯하기는 하나 그래도 야사와 장지류에 비하면 낫다고 할 것이다. 실록을 편찬할 때 간흉이 총재(摠裁)하여 주장하면서 모두 자필로 단정하여 깎아내고 덧붙였었다. 그 간흉들은 세상에서 외면되어 도당이 매우 적고 조정에 들어찬 전후의 인사들을 모두 원수로 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포창한 것은 단지 그 자신과 친밀한 몇 사람에 불과했는데, 그들이 비방한 사람들은 모두 선조(先朝)에 신임받던 명신(名臣)들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 명신들만이 모함을 받은 것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성세(盛世)의 청명한 미덕을 더럽게 물들인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수정실록에서 아무리 많이 포창한다 하더라도 지나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론에 입각하여 시비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볼 만한 내용은 실록 속에 스스로 갖춰져 있다. 그러나 간흉들 스스로가 자신을 포창하고 꾸민 부분에 대해서는 부득이 사필(史筆)의 예(例)에 의거하여 약간이나마 공의(公議)를 붙여 두었다.
8. 명신의 주소(奏疏) 중 한때의 시비에 관계가 깊거나 후세의 귀감이 되는 것들은 전재(全載)하기도 하고 부분을 뽑아서 싣기도 하였는데, 세교(世敎)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9. 무릇 실록에 기록된 것 중 대사(大事)의 본말이 자세히 갖추어진 것과 명신(名臣)의 계차소장(啓箚疏章)을 모두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이 수정실록에 다시 싣지 않고, 단지 그 대략만 남겨두어 사건의 개요를 알게 하였다.
10. 이 수정실록을 완성한 뒤 실록 중에 속이고 잘못 처리한 실상과 금일에 수보(修補)한 뜻을 차례로 언급하고 일단의 사론(史論)을 지어 그 말미에 붙임으로써 후고(後考)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위의 범례의 각 조는 1,2,3,4로 기술되어 있지 않고 모두 '一'로 기술되어 있으나 인용의 편의상 필자가 순번을 매겼다. 이 범례를 통하여 선조실록은 야사 기록의 취합, 인물평가에 대한 기록을 비교적 공정히 하려고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수정실록의 주안점은 주로 인물의 서술에 두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선조수정실록의 범례 2항에서 임진왜란 이후의 기사는 일별로 기술했다고 하지만 그런 기사는 간혹 날자를 밝힌 경우가 눈에 띨 뿐 거의 대부분의 전쟁기사는 매달의 초하루 간지만을 밝히고 실었으므로 1일자의 기사라고도 할 수 없고, 날자의 기록은 거의 대부분 생략하였다고 표현함이 옳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날짜에 대하여도 다르게 서술되었다. 즉 선조실록에는 선조 25년 4월 13일에 왜군이 부산진과 동래성을 격파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고, 선조수정실록에서는 4월 14일에 부산진이 함락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대체로 임진왜란에 대한 전체적 상황파악은 선조수정실록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날자에 대한 파악은 실록이라고 하여 결코 신빙할 수 없다.
범례 7항 중 총재가 마음대로 깍아버렸다는 기사 중 대표적인 것이 이이와 이황의 졸기(卒記)이다. 이이의 경우 “병조판서 이이가 졸하였다.”17)라고만 쓰여 있다. 이황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나 이 경우 사론을 붙이고 있다. 이를 처사 조식의 졸기18)와 대조해보면 너무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는 이이와 이황의 경우 졸기의 기사를 삭제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없는 사실을 덧붙였다고 하는 실례는 유성룡의 졸기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서술부분을 삭제하고 사론으로 싣고 있다.19)
선조수정실록은 다시 편찬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이식이 5월 22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무주 적상산 사고에 가서 실록을 열람하고 잘못된 부분을 추출하여 7월 18일에 돌아와 보고 하였음으로 왕래한 시간을 빼면 이 실록을 실질적으로 검토한 시간은 겨우 한 달 정도의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기사만이 관심대상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하여도 그 엄청난 자료를 일일이 정확하게 검토하였다고 할 수 없다. 중요 인물에 대한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부분만을 중심으로 초록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내용을 임진왜란과 관련지어 살펴본 연구논문으로는 리종필, 이재호, 이남희, 노영구의 논문이 있다20). 이 중 리종필의 논문은 두 실록간의 전반적인 차이점을 밝히는 데에 치중한 논문이고, 이재호의 논문은 그 부제에 보이고 있는 바와 같이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이 근거가 없음을 밝히는 데에 주력한 것이다. 이남희는 실록자료를 통해서 의병에 대한 집권층의 인식의 변화를 파악하려 하였다. 임란 후에는 관군보다 의병에 대한 기대를 하였으나 선조 26년 이후에는 의병에 대한 인식이 변하여 반란자로 변할 가에 대한 우려를 하였다. 의병의 국가군대화, 포상조처 등을 살펴보고 있다. 경상우도에 있어서 의병의 성격이나 활동에 대한 서술에서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차이가 보이고 있지 않다고 평하고 있다. 특히 우도 지방의 의병에 대한 남명학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노영구는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기억되었는가를 주로 살폈다. 초기의 인식은 공신포상과 광해군대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통해서 주로 명나라 원군의 힘에 크게 의존하였다는 국왕의 기본 인식을 가졌음을 공신포상등의 조처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선무공신이 홀대된 이유 중에는 선조의 인식 외에도 전쟁의 원훈이 이미 전사해 없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선무공신의 포상에 인색한 것은 의병에 대한 공로를 관군을 조금 보완하는 공로만이 인정되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17세기 초 광해군대의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과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을 통해서 의병중심의 임진왜란사의 기억화가 이루어졌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사림의 충렬 중심의 사우건설은 임진왜란의 의병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크게 전환하였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는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에서 의병의 역할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의 임진왜란에 대한 기사 중 서술문 가운데에 구체적으로 “실록을 살펴보면” 하는 기사가 나온 것은 세 번 보이고 있는 바 이들 내용이 모두 인간에 대한 평가의 잘못을 서술하면서 인용하고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일곱 사람이 해당되고 있다.21)
더구나 선조수정실록은 기사를 날자 별로 기술하지 않고 거의 대부분 월별 기사로 썼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 예를 들어 새로운 자료를 삽입해 넣은 부분 이외에는 임진 전란사 자료에 대한 특별한 수정 사항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임진왜란 기사에 대한 성격을 밝힌 리종필의 논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22). 이 논문은 아직 위의 연구자들이 인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인 연구라기보다는 개략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1). 전쟁의 책임론으로 김성일의 언행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점,
2) 의병활동에 있어서 전라도 의병을 영남 의병보다 앞세우고 있는 점,
3) 선조실록에 기술되지 않은 호서의 조헌, 고경명, 양산숙의 의병을 서술하고 있다.
4) 수군의 전쟁에서 이순신에 대한 우호적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 정유재란 때의 요시라의 간첩행위에 대한 서술 등을 언급한 점이다.
