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리천장 뚫었는데 다른 유리천장 있더라
여성리더스포럼 멘토 40인에게 듣다 여자가 열심히 하면 극성맞고 실력보단 뒷배경 있다는 억측. 조직사회 편견 아직 그대로
[아시아경제 조강욱 기자]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인 셰릴 샌드버그는 특별강연에서 4차 산업혁명 경쟁력의 핵심을 '성별 다양성 확보'로 꼽았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 새로운 혁명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국내를 돌아보면 이미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를 앞지른 여초(女超)시대가 됐다. 늘어나는 인구만큼 여성의 사회 참여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하지만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고위직에 오른 여성 리더들에게 우리는 '유리천장(보이지 않는 장벽)을 뚫었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여성이 '리더'라는 자리에 오르기가 여전히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실의 단면이다.
직장을 다니며 결혼과 출산, 육아까지 '1인 다역'의 슈퍼파워를 선보이며 여성 리더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힘들게 오른 그 자리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더 어렵다. 무엇이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일까?
지난해 말 한화그룹 최초의 여성 정규임원이 된 김남옥 한화손해보험 상무(강남지역본부장)는 십수년간 남편과 주말부부로 지내왔다. 경남권에서 근무할 때에도 남편과 자식은 하동에, 김 상무는 부산 등에서 생활했다. 임원이 됐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더 부족해졌다.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날이 부지기수다. 중졸 학력의 김 상무는 성별ㆍ학력 차별 없이 오로지 영업 전문성과 실적으로 승진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김 상무는 "함께 일하다보면 주변에 일 잘하는 여성은 너무 많지만 승진하는 여성의 비율은 너무 적다"면서 "여성들 스스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탁월한 능력과 헌신으로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선 여성들에 대한 시선 역시 곱지 않다. 남자 동기를 제치고 임원이나 경영자가 된 여성에겐 실력보단 다른 배경이 있는 것은 않은지, 숨겨진 인간관계는 없는지 갖가지 억측이 뒤따른다. 이 같은 남성우월주의가 사회 저변에 짙게 깔려 있다. 여성 리더들은 결코 이런 편견 때문에 좌절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한경애 코오롱인더스트리 상무는 "조직사회의 편견을 깨고 여성 리더가 되려면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면서 "여성 리더가 되고서도 남성 리더에 익숙한 조직의 편견에 실망하지 말고, 소신있게 리더 역량을 발휘한다면 조직도 결국엔 여성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혜원 제일기획 상무는 "남자가 열심히 하면 적극적인 것이고 여자가 열심히 하면 극성맞은 것, 또 남자가 화내면 이유있는 것이고 여자가 화내면 예민한 것이라는 편견이 존재한다"며 "여성 리더로 산다는 것은 그 간극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흔히들 여성 리더가 기가 세다는 오해도 이들에게는 부담이다.
안혜주 AIG코리안부동산개발 전무는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리더가 되면 무조건 기가 세고 강하다는 오해를 받는다"면서 "그래서 남자끼리는 술 한 잔 하면서 마음을 여는 경우가 흔하지만 여성 리더에게는 빈틈을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성공 뒤에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늘 자리해 있었다.
박경희 삼성증권 상무는 "두 아들의 입학식과 졸업식은 물론, 군 입대에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늘 마음 한편에 '엄마'로서의 역할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존재한다"면서 "이런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가족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박경순 국민건강보험공단 상임이사는 "여성들은 결혼하고 자녀를 양육하면서 아이나 혹은 가정 문제 등에 걸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다"면서 "그때 넘어질 수는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유리천장을 깨는 일은 끝까지 버티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경제는 25일 저녁 아시아 여성 리더스 포럼의 멘토 40여명을 초청, '2016 멘토들의 밤' 행사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 권선주 IBK기업은행장, 이경옥 동구바이오제약 회장, 임수경 한전KDN 사장, 김수영 작가, 이영 여성벤처협회 회장 등 멘토로 참석했던 여성 리더들이 모여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 성과를 축하하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2. 높고 두터운 ‘유리천장’… OECD 29개국 지수보니 한국 또 꼴찌
임금이나 승진 등 직장 내 여성 차별을 보여주는 지수인 ‘유리천장지수(Glass-ceiling index)’에서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가운데 다시 꼴찌를 기록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5일자 최신호에서 OECD 회원국의 유리천장지수를 발표했다. 아이슬란드(82.6점) 노르웨이(79.3점) 스웨덴(79.0점) 핀란드(73.8점) 등 북유권 국가들이 1∼4위를 석권했다. 아이슬란드는 기업 이사회의 44%가 여성이었고 스웨덴은 의회 내 여성 비율이 43.5%에 달했다.
반면 한국은 일본(27위·28.8점) 터키(28위·27.2점)에 이어 25.0점을 얻었다. 한국은 유리천장지수가 발표된 2013년 이래 4년 연속 최하위였다. 특히 한국의 점수는 OECD 평균(56점)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이코노미스트는 노동시장 참여도, 소득, 기업 고위직 비율, 자녀 양육비용 등 기존 척도에 더해 올해는 육아휴직 기간도 추가해 지수를 산정했다.
