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는 수몰지구가 된 안동의 '멀먼대' (원뜻은 '말은 맨 곳')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마치 흰 학이 무리지어 앉아 있는 듯한 희고 둥근 돌들이 눈에 띈다. 그 포도송이를 본딴 모양의 흰 돌 위에는 '내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로 시작되는 우리 시대의 고전과 같은 시 「청포도」가 새겨진 시비가 놓여 있다.
7월과 청포도, 그리고 「청포도」의 시인. 시에 대해 문외한이라 할지라도「청포도」의 첫 구절만은 자연스럽게 읊조릴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이육사의 고향은 낙동강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안동 도산이다.
안동시에 내려 육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가 있으니, 그 첫 번째가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이다. 하회마을이나 민속촌 등 여러 유적지가 있으나 도산서원은 육사 생가와 이어져 있고, 육사의 정신적 태반과도 같은 곳이라는 점에서 육사를 제대로 느끼자면 이곳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육사가 전통적인 선비 집안에서 정신적·문화적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음은 육사의 수필「은하수」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거니와, 육사의 출생지에 와 보면 그 느낌이 더욱 짙어진다. 육사의 본관은 진성(眞城)이지만, 이곳 안동은 조선 왕조의 세도정치를 손안에 쥐고 놀았던 안동 김씨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비록 대원군 때 와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고는 하나 종택이니 고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눈에 많이 띄고, 무엇보다도 퇴계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육사가 어떤 문화적 배경과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중요한 판단 자료가 된다.
안동역에서 도산서원까지는 30여분 거리.
"지금 안동이 어디 옛날 안동하고 같은 줄 아십니껴."
나를 태우고 가던 택시 기사는 자녀가 다 자라 대학에 다닌다는 나이 쉰이 넘은 아저씨였는데 안동이 이름뿐인지 잊혀진 도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보다 너른 땅에 채 20만이 못되는 인구, 시의 절반을 이루는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으며, 변변한 공장 하나 구경하기 힘든 미개발 도시라는 푸념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유서 깊은 고장이라고 하나, 무관심과 적은 투자가 안동을 영남 북부지역에서도 낙후한 지역으로 만들었노라고 했다. 그는 나중에 육사의 생가를 보고, "생각보다 초라하지요. 그쵸?" 하고 자신이 되레 멋쩍어 했다. 원촌동 생가터도 택시 영업 25년에 학자들이나 간간이 찾을까 찾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노라고 한다.
퇴계 이황이 4년에 걸쳐 직접 지었다는 도산서원은 정조 때 지방과거를 치렀다는 도산별과(陶山別科) 자리와 낙동강 줄기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수 수려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 때 성역화된 이후, 그 옛 위용을 견학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던 듯, 지방 각지에서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가 방명록에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서원을 굽이돌아 오른쪽 길로 빠지면 퇴계 종택(宗宅)의 오래된 기와집을 만날 수 있으며, 그것을 옆에 두고 산길을 달려 그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육사의 생가터와 묘소인 것이다.
필자는 이곳에 오기 전에 이육사의 이력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시인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육사는 문학청년 시절을 거친 적이 없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고 40평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34편 남짓의 시를 남기고 갔다. 육사는 좁은 의미의 문학도라기 보다는 민족운동가, 독립투사로서의 일생을 살다 간 사람이었다. 17회에 걸친 구금 투옥 끝에 결국 옥사(獄死)로 일생을 마감한 그이 생애는 후손의 입장에서는 삼가 옷깃을 여며야 할만큼 장엄한 것이었다. 김용직의 말대로, 사림 계층 출신의 시인으로 항일 저항의 시를 쓰고 그 최후를 민족운동 전선에서 마친 이는 육사 하나를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육사의 시 중에서는 카프 KAPF 계열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전투적 구호나 생경함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즉 그 당대에 유행했던 정치적인 시운동의 흔적을 담고 있지 않으면서도 형식과 내용에서 서정적 심미성과 고전주의적 균형을 갖추고 있다. 이런 사실은 육사의 투사적 생애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의외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점이 그의 출신 성분과 그를 지배했던 유가적 이념, 선비정신과 문학과의 상관 관계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육사의 고향인 안동 도산은 육사 시의 뿌리이자 사상의 거처인 셈이다.