이처럼 선조수정실록에서 호남지방의 의병에 대한 기술은 비교적 보충되어 정리된 것은 4월 22일 곽재우 의병이 먼저 일어났으나 6월 기사에서 날자에 구애되지 않고 의병의 전반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조헌 고경명의 의병을 앞에 서술하고 있다. 이에는 다음에 살필 안방준의 임진왜란 기술이 반영된 것으로 이는 이식과 안방준과의 세 차례의 서신 왕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임진왜란 중 의병장의 졸기는 쓰고 있는 점은 사림의 기록인 야사류의 기록을 크게 보충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3. 안방준의 임진왜란 기사 서술
3.1 안방준의 일생과 학문과 성격
안방준(1573-1654)의 가계와 학맥에 대하여는 이미 상세히 밝혀진 바 있다.23) 그는 죽산 안씨로 그의 5대조 때부터 보성에 정착했다. 그는 전남 보성군 오야리(梧野里)에서 아버지 첨지중추부사 중관(重寬)과 어머니 진원(珎原) 박씨 사이에서 1573년(선조 6년)에 중관(重寬)의 차자로 태어나 중관의 아우 重敦의 입후자로 들어갔다. 그의 자는 士彦이었고, 호는 빙호(氷壺)라 칭했고, 학자들에 의해서는 그가 산 곳의 지명을 딴 牛山이라는 호가 널리 알려졌고, 포은과 중봉을 숭배하여 그 호를 딴 隱峯은 그의 문집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우산은 송광사 북측에 있는 한 산으로 보성, 순천, 동복의 사이에 있고 보성 북쪽 60리, 순천 100리, 동복으로부터 50리 지점이 있다. 그는 보성에서 태어나 11살때부터 14세 때까지 외갓집의 소개로 퇴계의 문인인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1526-1597)에게 수학하였고, 14세 이후에는 자형인 난계 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했다.
안방준은 16세 때에 과거 시험장에 나갔으나 시험장이 난장판임을 목격하고 이를 개탄하고 이후 과업을 포기했다. 그 후 그는 위기지학의 공부에 전념하면서 절의를 지킨 임진왜란의 의병장에 대한 기술 등 당대사의 기술에 전념했다.
19세 때에 우계 성혼(1535-1598)을 파산(坡山 파주)로 찾아가 그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스승이 죽은 26세 때까지 여러 편의 간찰을 통하여 학문의 종지를 굳건히 세웠다. 20세 때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스승 박광전의 의병에 참여하여 공주에서 체찰사 송강 정철(1536-1593)을 만났을 때 그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정유재란 때에는 부모를 모시고 피난을 갔다. 32세 때(1604)에 생부 첨추공이 별세하여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신해년(1611)에 양부로 부터 받은 서울 낙산 매계동 집에 이사하여 살다가 계축년(1613) 겨울에 송산으로 내려오다가 새벽에 송광사 옆의 우산을 발견하였다. 갑인(1614) 42세 때인 늦가을에 서울에서 완전히 고향으로 이사하여 이곳에 집을 짓고 일생을 보냈다.24)
그의 학문은 철저한 위기지학을 하면서 절의를 특별히 중시했다. 그가 호를 포은과 중봉을 사모하여 두 사람의 호에서 한자씩을 따서 자신의 호를 ‘은봉’이라고 한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학자는 절의를 지킴이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15세 때에 1589년에 2월에 왜구가 침입하여 가리포와 흥양을 약탈한 사건이 있었고, 이 때 녹도 권관이었던 이대원(李大源)25)은 이웃 군현의 수령들이 협조하지 않는 가운데에서 전사했다. 그의 절의를 기사로서 쓴 것에서 그는 남의 절의를 높이 존중한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19세 때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스승 박광전을 따라 공주에까지 갔음을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비록 임진왜란 전체를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전쟁의 분위기를 직접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노모를 모시고 피난을 갔다고 한다.
그는 24세 때에는 晉州敍事를 진주성 2차 전투에 대한 종합적 서술을 하였다. 이에서 장렬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기록을 남겼으며, 41세 때에는 조헌의 기록을 전하기 위해서 항의신편을 지었고, 그림을 그려 인쇄하였고, 43세 때(1615)에는 湖南義錄을 지어 최경회 이하 16인이 죽음을 바친 일을 기술하였고, 또한 壬丁忠節事蹟을 지어 송상현 이하 8인의 사실을 기록하였고, 三寃記事를 써서 맹장이었던 김덕령과 그의 매부인 김응회, 김대인이 무함을 당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실을 기술하였고, 중봉의 東還封事를 수찬하였고, 1634(62세) 때에는 混定編錄을 지어 선조 8년(을해)부터 우계 율곡을 폄하한 혼란된 평가가 백세 후에 스스로 공론으로 정해질 것이라는 뜻으로 동서분당의 역사를 기술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힘든 작업을 했다. 이는 후일 효종 원년(1650년)까지 정리 보완되었다. 66세 때(1638)에는 「師友鑑戒을 써서 중봉선생 전후의 상소는 사우를 구하는 것일 뿐 동서분당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71세 때(1643)에는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이를 처리한 과정의 역사인 기축기사를 집필하였다. 「기축기사」는 대단히 소상한 자료를 가지고 쓴 것으로 그의 역사서술의 정확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이 해에는 택당 이식으로부터 선조실록의 문제 6개항의 질문을 하는 서신을 받고 이에 답하였고, 72세 때(1644)에는 釜山記事를 써서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전투상황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노량기사를 써서 이순신의 죽음을 서술하였다. 그는 82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학문을 놓지 않았다. 그의 역사집필은 당대사였으며, 특히 절의를 존중하여 많은 역사 傳記를 썼다. 그의 당대사 서술에 있어서 특징은 진술자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역사 기술의 진실성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사실감이 있는 서술을 하고 있다.
그가 교유한 당대의 학자는 성혼, 정철, 김류, 장유, 이정구, 김장생, 송경헌, 조익, 이식, 윤황, 오윤겸(1559-1636), 윤방, 윤근수(1537-1616), 고순후, 이시방, 이시백, 송시렬, 유성증, 김집, 조송년, 유계, 민정중 등 당시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던 서인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그는 서인의 당색을 분명히 하였으며, 그가 호를 은봉으로 택한 것처럼 그는 중봉 조헌(趙憲)의 절의와 기개를 크게 숭앙하였고, 배척받는 그의 입지를 위해서 그의 전 노력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가 당시 당파의 영향을 크게 비판한 것처럼 그의 당색 또한 뚜렸했다. 그러나 당색이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일은 엄격하게 삼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성격이 철저한 경학 중심의 실천적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저술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불자기(不自欺)했다는 신념을 그대로 믿어도 좋다고 이해된다. 그는 국가의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업적을 밝힘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가 서술한 임진왜란 기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3.2. 안방준의 임진왜란 기사서술
그가 임진왜란 관계의 기사를 남긴 것으로는 다음의 여덟 가지를 들 수 있다.
1) 「진주서사(晉州敍事 1596년 24세 작 후일 사론을 덧붙였다.)
2) 「호남의록(湖南義錄」:(1615년 43세 작)26) 최경회 이하 16인의 절의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의 전기. 1626년(인조 4년) 간행
3) 「임정충절사적(壬丁忠節事蹟)」: (1615년 43세 작) 송상현 이하 8인의 전기
4) 「삼원기사(三寃記事)」: (1615년 43세 작)- 김덕령, 김응회, 김대인이 무고로 죽은 사실을 밝힘
5) 「白沙李公壬辰諸將士論 辨」(1633 61세 작)
6) 「부산기사(釜山記事」: (1644 인조22-72세 작)
7) 「노량기사(露梁記事」: (1645 인조 23-73세)
8) 76세(무자 1648 인조 26) 11월 同郡의 士友로 하여금 방백에게 상서하여 최장군 大晟의 순절을 포상하게 하였다. 그의 정려를 세우고 증직을 하게하였다.