한국의 성별 소득 격차는 36.7%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컸다. OECD 평균 소득 격차는 15.5%이며, 노르웨이는 6.3%에 불과했다. 한국의 기업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은 2.1%로 OECD 평균인 18.5%에 한참 못 미쳤다.
일본과 한국은 역설적으로 남성의 유급 육아휴직 허용 기간이 각각 1위(30.4주)와 2위(16.4주)였다. 통상 남성 육아휴직이 잘 보장되면 여성의 노동시장 복귀가 활발한데 한국의 경우 제도는 있지만 실제로는 잘 시행되지 않아 유리천장지수 상승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추가로
유리천장 : 여성과 소수민족 출신자들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조직 내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하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제용어이다. 남성에 못지않은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조직 내에 관행과 문화처럼 굳어진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고위직으로의 승진이 차단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원래는 여성들의 고위직 진입을 가로막는 조직 내의 보이지 않는 장애라는 의미로 사용하다가 여성뿐 아니라 소수민족 출신자들의 상황에까지 확대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이 용어는 1979년 미국의 경제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에서 여성 승진의 어려움을 다룬 기사에 처음 등장하였고, 1986년 동일한 잡지에 실린 다른 기사를 통해 재등장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1991년 미국 정부는 성차별을 해소하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제도적으로 독려하기 위해 유리천장위원회(The Federal Glass Ceiling Commission)를 만든 바 있다.
3. ‘주토피아’, 편견과 차별 이겨낸 토끼와 여우가 헬조선에 전하는 메시지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주토피아> 주인공 주디의 꿈은 경찰이다. 여자가, 그것도 체구 작은 토끼가 경찰이 될 수 있을까하는 주변 동물들의 회의적인 반응에도 주디는 1등으로 경찰학교를 졸업했고, 당당히 대도시 ‘주토피아’ 중심부 경찰서의 순경으로 발령받는다. 하지만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주차단속.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멋있게 개척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주디는 비로소 능력만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유리천장’의 두께를 실감하게 된다.
예전과 다른 약육강식 질서체계 대신, 피식자, 포식자가 한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주토피아’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미국 혹은 지구촌을 암시한다. 과거와 달리 육식동물에게 잡아먹힌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여전히 토끼는 사회적 약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럼에도 주디는 여느 토끼들과 달리, 오직 덩치 큰 동물들만 할 수 있다는 경찰에 도전했고, 신체적 체력적 열세를 극복하고 경찰이 되는 꿈을 이룬다. 하지만 토끼 순경 주디에게 허락된 길은 딱 거기까지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으면 안 된다고, 대한민국 헌법 제 11조 1항에도 게재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자 토끼가 자기보다 100배는 더 커 보이는 동물들과 경쟁하며 경찰이 되는 과정도 쉽지 않았지만, 경찰이 된 이후가 더 문제다. 우수한 성적으로 조직에 들어갔다고 한들, 작은 체구의 여자가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업무는 극히 제한적이고 대부분 한직을 떠돌게 된다.
그러나 신체적 열세를 근거로 자신에게 주어지는 차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주디는 자신이 원하는 임무를 맡기 위해 작은 초식동물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에 온몸으로 부딪친다. 그 과정에서 주디는 여우라는 이유로 냉대받고 있던 닉과 손을 잡는다. 여우는 교활하고 뒤통수를 잘 친다는 편견 때문에 일찌감치 꿈을 포기하고 사기꾼으로 살아온 닉은, 토끼라는 분수를 모르고 범죄 수사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주디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와 포기를 모르는 주디의 열정에 감복한 닉은 진심으로 그녀의 조력자가 되어 사건 해결을 돕는다.
토끼, 여우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의 냉대와 편견에서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주디와 닉은, 힘을 합쳐 자신들 눈앞에 놓인 유리천장을 과감히 뚫고 그들의 계획을 기어코 성공시킨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특정 종족을 이간질시키고 대다수 초식동물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하여 권력을 쟁취하려는 또 다른 차별과 편견이 존재했고, 이 또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주디와 닉은 다시 힘겨운 싸움에 돌입한다.
어떤 차별과 편견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극 중 주토피아의 직접적인 배경으로 작용하는 미국은 다시 불거진 인종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지난 11월 파리 테러 이후 이슬람 문화권을 경계하는 시선이 힘을 얻고 있다. 굳이 외국 사례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한국만 해도 수많은 차별과 편견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에 의해 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정해지는 사회. 수저 계급론을 만든 수많은 청년들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한민국을 두고 ‘헬조선’이라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은 여전히 은연중에 존재하는 성차별을 견뎌야 한다. 더 이상 ‘노오력’만으로 성공을 약속할 수 없다는 인식론이 팽배한 이 나라에서 오직 ‘노력’과 ‘패기’만으로 계급적인 한계를 당당히 극복한 토끼와 여우 이야기는 감동으로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에서나 가능한 판타지로 들린다.
그러나 차별과 편견이 완전히 사라지는 이상향을 만들 수는 없어도, 그 속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을 최소화시키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한다. 사람의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요소가 많다는 것. 그러니 세상이 그대를 힘들게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행복하게 갈 수 있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태어날 때부터 입에 물린 수저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대한민국에 불시착한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