2.
육사가 18세가 될 때까지 자랐던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遠村里) 생가는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1978년 안동댐이 완공되면서 수몰을 우려하여 1976년에 이전한 것이라 했다.
전통 한옥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주택가 한가운데 숨어 있는 '생가' 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대문 안쪽의 좁은 마당에 생가 표지석과 안내판, 비석 등이 창고 안에 쌓아 둔 집기들처럼 몰려 있어 밖에서는 쉬이 눈에 띄지 않았고, 몇 사람에게 물어 용케 집을 찾아냈을 때 그것은 '은폐' 되어 있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원래의 생가가 있던 마을은 100여호가 넘는 큰 부락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한때 번성한 곳이었다고 하나, 이제는 고가 몇 채만 쓸쓸히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왔을 뿐이다. 생가 앞뜰에는 꽃밭이 있었으며, 그 한 편에 청포도가 심어져 있었다 하니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라는 시구는 어쩌면 거기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태화동의 생가집 마당에도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멀먼대 마을에서 옮겨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직 청포도는 달려있지 않았다.)
생가는 홑처마 일(一)자 집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평행하게 배치되어 다소 특이한 가옥 구조(二자형)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육사는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의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던 것이다. 본명은 원록(源祿),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사용했다고도 한다. 육사(陸史)라는 아호는, 잘 알려진 대로 감옥의 죄수 번호에서 따온 것이다.
어린 시절, 육사는 이 집에서 뿌리깊은 가문의 후예답게 엄한 가정교육을 받는 한편, 밤낮으로 한학을 수학하면서 성장하였다.
내 나이 7, 8세쯤 되었을 때, 여름이 되면 낮으로 어느 날이나 오전 10시쯤이나 11시경엔 집안 소년들과 함께 모여서 글을 짓는 것이 일과였다. 물론 글을 짓는 다 해도 그것이 제법 경국문학(經國文學)도 아니고 오언고풍이나 줌도듬은 해보는 것이었지만은 그래도 그때는 그것만 잘하면 하는 생각에 당당히 열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수필 「은하수」중에서
그리고 가을이 되면 '강(講)'에 대비하여 자정을 넘겨 가며 「논어」,「맹자」,「대학」,「중용」같은 경서를 외우는 게 일과였고 책과 씨름하다 창문을 열고 보면 하늘에는 무서리가 내리고, 먼 데서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듣곤 했다고 한다. 그의 유·소년기 교육은 이처럼 철저히 '전통적 선비의 품격을 지향' 한 것이었다. 육사의 시에서 드러나는 타협할 줄 모르는 기개나 의인(義人)정신은 어쩌면 이러한 엄격한 유가식 교육과정에서 그 바탕이 닦였을 것이다.
육사의 가계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육사 5형제 중 원록, 원기, 원일이 의열단(義烈團 : 1919년 만주 길림에서 조직된 반일 비밀결사로 장소를 정하지 않고 이동하며 폭력에 의해 일본의 요인 및 그 주구(走狗)들을 암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단체, 단재 신채호도 이 단체에서 활동했다)에 가입하는 등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있고, 1927년 의사 장진홍의 조선은행 폭파사건 때는 4형제가 한꺼번에 검거되기도 했다. 육사가 항일 저항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의병장 허위(許蔿)가 그의 외척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는데, 7세 때 경술국치를 목격하고 사익보다는 정의를 앞세우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육사와 그의 형제가 항일운동전선에 뛰어 든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가 연보를 보면, 육사는 12세 때 예안 보문의숙에 다니며 신학문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다. '내가 배우던 중용 대학은 물리나 화학이니 하는 것으로 바뀌고 하는 동안 그야말로 살풍경의 십년이 지나갔었다.'(「연인기」) 라고 고백했듯이, 이 시기에 이르면 육사의 내면을 지배했던 유학이라는 전통 세계는 점차 힘을 잃고 있었다.