그는 24세(병신 1596 선조 29년) 12월 「晉州敍事」를 찬하였다27). 이를 찬하게 된 계기는 을미년(1595) 겨울에 광양현에서 안방준이 직접 진주성 전투를 겪은 林遇華를 만나 그로부터 들은 것을 중심으로 썼다.28) 임유화는 6월 22일 관군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일본군의 향도자로 부역했던 사람이다. 그는 기억력과 학식이 있는 진술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진주서사」는 단지 6월 18일부터 6월 29일까지의 처참했던 전투상황만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배경을 폭넓게 서술하고 있다. 즉 당시 명군의 배치상황과 일본과의 화약 진행 중이었던 서술 등을 하면서 일본과의 통교를 반대한 조헌의 상소문을 핵심으로 깔고 있다. 성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군사에 대하여는 과장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진주성 전투에 대하여는 대단히 사실적 서술을 하고 있다. 특히 김천일의 시신을 그의 둘째 아들 象坤이 진주성에 가서 왜군이 철수 한 다음날 들어가 10여일 간의 노력 끝에 시신을 찾았다. 아버지의 품에 가지고 있던 심유경에게 보내려던 7언 장시 17운을 얻었는데 이는 화의의 잘못을 지적해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론으로 서애가 징비록에서 진주성 전투의 함락은 창의사 김천일의 실책이었다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는 장문의 사론을 쓰고 있다.
200년간 전쟁을 모르고 지내던 백성이 난리를 창졸히 당하여 관군은 의병이 공을 세우는 것을 두려워했고, 무부는 문사가 그 공을 빼앗을 가 두려워했다. 사졸이 장수를 믿지 못 하고, 서리들이 사족을 믿지 못하며, 노비가 주인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 공이 인륜을 밝혀 성을 지킬 것을 주장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니 비로소 사람들로 하여금 부자 군신 상하의 분수를 알게 하였다는 것과 호남을 지킨 제일의 공을 이루었다고 서술했다. 영남과 호남의 소식을 강화도에서 행조에 전달한 역할 등 여러 가지 공을 지적하였다.
진주성의 전투상황에 대하여는 다음의 논문에서 상세히 다루어졌다.29)
2차 진주성 전투상황의 보고서는 그 작성된 연대 순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7월10일자로 접수된 창의사 김천일의 장계이다.30) 이 장계에 의해서 당시 진주성 전반에 대한 개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진주목사 서예원의 최근 행동과 진주성의 군대가 총 3000명 내외라는 것, 전라순찰사 권율의 철수명령 등 6월 15일까지의 상황이 보고되고 있다.
둘째의 보고는 당시 경상도 三嘉 古縣에 주둔하고 있던 황해 방어사 李時言의 치계이다31). 이 자료는 2차 진주성 전투가 완전히 패배했다는 첫 보고였다. 이시언의 척후장인 안인무(安仁武) · 김억린(金億麟) 등이 순찰 중 나체로 포획한 정로위 출신 印潑의 증언에 의한 보고였다. 인발은 충청병사의 군관이었는데 진주성이 함락된 6월 29일 밤에 신북문에서 남강으로 뛰어 내려 시신 속에 숨어 있다가 탈출한 사람이다. 그의 진술은 7월 1-2일 쯤으로 추정된다. 이 진주성 함락의 보고서에는 우리 측의 제장의 명단이 알려지고 있다. 장령 대부분의 명단이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의병 복수장 고종후, 그 부장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진주목사 서예원, 그 판관 등이 이항복의 보고서와 안방준의 진주서사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으며, 특히 이에서 빠친 충청도 지역의 관군의 지휘자 명칭이 보이고 있다.32) 이는 그가 충청병사 황진의 군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충청지역의 관군의 지휘관의 명칭을 추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는 2차 진주성 전투를 의병중심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준다. 즉 이에 참여한 의병은 이미 관군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주성 2차 전투에 대한 세 번째의 보고는 경상우도 관찰사인 金玏의 치계였다. 이 치계도 진주성이 함락된 후 3-4일 만에 올린 것으로 관군 중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죽음 여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33). 그러나 진주성 함락의 주 책임은 목사 서예원의 허술한 조처에 있었음을 풍원부원군 유성룡의 치계로 알려지게 되었다34).
그리고 해주에 있었던 중앙 정부에서는 정확한 파악을 위해 선전관을 파견하기로 하여 1593년 7월 말경 유대기(兪大琪)를 파견했으며, 그는 8월 16일 경에 진주에 도착하여 현지에 널려져 있는 시신을 보면서 작성했기 때문에 현장감은 보이고 있으나 전투 전반에 대한 정확한 진상보고를 하지 못하고 있다35). 이는 그의 역사의식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서 왕은 진주성 패배에 대한 의견을 표시하지 않자 비변사에서는 8월 7-8일 경에 서둘러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김해부사 이종인, 사천현감 장윤, 거제현감 김준민 등을 포상하는 조처를 취했다36). 이는 이항복이 주선한 것으로 이해되며37),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스스로 바친 의병을 포상할 필요가 있었던 정치적 결단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진주성 전투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는 이항복의 기술이라는 선조실록 권40 선조 26년 7월 16일(무진)조의 총체적 서술과 안방준의 「진주서사」를 들 수 있다. 안방준의 진주서사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임진왜란 중인 1596(병신)년에 쓰여진 것이나 최후의 본은 이항복의 자료를 참고하여 수정한 것이므로38) 그 이후의 것으로 이해된다. 안방준의 보고서는 임우화라는 증언 인물을 밝히고 있는 점에서 자료의 신빙성이 높다. 선조실록 권 40, 선조 26년 7월 16일(무진조) 자에 실린 총체적인 종합보고 자료는 이항복의 문집에는 전하지 않는다. 단 조경남((1570-1640)의 난중잡록 계사년 6월 29일 조 뒤에 영의정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체찰사가 되어 진주에 순행 차 도착하여 방문하고 함성곡절을 전기로 지었다 하여 인용하고 있는 내용이39) 위 실록기사와 일치하고 있다. 선조실록에 실린 내용은 실록이 왕조가 망하기 전에는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보감을 통해서 일반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조경남의 경우 1640년에 죽었기 때문에 숙종 1684년에 편찬된 선묘보감을 이용한 것은 아니고 백사를 통해 흘러나온 그 자료가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 후 조선시대 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같은 내용이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통해서 그리고 안방준의 진주서사를 통해서 진주성 2차 전투상황에 대한 자료로 활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안방준은 을미년(1596) 겨울에 광양현에서 진주성 전투의 참가자인 임우화(林遇華)를 만나서 그의 진술을 들었다40). 임우화는 6월 22일 진주 의병장 강희보(姜希輔)의 명을 받아 인근의 관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령을 전달하려고 성을 나왔다가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오히려 진주성 공격의 앞잡이 역할을 한 사람이다41). 그는 글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성내의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월 19일에도 오유(吳宥), 이잠(李潛)은 진주 무사 정국상(鄭國祥)과 함께 적정의 파악을 위해서 출성했다가 돌아 왔다. 임우화의 임무도 이런 임무를 띤 결사대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몇 년 후 병으로 죽었음을 안방준은 기술하고 있다.
안방준의 진주서사와 실록기사인 이 두 자료는 비록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기록은 비록 아니고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에 작성된 보고서였지만 여러 상황과 그 내용이 비교적 객관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의심스러운 서술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전체의 줄거리는 허구가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유성룡(1542-1607)이 쓴 징비록 자료에도 진주성 전투에 관련된 추가적인 기록이 보인다.
이후 진주지역에서 정리된 충렬록 자료가 있다. 이는 이상에서 언급한 중앙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되었고, 이에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진주출신 의병장의 기록이 이후 추가되었다. 이 자료는 국가의 공인을 받은 충민사와 충렬사에 배향된 인물을 다룬 점에서 공적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31년대에 완성된 자료이다 이때까지 국가에서의 포상조처에 관한 기록이 수렴되어 있다42).
안방준이 43세 때에 지은 호남의록(湖南義錄)은 단순한 의병기록이 아니라 절의를 위해 순절한 사람을 기술한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고경명과 김천일을 제외하고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최경회 이하 16인을 서술했다. 이에 포함된 사람은 최경회(崔慶會), 정운(鄭運), 백광언(白光彦), 소상진(蘇尙眞), 황진(黃進), 장윤(張潤), 김경로(金敬老), 안영(安瑛), 유팽로(柳彭老), 양산숙(梁山璹), 문홍헌(文弘獻), 최희립(崔希立), 강희열(姜希悅), 오유(吳宥), 오비(吳玭), 김인혼(金麟渾) 둥 16명의 출신지, 경력, 전사한 과정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1626년(인조 4)에 간행되어 택당 이식에 의하여 이를 참고하여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때에 선조수정실록에 전기로 반영되었다. 이는 원래 1607년(정미)년간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1537-1616)를 만나 호남의 절의 지사 중 고경명, 김천일 이외에는 전혀 모른다고 하자 그가 10명의 이야기를 했더니 자신을 위해서 그들의 기사를 써 주면 서발을 써주겠다고 한 부탁을 받았는데 그가 시간을 미루는 바람에 월정이 이미 세상을 떠나서 그를 추모하면서 이를 썼다고 한다. 이는 윤근수가 죽은 1616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며, 연보에 1615년에 편찬했다고 하는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는 연보 내용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자료는 임진 정유 왜란 중 일으킨 호남 지방의 의병에 대한 기록을 전해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중앙 자료에서 기술되지 못한 지방 의병의 활동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를 전해주고 있는 점에서 값진 자료이다.
그리고 안방준이 편찬한 「임정충절사적(壬丁忠節事蹟)」은 임진 정유년에 절의를 바친 동래부사 송상현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조령의 수비를 건의하였고, 신립의 막하 장수로 죽은 김여물(金汝岉-김류의 아버지), 임진강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죽음을 바친 조방장 유극량(劉克良), 해남현감으로 조헌의 금산전투에 달려와 조헌이 패한 후 싸우다 죽은 변응정(邊應井), 김해부사로 진주성 전투에서 죽은 이종인(李宗仁),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의 부장으로 진주성에서 죽은 이잠(李潛), 진주성에서 최병사의 막하로 죽은 평창군수 고득뢰(高得賚), 남원성의 전투에 참여하여 죽은 별장 신호(申浩)의 충절을 기술하였다. 이 기술은 전쟁의 전 기간에 있었던 전투에서 활약한 전국적인 의병장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다른 자료와 구별된다. 물론 다른 지방의 모든 의병장을 커버할 수 있지는 못 하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충절을 지킨 인물 자료로서 전국적인 범위로 서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송산현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즉 3일간 싸워 적이 물러났다가 마침내 함락되었다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후일 풍문을 듣고 기술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안방준이 43세 때에 편찬한 「삼원기사 三寃記事」는 임진왜란 중 용맹을 떨친 김덕령 장군이 그의 공을 세움을 두려워한 경상우병사 김응서 등의 모함으로 반란의 죄목을 씌워 죽임을 당한 일, 그의 자형인 김응회가 음모로 고문을 당하면서도 효친 충군, 스승에 대한 절의를 지킴 등의 일화, 순천 출신 김대인(金大仁)의 행동이 바르고 전란에서 백성을 구해낸 사람이 능성현령 이희간의 모함을 당하였으나 순찰사 황신의 처단으로 풀려났음과 좌수사 이유직(李惟直)의 모함으로 의금부에 갇혔을 때 관리가 뇌물을 청하자 이를 거절하고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원통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이런 삼원기사는 실록에는 서술될 수 없는 당시의 의인이었지만 원통하게 죽은 세 사람에 대한 생생한 자료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가 지은 「白沙李公壬辰諸將士論 辨」은 백사집의 잡저 1권43)을 1633년(계유 인조 11년) 10월에 어느 사람이 자신에게 보여주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시 여러 장수들의 공죄 시비와 우열을 논한 것이었다.44) 이글을 보고 안방준은 조목 조목 따지는 글을 썼다. 그가 비판한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다.
1) 이항복이 “선조가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의 공로와 권율의 행주대첩은 마땅히 首功으로 인정되어야 함은 바뀔 수 없는 정론이라고 했고”, 또 “원균은 오직 사람을 연유함이요 일을 이룬 자로 진실로 감히 이순신과 비교할 수 없다”고 서술한 점을 들어 어찌 그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를 다루었다. 안방준은 원균의 공로가 이순신의 도움으로 겨우 공로가 인정되었음에도 이순신을 ‘해왕(海王)이 된다’는 설을 전파하여 모함하였고, 전 수군을 패몰하였음에도 그 공로를 높이 산 것은 부당하며, 권율의 공로와 이순신의 공로를 병칭함도 부당하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원균은 안방준의 중부 동암공의 처족이었다. 원균이 통제사로 임명을 받고 부임 전에 동암공을 방문하여 인사할 때 ‘그가 이순신의 위에 올라섰음을 들어 수치를 벗었다’고 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원균의 인품을 판단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권율의 경우 웅치전투가 더 큰 공로라고 하고 있는데 백사가 지은 그의 장인의 비문에서는 웅치를 이치로 바꿔쳤으며 이치전투는 권율이 참여하지도 않았고 동복현감 황진이 치룬 전투였음을 밝혀 서술에 있어서 부정확함을 밝히고 있다.
2) 이순신이 경상도 진출을 주저할 때에 순천부사 권준과 담양부사 어영담이 이순신에게 글을 보내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다는 서술이 잘못임을 논변하고 있다. 당시 녹도 만호 정운의 건의를 수용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순신의 난중일기 5월 초3일자 서술을 통해서도 정운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안방준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이 왜군의 침입 소식을 봉화로 전달 받은 것으로 서술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서술이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경상좌수사, 관찰사, 우수사로부터 경상도 부산진과 동래진이 함락되었다는 사실 등을 문서로 통보받았다.
3) 이항복이 말하기를 “성을 지킨 공로도 세상 사람들이 오직 연안 이정암만 칭하고 진주의 김시민에는 미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도치된 것으로 정암의 공이 가히 포창할 만하지만, 시민(時敏)과 더불어 논하면 별로 차등이 있을 수 없다고 하고 정암이 상대한 것은 행장(行長)이며 그 군사가 만명을 넘지 않았고, 정암이 거느린 것은 수천명이 넘었으며 시민은 단지 거느린 부대만을 거느리고 원병이 거의 없었으며, 적은 행장이고, 적병의 수는 가히 십수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연안과 함께 비교한다는 것은 정론이 아니다”라고 논했다.
이에 대하여 안방준은 이 말이 잘못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논했다. 난초에 적군은 부산 동래로부터 북상에 주력하여 영남에 남은 군대는 불과 수만에 불과했고, 진주 이동은 옆 고을에 있는 적의 군대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고, 진주 이서로부터 호남은 당시 침략을 받지 않아서 열읍의 관군이 도처에 출몰했고,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웅거하고 있어서 성세가 대단하여 당시 적군은 오래지 않아 퇴각할 형편이었으며, 안방준의 이종이었던 정유경(鄭維敬)은 본주(진주)에 살았고, 시민과 함께 입성하여 함께 싸워 공을 세운 자인데 그가 안방준에게 말해주었다고 했다. 백사가 길에서 들은 것과 자기가 직접 들은 것 중 어느 것이 신빙성이 있겠는가? 하물며 행장(行長)은 당초에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와 함께 경성에 올라가 평양을 향하고 있었다. 계사년 정월에 이제독에 패하여 4월에 명나라 군대와 강화를 한 다음 경성 및 제도의 적이 영남에 물러나 있었고, 시민의 전투는 임진년 하추에 있었던 교전인데45) 행장 한 몸이 나뉘어 어찌 둘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연안은 평지성으로 천험의 진주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일대 주민 중 많은 사람이 적에 붙어 있는 상황에서 이를 지켜 낸 이정암의 공은 진주성의 시민의 공보다 큰 것이라고 논했다.