그 십년 동안, 그는 16세인 1919년에 3·1 운동을 목도하고 18세 때 안일양(安一陽)과 결혼하고 대구 교남학교를 다녔으며 22세인 1925년에는 원기, 원일 등과 의열단에 가입했다. 이후 계속되는 검거와 투옥의 험난한 역정이 시작되는 데, 3형제 중 육사가 가장 행동적 기질이 강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육사는 상부의 밀명을 받고 북경에 가서 조선 군관학교에 입학, 1년간 훈련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동창생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권총 사격의 명수였고 군관학교 시절에는 정치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서른이 넘은 나이로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기도 했는데 그때 쓴 정치평론들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육사가 시대적 움직임에 꽤 정통했고, 개인적 삶 역시 시인이라기 보다 운동가에 더 근접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성격은「절정」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초강하고 비타협적이건마는 친구들에게 관인(寬仁)한 것으로 알려지고 경찰서에서는 요시찰인이었건마는 문단에서는 시인 행세를 한 것을 보면 그가 소위 단순한 시인이 아니었던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아우 이원조의 회고대로, 육사는 시인 이전에 투사였고 투사이면서 곧 시인이었다. 그렇지만 육사 역시 인간적인 번민과 고통에 시달렸는데 그의 파란많은 삶은「절정」의 강인함 뒤에 숨겨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배쪼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을이 구죽죽한 어촌보다 어슬프고
삶이 틔끌만 오래묵은 포범(布帆)처름 달아매였다.
남들은 기뻣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를 밀항하는 '쩡크'와 같애
소금에 절고 조수에 부프러 올랐다.
-「노정기」1, 2연
이 대목에서 우리는 거듭되는 옥고와 고난, 늘 불안과 긴장의 얼음판을 걸었던 육사에게 과연 시(詩)란 무엇이었던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빈궁과 투옥의 40평생에 거의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으며, 문학청년이 아니었던 까닭에 30고개를 넘어서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육사, 그럼에도 그토록 시를 좋아했다는 것은 이원조의 말대로 육사가 혁명적 정열과 의욕을 그대로 '시에 빙자(憑藉)해 꿈도 그려보고 불평도 폭백(暴白)' 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어떤 한 사람에 대해서, 그를 투사로서 이해해야 하는 가 아니면 시인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식의 이분법적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란, 시인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삶의 총체를 금광석처럼 응고시킨 언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시와 행동이 아름다운 일체를 이룬 예를 찾기 힘든데, 그 높고도 보기드문 경지를 펼쳐 보이는 것이 바로 육사의 시이다.
육사의 시력(詩歷)은 1935년 「신조선」에「황혼」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육사 나이가 서른두 살. 만년에 이르러 시작된 그의 시작은 문학수업을 거치지 않은 아마추어가 쓴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본격적인 자취와 성과' 를 보이는 것이었다. 김종길은 이점에 대해 육사가 기질적으로 '초강(楚剛)과 풍류' 를 타고났다고 본다. 곧 '초강과 풍류' 는 전형적인 한국 선비의 기질적 특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청포도」나「광야」등에서 나타나는 동양적인 풍격, 형식미를 그 증거로 내세운다. 그런데 이는 육사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한학의 소양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육사와 교분이 깊었던 신석초도 「이육사의 생애와 시」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한시의 영향이 많았다고 나는 생각한다……그의 시작 태도에는 항상 중국시가 오랜동안 지탱해 온 전통적인 격조의 엄격한 규범, 정서 표출의 즉물성과 영상의 미, 그 감각성들이 존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구시의 형식에 곁들여 몇 편의 주옥과 같은 작품을 남겨 놓았다.