4) 이항복이 “세상에서 조헌과 고경명의 죽음을 절의를 위해서라고 하는 데 만약 왕사(王事)에 죽었다고 말한다면 가하나 절의라고 칭하면 이는 아니다. 조헌은 일개 서생으로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규합하여 왕실의 보존을 위해 뜻을 두었으니 충의는 가상하나, 금산 전투에서 좁은 지세에서 난군에 의해 죽었고, 고경명은 술에 취해 말을 타지 못해 죽었다고 하여 도망치지 않고 왕사에 죽은 것은 포장할 만하나 죽음에 나가 자기가 지킨 바를 잃지 않은 것은 김천일과 양산숙 2사람뿐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절의에 대한 해석을 공박하고 특히 고경명의 경우 관군이 도망을 치는 상황에서 전투가 있은 지 2일째에 싸우다 죽었는데 도망을 가지 못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을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하고, 그리고 중봉 조헌의 절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항복이 을사년(1605)에 쓴 ‘제봉정기록(霽峯正氣錄)’ 서문에서는 “제봉이 중국의 변성양(卞成陽)의 절의보다 더하다고 하였는데 그의 제장의 평을 한 신축년(1601)에는 절의가 아니다” 하였으니 을사년 이후에 절의를 얻었다는 말인가고 반박하고 상촌 신흠의 평을 인용해 실어서 그 비판이 부당함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진주성의 함락 시에 양산숙 이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쳤는데 오직 양산숙만을 든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그의 ‘진주서사’에서 밝힌 사람들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5) 이항복이 “명량해전에서 안위(安衛)가 일개 현령으로서 이순신의 분부를 받아 하나의 거함으로 적선 500여척을 물리쳤다고 한 기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겨우 8-9선을 수습하여 벽파정 아래서 요격을 할 때에 안위가 도망을 치려다가 순신에게 발각되어 참형을 하려고 하자 안위가 공을 세워 보답하겠다고 했고, 또한 여러 장수들의 용서해주라고 하여 이순신이 허락한 것인데 안위가 약간의 적선을 파한 것은 속죄의 뜻이었는데 명량전의 공과를 모두 안위에게 돌림은 부당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6) 이항복이 “대가(大駕)가 서순(西巡)할 때 사람들은 서쪽 길은 죽는 곳이어서 모두 적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하여 여러 장수들이 경기의 해안 지대에 머물면서 앞에서 적을 막는다고 했으며, 임진강 전투에서 패배하자 여러 장수들이 궤산해서 각자 살고자 도망을 쳤으며 대동강을 왕이 건너자 문신 들 중 학문이 있는 자가 남쪽으로 돌아왔고, 군사를 모으는 글을 보고 냉소하였다”고 평한 것에 대하여 이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냐며, 환도 후에 당국자 한 사람도 망국의 죄를 자책하기는 고사하고 호종한 공울 내세워 의기양양하고 여러 장사들의 선무녹훈 때에 청탁이 횡행하고, 공을 세운자를 증오하고 무공자를 녹훈하였다46)고 하여 공신 책정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했다. 그래서 김천일, 조헌, 고경명, 최경회, 황진, 정운, 김대인의 공은 끼이지 못하여 지금까지 수십년 간 사람들이 억울해 하고 있다고 하여 그 책임이 백사 이항복에게 있음을 비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공신책봉에 있어서 호종한 호성공신은 86명에 달하나 선무공신은 26명에 불과하며 그 중 공신에 책봉된 사람은 전공이 무엇인지를 잘 모를 사람도 끼어 있으나 정작 죽음을 바쳐 싸운 사람은 많이 탈락되어 있다. 이는 앞으로 구체적으로 연구해야할 사안이지만 그 공신 책봉이 부당하게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47)
이항복은 왕의 최측근에서 도승지의 역할과 이조 전랑. 병조판서를 5번이나 역임하면서 전국의 중앙군을 파악하는 중책에 있었고, 그만큼 임진왜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시기의 역사서술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고, 선조실록의 편찬 임무를 맡아 임진왜란 관련 사료를 정리함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를 가장 조목 조목 비판한 것이 안방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안방준이 72세 때에 쓴 「부산기사(釜山記事」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부터 녹도만호 정운(鄭運)이 전사한 1592년 9월 1일의 부산전투까지의 수군의 전투상황 전체를 기술한 것이다. 이는 上舍 朱曄이 일찍이 흥양의 수군으로 일기를 남긴 吳씨 姓을 가진 자의 기록으로부터 만들어 온 자료를 기초로 刪煩補略한 것이며 이는 정운이 죽은 후에도 원균의 무공함을 기술하였다. 우리나라가 안전한 것은 호남을 지켰기 때문이고, 호남의 지킴은 이순신 수군의 승리에 있으며, 순신 수군의 승리는 녹도 만호 정운이 앞장선 공이라고 하였다.
안방준이 73세 때에 쓴 「노량기사(露梁記事」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아마도 이순신을 측근에서 모신 송희립(宋希立)이나 그의 측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서술한 듯하다.
안방준이 76세 때에 감사에게 포상을 신청하도록 한 최대성(崔大晟)은 의병장으로 정유재란 때에 순천 왜교, 죽전 전투 등 20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의 아들 언립 효립 3부자가 보성의 안치 전투에서 죽은 사람이다.48) 선무원종공신에 녹권되었으나 죽은 지 수십년 동안 포상조처가 없음을 들어 보성군의 선비로 하여금 포장하게 하는 글을 올리게 하여 마침내 정려를 세우고 증직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안방준은 임진왜란 기록을 많이 남겼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잘못된 판단에 논쟁을 제기했다. 안방준의 임진왜란 기록은 그의 학문이 절의 중심이기 때문에 죽은 의병장의 지도급 인사에 대하여는 깊은 관심을 기우렸을 뿐 하층민의 일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의 현실개혁 의식에서 김육의 대동법 등을 극력 반대한 것49)과 더불어 그의 사상적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항복은 국가의 운영, 백성의 문제, 당파의 문제 등을 심도 있게 고민하면서 상하의 의사 소통, 당쟁의 피해를 중요 과제로 제시하고 그는 ‘力行’을 극력 주장했다. 이항복의 임진왜란에 대한 견해가 정부측의 견해를 대변한 것이라면 사림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평가한 사람으로 안방준의 기록을 들 수 있다. 그가 남긴 기록은 특히 절의를 세운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런 호남지방의 의병이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전기 등을 써서 당대의 기록을 남겼고, 이는 인조 21년에 택당 이식(李植)이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함에 일부 반영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식으로부터 구체적인 역사사실을 묻는 6개조항의 서신을 받고 이에 구체적으로 답해주었고50), 특히 조헌이 감사에게 4번이나 상소를 올렸다가 과격하다고 접수되지 않았다는 그의 기술이 선조수정실록에 그대로 서술되었다. 선조수정실록에서 안방준의 견해가 많이 참조되었고, 호남 의병이 강조되어 서술되었다.
4. 맺음말
임진왜란의 기록은 당대 중앙 정부에서 파악하는 것은 부실하기 그지없다. 임진년의 1년간의 연대기가 작성되지 않았고, 이후 7년간의 기록도 부실했다. 더구나 전시 중 보고되는 내용은 글을 올리는 사람의 과장이 있게 마련이었고, 중앙정부에서는 전국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이를 백사 이항복이 사료의 수집을 강조하였으나 선조의 엉뚱한 답변으로 곧바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이항복은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총책임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선조실록은 임진왜란에 대하여 방대한 기록을 남기도 있으나 실록기사라고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이는 일일이 엄정한 사료비판을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16세기 중엽 이후 지방 사림들은 지식인으로서 많은 일기와 기록을 남겼고 많은 문집 자료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런 문집자료도 의병사의 경우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이는 진위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실의 과장 등을 비판하여야 할 것이다.
선조실록은 북인 정권하에서 편찬되었다는 명분으로 인조 대에 수정실록이 편찬되는 첫 사례가 되었는데 이는 주로 당쟁의 문제만으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서인 정권하에서 수정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택당 이식은 공정한 서술을 했다고 이해되고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결론을 성급하게 내릴 수 없다.
재야의 학자로서 안방준은 성혼과 이이의 서인계열이었고, 당시 정국이 당파에 의하여 애증을 달리하는 폐단을 역설했다. 그는 기축옥사, 혼정편록 등의 당대사를 기술하였다. 이들 자료는 엄청난 많은 자료를 수집해서 쓴 것으로 지방에 있는 선비가 어떻게 그렇게 소상한 내용을 기술하였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일생 동안 강조한 것은 절의였다. 이는 중봉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승화하려는 것이었고, 기묘명현의 정신을 살리려는 것이었다. 그가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을 남긴 것도 무려 8편이나 된다. 그의 임진왜란 기록은 후일 호남절의록의 기초자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임진왜란 중의 기록 중 우리의 중요한 관심을 끄는 것은 백사 이항복의 임진왜란시의 제장들의 공과를 평가한 것에 대하여 정면으로 비판하고 논했다는 점이다. 이는 임진왜란사 만이 아니라 사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선조실록에 실린 임진왜란을 보는 중앙 정부 인사의 시각에 대한 지방 사림의 반론이 안방준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안방준의 반론은을 포함하여 그의 견해의 대부분은 인조대에 정리된 선조수정실록에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는 택당 이식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서 확인되지만 선조수정실록에는 많은 의병장의 졸기를 쓰고 있다. 이는 반드시 안방준 역사학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당시 호란을 겪은 후 정치적, 사상적으로 충과 열을 강조할 필요성이 결과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의병에 관하여 반드시 사림만이 아니라 하층민의 충열에도 선조수정실록은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광해정권을 붕궤시킨 서인정권에서도 필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
진주 지역인에 의하여 진주성 1, 2차 전투에 관하여 추가적으로 작성된 충렬록에서 모든 신분의 장병의 희생을 제사지내는 관행을 기술한 것은 역사의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의병들의 국가에 바친 충성과 유교적 절의는 물론 호란을 거친 후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문화의 반영이며, 또한 충절을 포창하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을 위해 충절을 바친 충렬과 의사를 조사한 일과 관련되고 또한 지방의 서원 사우건립과 관련되어 사림의 정신적 축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유교가 조선 후기의 지배사조로 끈질기게 작용하는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에 가면 조야의 기록을 통합하는 역사서술이 나타나게 되는데51) 안방준의 역사 기술은 재야의 기록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당대사에 대한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을 담당하여 편찬한 택당 이식에 의하여 상당부분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은 실록 자체를 재편찬한 것이 아니라 겨우 두 달 동안 사고에 가서 주마간산격으로 잘못 서술된 부분을 초록하여 이를 수정한 것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전쟁사 관계의 새로운 기사 삽입은 대단히 빈약했다. 매일 기사로 쓰지 않고 한 달 기사를 쓴 것이 사료적 신뢰성을 떨어지게 한다. 택당 이식은 전국의 감사에게 재야의 기록을 올리게 하여 이를 반영하려 하였다. 이 정보를 사전에 안방준에게 귀뜸을 해주었다.
안방준의 역사서술 자료는 호남 의병사 연구에 필독해야할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사에서 호남의 역할을 강조했고, 특히 호남지방의 의병 자료를 많이 씀으로써 호남 의병사에 있어서 불후의 금자탑 역활을 했다. 그러나 이는 호남지방의 의병사를 뛰어 넘는 조선 후기의 사상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그의 임진왜란 기술은 개인 장수의 공로를 표창하려 하였다는 점에 자료의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는 아직 신분층을 뛰어 넘는 초연한 신분의 모습은 보여지지 않는다. 이는 그가 살리려고 한 절의 정신이 율곡, 성혼, 중봉의 맥을 이어 임란 시의 호남 의병의 활동이 폄하되거나 숨겨져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당대의 역사를 기술했다. 그는 절의를 구체화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함에 평생의 힘을 쏟았다.
안방준의 은봉전서와 이항복의 백사집은 임진왜란을 연구함에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 대하여 중앙 관료의 평가와 지방의 재야 사림의 평가가 이처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고 중앙 관료의 시각을 바꾸게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비단 백사 이항복만이 아니라 서애 유성룡의 역사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 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서애의 해석을 그가 쓴 「진주서사」의 말미에서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점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의 기록에 대한 사료적 검토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깊은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1) 본고에서 인용하는 실록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이용하였고, 그 해석에 문제가 있는 부분에서만 원문을 대조하였다. 아래의 각주에서 인용한 실록도 모두 같다.
2) 白沙集 別集 권1 354면 한국문집총간 (62책)
春秋館 郎廳 以領監事堂上意 啓曰 得失之行於一時 是非乃定於萬世 自古國家所以重史官 以記一時之得失 以待萬世之是非 故國可亡 史不可闕 雖在搶攘顚沛之日 尤謹於載筆之事 近日就考 館上日記 則 壬辰一年 全然不記 癸甲乙 三年 闕錄者 多至 十朔 而其時史官姓名 亦無載錄之處 憑考追修 其道無由 至於丙申丁酉戊戌己亥 四年之事 一年之內 闕而不修者 多者八九朔 小不下四五朔 今若因循放過 則朝鮮終爲無史之國 而後之論者 於今日成敗之迹 徵之無據 事之寒心 無大於此 而事係秘閣 而非外人所得以知者 故悠悠九年 尙不爲朝廷一大擧措 是亦怪事 今欲釐正 茫然散沒 未易就緖 若又悠久 則 其勢將至於湮沒 而無傳 壬辰一年左右史不備 或參上兼春秋人員 權行史官之事 其時秉筆人員一一査考 督令追修 癸甲乙 三年間 史官姓名職次日月先後 令吏曹査出 或憑他可考文書 本員 雖在外任 或閑散哀疚之中 竝令追修 丙申以下 四年間 史官姓名 憑考有據 一一査出 刻期追修 何如
答曰 史官記實 必須憑可據之實 以傳後世 俾不得自意推撰可也 若或失實 所關非輕
3) 선조실록 권 132, 선조 33년 (경자) 12월 1일 기사 선조실록의 원명칭은 宣宗實錄이라고 해야 옳다. 선조가 죽은 후 광해군 8년에 묘호가 선종에서 선조로 격상되었다. 광해군 8년 8월 10일자에 선종대왕의 묘호를 선조라고 했으며, 광해군 8년 11월 28일에 선종실록이 봉안되었다. 이후 영조, 정조, 순조등의 왕호가 ‘宗’자 묘호에서 ‘조’로 바뀐 첫 선례가 선조이다. 그러나 학계에서 통칭하는 대로 선조실록이라고 칭하겠다.
4) “若無可據, 而自意追述, 則非但失實, 必有意外之弊, 此事甚難。”
5)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 6월 1일자 19번째 기사
사관(史官) 조존세(趙存世) 【예문관 봉교 겸 춘추관 기사관.】· 김선여(金善餘) 【검열 겸 춘추.】· 임취정(任就正) · 박정현(朴鼎賢) 【승정원 주서 .】 등이 도망하였다. 존세 등은 좌우(左右) 사관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면서 침문(寢門)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상이 자제(子弟)처럼 대우하였다. 이날 밤 네 사람은 상이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의논하여 결정하자 도망칠 것을 몰래 의논하고는 먼저 사초책(史草冊)을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어둠을 타고 도망하였다. 상이 길에서 자주 돌아보며 사관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 김선여 가 탄 말이 허약한데 걸어서 오느라 뒤에 쳐졌는가.”하였다.