즉, 어렸을 때부터 한시를 읊조린 그이 바탕이 '닭 우는 소리', '매화향기' 등의 시구에서 나타나는 동양적 상상력으로 이어지고, 여기에다 중국 등지를 왕래하면서 획득한 대륙적 정서와 근대적 상상력이 결합하면서「광야」에서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을 감각적으로 실감케 하는 육사만의 탁월한 시적 비유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육사의 시는 낭만주의나 모더니즘, 퇴폐주의 같은 특정한 문예사조에 묶어서 생각할 수 없는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뛰어난 심미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이는 항일운동을 하는 육사가 문단내의 특정한 유파나 동인에 소속되어 활동할 만큼 여유가 없었으리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그와 친했던 문우는 신석초, 윤곤강 등 몇 사람 정도였고 문단내 교우관계 또한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육사는 시력 10년에 한시 3수를 포함하여 34편의 시를 남겼을 뿐이다. 이중 비교적 후기에 창작된 「광야」와「꽃」은 미발표 유고였는데 나중에 유고 시집에 수록되면서 알려진 작품들이다.
육사가 남긴 시 중 「절정」,「교목(喬木)」,「청포도」,「광야」는 육사 시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이자, '한국시의 가장 높은 수준을 달성한 시' 들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절정」(1940)에서 육사는 '서리빨 칼날 진 그 우에 서다’‘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며 극한적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상징적 비유로 한 발자국의 후퇴나 양보가 없는 강철과 같은 의지와 결의를 보여준다. 당대에 이만한 시대정신과 대결의식을 보여주는 시인이 육사 말고는 없었다. 육사의 비극적인 삶은 「절정」을 통해서 가장 고도로 승화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같은 연도에 쓰여진「교목」에도 시대 상황에 맞서고자 하는 육사의 결연한 의지가 투영되어 있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속 깊이 거꾸러져
참아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교목」전문
세월의 불길에 스스로를 불태우고 ‘차라리 봄도 꽃피지 말라’는 단호한 명령의 어투로 암흑의 현실에서의 구차한 존명을 거부하는 절의를 내보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에 흔들리지 않는 결단을 부여하고 있는 시다.
육사의 치열한 현실인식과 강인한 의지는 다음과 같은 시관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시인의 감정이란 얼마나 빠르고 복잡하다는 것을 세상치들이 모르는 것뿐이오.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 줄 수 있는 겸양를 보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내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오……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은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수필「계절의 오행」중에서
그에게 시는 '금강석처럼 굳은 기백의 소산이며, 유언을 대신하는 삶의 최종적인 언어' 였던 것이다.
「절정」과「교목」이전에 쓰여진 것이 오늘날까지 널리 애송되고 있는「청포도」(1939)이다. 「청포도」는 다른 시에서 볼 수 있는 절박함, 단호함의 정서와는 달리 너그러움과 기다림의 여유를 보여주는 시이다. 의열단의 일원으로 중국 대륙을 오가며 비밀 활동을 해야 했던 그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절실했을 것이다. 그가 그리워하던 곳, 그곳은 김흥규 교수의 지적대로 '청포도’가 익어가고 '생명의 풍요함과 평화가 있는 고향’임과 동시에 '어두운 시대의 억압을 벗어나 회복되어야 할 생명의 공간' 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청포를 입고 찾아올 고달픔 '손님'은 잃어진 조국과 투쟁하는 지사들을 상징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고달픈 현실 속에서 분투하는 당대 모든 유랑민들의 심경을 대변한 것이다. 아울러「청포도」는, 김인환 교수의 지적대로,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와 같은‘螡’ 모음과 자음 ‘롁’의 절묘한 조화로 포도송이가 마치 다닥다닥 붙어 있는 듯한 음성 효과까지 활용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육사 시의 절창으로 꼽혀지는 「광야」는「꽃」과 함께 그의 사후에야 발견된 유고시였다. 두 시에 대해서 박두진은 그 시구가 '신어(神語)’에 가깝다고 찬탄한 적이 있거니와,「광야」에 이르러 육사의 시 세계는 바야흐로 원숙의 경지를 보이는 것이다. 만약 그가 목숨을 부지하였더라면 한국 시사는 육사의 시들을 재산으로 얻어 훨씬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생애는 너무나 짧기만 하였고, 그리고 그 삶은 섬광처럼 강렬하였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4,5연
「광야」를 다시 음미컨대, 마치 시인이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는 것 같은 장엄함을 느끼게 된다. 어두운 현실속에서 묵묵히 씨뿌리는 자의 절망과 고통, 지사적 의연함과 초인정신 등이 대륙적인 기상과 풍모로써 시의 전면을 압도한다. 김재홍의 표현을 빈다면,「광야」는 현실인식이 역사의식으로 통합되면서 예술의식과 탁월하게 조화를 이룬 대표작 중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시 또한 형태적인 면에서는 전통성을 취하고 있는데 육사의 시정신이 전통적인 것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한다. 즉, 고향의 유년시절부터 닦여온 전통의식이 현실인식에 근거한 선구자 의식과 결합되고 이것이 다시 미래지향의 역사의식으로 고양됨으로써 시적 초극과 정신적 상승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탁월한 시인 것이다.