그러나 선조실록에는 조존세 등 4명이 안주에서 도망을 쳤다고 기록하였고, 사간원의 상계로 조존세 등 4명은 사판(관원명단)에서 삭제되었다가 그 후 그와 김선여는 다시 예문관 대교, 봉교로 승진되고, 조존세는 옹진현령, 선천군수, 성균관 직강, 군기시 정(正)에 까지 승진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임취정도 그후 군수직을 거쳐 원주목사에 이르렀고 인조 때에는 판서의 직에 이르렀으며 박정현도 사은사로 명나라에 정사로 파견될 정도로 그들의 관직에 큰 제한을 받지 않았다.
조존세는 1562년 출생으로 21세에 증광생원시에 합격하고 26세 때에 참봉으로 문과에 합격했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호는 聽湖이었다. 이런 시종세력의 이탈은 사림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선조로 하여금 중국 망명을 포기하게 한 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김선여(1567-?)는 예조판서 김첨경의 아들로서 이산해, 유성룡의 천거를 받았다. 호는 栢川이었다. 임취정(1561-?)1589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박정현(1561-1637)은 이후 세 차례 명나라 사행에 다녀왔다. 호는 義谷 또는 應川이었다.
6) 선조실록 권 139 선조 34년 7월 2일(정유조) 참조.
7) 【史臣曰: “還都之始, 經筵官, 請收合野史, 而不從, 至是, 又有此敎。 所謂意外之弊者何也? 不過惡其議之者多也。 人君若正心修德, 用賢退邪, 一言一事, 皆可爲後嗣觀, 則其何弊之足慮。
8) 선조실록 권60 선조28년 2월 15일자 기사에 금년 2월 8일에 주강에서 검토관 정경세의 청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이날 춘추관의 영사, 감사 등의 상언이 있었으나, 선조는 추수를 믿을 수 없다고 부정적인 답변을 하였다.
9) 정구복, 한국중세사학사, II, 경인문화사, 2003. 152-154쪽
10) 그가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그의 문집에세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직 안방준의 「진주서사」의 말미에 언급되었고,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언급되어 그대로 인용되고 있으며 이는 선조실록 (선조 26년(계사) 7월 에 실려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나 선조실록에는 어디서 인용하였는지 언급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별도의 세심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11) 신석호, 영인본 선조실록 해제 참조, 영인본 21책
12) 李貞一, 「壬亂時의 功臣策勳考」. 蔚山史學 제3집, 1990.
13) 인조실록 권2 원년 8월18일 이수광(李睟光) 이 아뢰기를, “ 선조조(宣祖朝) 의 실록(實錄)은 적신의 괴수에 의하여 편찬되어 부끄럽고 욕됨이 심하니 당연히 고쳐 찬술하도록 해야 합니다. 폐조의 일기(日記)도 속히 편찬해야 합니다.”하고, 鄭逑가 아뢰기를, “ 선조실록은 이항복(李恒福)이 총재(摠裁)가 되고 신이 문형(文衡)으로서 제학 신흠(申欽)과 함께 찬수하다가 계축년 옥사로 죄를 입어 쫓겨났습니다. 그러다가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 초고를 모두 깎아 없애 볼 수 없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싫어하는 말을 제거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지금 개정한다 해도 앞으로 무엇을 근거로 할 것인가?” 하자, 정구가 아뢰기를, “예컨대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할 수 있습니다. 또 듣건대 외간에 조보(朝報)가 무진년부터 무자년까지의 내용이 있다고 하는데, 간혹 없어진 부분은 듣고 본 것으로 참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조신(朝臣)이 노쇠하여 차츰 고사를 잊어버리니 모쪼록 속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막중한 일은 속히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14) 인조실록 42권 인조 19년 2월 12일에 올린 대제학 이식의 上箚 및 선조수정실록 말미에 부록으로 붙여진 이식의 상소문에 의하며 이수광과 임숙영이 경연에서 말했다고 하나 임숙영은 이정구의 오기임을 실록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쓴 신석호의 해제에서도 이정구를 任叔英으로 잘 못 서술하였다. 신석호 선조수정실록 해제 조선왕조실록 25책.
15) 신석호 선조수정실록 해제 조선왕조실록 25책
16) 이 문장은 번역문의 내용이 부정확함으로 본인이 수정했다.
17) 선조실록 권 18 선조 17년 1월 16일자 참조.
18) 선조실록 권 6, 선조 5년 2월 8일자 참조.
19) 선조실록 권 211, 선조 40년 5월 13일자 참조.
20) 리종필, 「선조수정실록 임진조국전쟁관계기사와 그 사료적 특성」, 력사과학 2호 1977. 사회과학출판사, 李載浩, 「선조수정실록 기사의 疑點에 대한 辨析,- 특히 李栗谷의 십만양병론과 柳西厓의 양병불가론에 대하여-」, 대동문화연구 19.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6.
이남희, 「경상우도의 의병활동과 실록기사-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의병기사를 중심으로, 경남문화연구 제14호,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1992.
노영구, 「임진왜란 초기양상에 대한 기족인식의 재검토-화가산현립박물관 소장 임왜란도병풍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문화 31, 서울대한국문화연구소, 2003.
노영구, 「공신선정과 전쟁평가를 통한 임진왜란 기억의 형성」, 역사와 현실 제51호, 한국역사연구회, 2004.
21) 한 사례는 선조수정실록 권 31, 선조 30년(정유 1597) 12월 1일자, 세 번째 기사에서 黃愼이 간사한 사람이고 마음씨가 편파적이라는 서술을 인용하고 이를 부정하고 있으며, 유성룡이 통신사를 보내어 강화를 적극 주장하여 국사를 그릇쳤다는 평가와 근친하려 가서 어머니를 뵙고 野亭에 배용길과 술을 마시며 놀 때 배용길이 유성룡의 부모님 근친을 걱정하였다는 서술을 인용하고 유성룡의 효성을 극찬하여 이는 모함이라고 기술하였고, ‘정언(正言) 이이첨(李爾瞻)은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성품 또한 강개(慷慨)하여 간쟁의 풍도가 있었다.’고 인용하여 악당의 괴수를 극찬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사례는 선조수정실록 권 32 선조 31년 무술(1598) 3월1일자 기사에서 홍문록을 인용하여 도당에서 권점한 점수로 7점, 6점, 5점. 4점의 사람을 들고 있는데 원래 4점은 없는 것인데 윤두수가 그의 아들 尹暄을 끼워넣기 위해서 주장한 것을 들어 이는 당시 윤두수가 탄핵을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도당에 참석할 수 없는데 史臣이 허위로 날조했다고 쓰고 있다. 또다른 사례는 선조수정실록 권 32 선조 31년(무술) 5월 1일자 기사에서 암행어사 趙正立. 金義元, 李愖이 곡식운반선을 찾으러 파견했을 때 그들이 간사하고 용렬한 사람이라고 쓴 것을 인용하고 趙와 金의 행위를 곡필로 서술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22) 리종필, 「선조수정실록 임진조국전쟁관계기사와 그 사료적 특성」, 력사과학 2호 1977. 사회과학출판사, 34-39쪽
23) 고영진, 호남의 사림의 학맥과 사상, 혜안, 2007.
이해준, -은봉선생의 생애와 저술- (국역은봉전서 안동교 역주. 보성문화원출간, 2002.
24) 은봉전서 권9, 「牛山田舍記」
25) 송정현, 조선사회와 임진의병 연구, 학연문화사, 1998. 28-29쪽, 은봉전서 6책 연보에서는 그를 녹도 만호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그의 전기는 현전하지 않는다.
26) 이는 연보의 기록이나 그 편찬이 윤근수가 죽은 1616년 이후의 편찬임을 확인할 수 있어 편찬 연대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27) 은봉전서 1책, 권7, 「晉州敍事」
28) 은봉전서 1책, 권7, 「진주서사」 말미
29) 박성식,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 400주년기념학술대회 발표논문, 경남문화연구 14호, 1992. 그리고 진주성 전투에 관련한 연구사는 조원래,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와 그 역사적 의의」, 진주성전투의 재조명, 진주문화원, 2005. 국제학술행사 기조발표문 참조
30) 선조실록 권40, 선조 26년(계사) 7월 10일(임술) 창의사 판결사 김천일 치계
31) 이는 선조실록 권40 선조 26년 7월 16일자(무진)에 실린 기사이다.
32) 태안 군수(泰安郡守) 윤구수(尹龜壽) , 결성 현감(結城縣監) 김응건(金應健) , 당진 현감(唐津縣監) 송제(宋悌) , 남포 현감(藍浦縣監) 이예수(李禮壽) , 황간 현감(黃澗縣監) 박몽열(朴夢說) , 보령 현감(保寧縣監) 이의정(李義精)이 별도로 확인되고 있다. 선조실록 권40, 선조 26년 7월 16일(무진) 기사 참조,
33) 선조실록 권 40, 선조 26년 7월 22일(갑술조) “신이 처음 진주 의 사태가 급하다는 것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모든 수성(守城) 절차와 사망한 경외(京外)의 장사(將士)와 군인의 수를 탐문하게 하였더니, 본주(本州)의 군사가 2천 4명, 본도 병사(兵使)의 군사가 4백 20명, 충청 병사의 군사가 97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의 군사가 60명, 복수 의병장(復讐義兵將) 전사의(全士義) 의 군사가 50명, 적개 부장(敵愾副將) 이잠(李潛) 의 군사가 50명, 표의병(彪義兵) 이계년(李桂年) 의 군사가 30명, 웅의 대장(熊義代將) 정원한(鄭元漢) 의 군사가 11명, 영광 의병(靈光義兵) 심우신(沈友信) 의 군사가 12명, 분의장(奮義將) 강희열(姜姬悅) 의 군사가 50명, 방의 대장(方義大將) 강희보(姜姬輔) 의 군사가 30명, 현웅군 대장(玄雄軍代將) 정충훈(丁忠訓) 의 군사가 20명, 채의 대장(蔡義代將) 정운호(丁雲湖) 의 군사가 10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를 전해 들은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본주 병사와 본도 병사의 군사 수는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최근 발굴된 경상병사 최경회의 간찰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상훈, 「임진왜란 연구에서 간찰의 활용」, 고문서연구 33, 2008. 54-55쪽 참조.
34) 선조실록 권 40, 선조 26년 7월 21일(계유)
35) 선조실록 권 41, 선조 26년 8월 30(신해) 선전관 兪大祺 馳啓文 참조.
36) 선조실록 권 41 선조 26년 8월 7일자 실록 참조.
37) 白沙集 부록 권 2, 「家狀」 15면 A 에 ‘及我國先後 壬辰癸巳 死事臣 高敬明, 劉彭老, 安瑛, 金天鎰, 崔慶會, 黃進 等 褒贈之典 皆 先生建白也’라고 쓰고 있다.
38) 안방준,「晉州敍事」 은봉전서 권 7, 1책, 경인문화사간 434쪽 「오성일기」로 되어 있으나 이 자료도 이항복의 문집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39) 조경남 난중잡록, 제2, 계사년 6월 29일자조, 임진왜란 사료총서 7, 역사 350-356쪽 참조. 여기에서 ‘전(傳)이라함은 김천일전기라고 생각되나 백사문집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40) 위 안방준 「진주서사」, 427쪽
41) 위 같은 자료 422쪽
42) 김강식, 「임진왜란 시기 진주성전투 참가자의 포상과정과 의미-충렬록을 중심으로」,진주성전투의 재조명, 진주문화원, 2005.
43) 이글은 현재 백사집 별집 권4의 「記夢」 기사 뒤에 제목 없이 실려 있다. 한국문집총간 62책, 419쪽에서 421쪽에 실려 있다. 그 서문은 「吾東方文獻不足 雖有大事業 大是非 數歲之後 率昧昧不傳 徵之無所 余嘗恨之壬辰之亂 余扈駕至平壤 超拜兵判 出入七年 常主中兵 凡諸將功罪, 施爲事功 槪已領略矣 厥後奉使南藩 參以記聞 質之公論 尤爲明著 而世無有明知其實狀 而能言之者 往往聞諸士大夫之論 則動相矛盾 有情跡倒置者 今猶如是 若傳之悠久 則其不爲紫之亂朱 是非霄壤者 希幾矣」라고 쓰고 있다.
44) 隱峯全書 권8, 1책, 483쪽
45) 이는 10월 3일부터 10일까지 진행된 전투임으로 계절적으로는 ‘孟冬’으로 표현했어야 옳다.
46) 선조 37년(1604) 6월 25일자로 선무공신에 책봉된 26명은 다음과 같다. 「선조실록에 1등은 이순신(李舜臣) · 권율(權慄) · 원균(元均), 2등은 신점(申點) · 권응수(權應銖) · 김시민(金時敏) · 이정암(李廷馣) · 이억기(李億祺)이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 · 권협(權悏) · 유사원(柳思瑗) · 고언백(高彦伯) · 이광악(李光岳) · 조경(趙儆) · 권준(權俊) · 이순신(李純信) · 기효근(奇孝謹) · 이운룡(李雲龍) 등 모두 18인으로 되어 있고, 이 중 유사원은 잘못 되었다고 선조수정실록에는 유충원(柳忠瑗)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중 한 예를 들면 정기원은 대간직을 지낸 문신으로 남원성이 함락될 때에 양호 총병의 司候직을 맡아 이곳에서 전사했을 뿐이다.
47) 이원익은 선조가 평안도로 파천할 때에 평안도 사람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하였고, 선무공신을 논의할 때에 선무공신에 넣어 순안에서 승첩한 것을 들자 자신이 순안에서는 승첩한 사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선무공신에 책봉될 수 없다고 상언하여 결국 이에서 배제되었음을 그의 문집 梧里集 권 2 「辭錄宣武勳箚」(癸卯 4월)의 글에서 밝히고 있다.
48) 조원래, 임진왜란과 호남비장의 의병항쟁, 아세아문화사, 2001. 318쪽.
49) 효종실록 권8, 효종 3년(1652) 5월 16일자 기사 및 은봉전서 권 2 「請罷京大同疏」참조.
50) 그 내용은 隱峯全書 권3, 「答李汝固問目」에 이식이 물은 내용과 답현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그가 물은 내용은 택당집, 권18에 동일하게 실려 있다. 그리고 그는 감사를 통해 올려 보내라는 정보도 제공하고 있다. 당쟁에 대해서는 혼정록의 기록을 많이 참고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식은 3차례의 서신을 안방준에게 보낸 바 있다. 그가 물은 6가지는 기축옥사건으로 정여립이 선조에게 미움을 산 첫 이유는 무엇인가?, 이발의 어머니 성은 무엇이며 그 때 어머니 나이가 이미 70를 넘었는가? 서애 징비록에서 진주의 함락은 김창의사의 실책에 기인한다고 한 해석에 대한 견해, 이치와 웅치는 어느 곳이며, 권율, 이복남, 황진이 어느 전투에서 싸웠는가? 김덕령의 억울함과 정유재란 에 호남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을 물음 등이었다.
51) 정구복, 한국근세사학사, 경인문화사, 2008. 55-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