후기에 창작된 시중에「광야」말고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시가 있으니 바로 「꽃」이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은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쓴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움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바다 한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날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
-「꽃」전문
비 한 방울 없는 절명지(絶命地)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필수 없는 꽃을 피워내는 것은 초극적인 의지이다. 그래서 김윤식 교수는 이 시에 ‘생명의 역설’이 숨어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하여 「교목」등과 함께 이만한 정신의 심도를 보여주는 예가 한국 시사에는 없었노라고 했다.
4.
안동댐 민속촌 입구에는 1968년에 세워진 육사 시비가 세월의 오랜 때를 입은 채 서 있다. 검은색 바탕의 시비에 쇠못으로 긁어 놓은 듯 희미하게 새겨진「광야」, 그‘가난한 노래의 씨’는 발 밑으로 흐르는 안동호를 묵묵히 내려다보며 고통스럽게 죽어간 한 시인을 소리없이 기리고 있다.
1943년 북경에 갔던 육사는 모친과 백형의 소상에 참석키 위해 서울에 왔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북경으로 압송되어 간 육사의 옥사가 전해진 것은 그 이듬해 1월, 가족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화장된 후였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 해방을 바로 코앞에 두고 비명에 간 것이다. 육사의 유해는 그후에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60년에야 고향 땅에 묻힐 수 있었다.
그의 사후 2년째 되던 해 이원조에 의해 유고시집인「육사시집」(1946)이 묶여 나왔고 금강석 같은 시들이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육사는 윤동주 등의 시인과 더불어 일제하의 시단을 밝힌 저항시인으로 꼽혀 주목받아 왔으나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70년대부터다. 그 이전에는 '항일 저항시인=이육사’라는 관용적 결론에 근거한 소박한 연구나 회고담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나, 이제는 제법 풍성한 성과가 쌓였다.
그러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육사의 일생이 온전히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의열단과 관계된 그의 활동들, 작품활동 등은 아직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고, '이활’이라는 필명으로 쓰여진 글 중에도 육사의 것이 아닌 원산 출신의 여류 이활의 것도 있다고 한다.
해방 이전의 한국 시사 속에서 일제하 암흑기는 침울하고도 치욕적인 시기였다.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붓을 꺾고, 한때 그 이름이 별처럼 빛나던 애국지사들이 친일의 오명을 썼던 시절에, 육사는 우리가 저항 시인이라는 관용구를 붙여 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하나이다. 그는 수시로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그때마다 '대나무로 훑어대는 고문에 매일처럼 피옷을’말리는 시련을 당해야 했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리빨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는 「절정」의 시구나, ‘지금 눈 나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같은 구절은 그냥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책상 앞에 앉아 담배나 피워가며 머리 쥐어짜 풀어낸 음풍농월의 미문들하고는 격이 다른 것이다. 그는 일제하 암흑기, 그 어두운 하늘에 홀로 빛나는‘별’과도 같은 시인이었다. 만약 시를 써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의 시가 어떻게 쓰여진 시인가를 안다면 그의 시와 삶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누군가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문학사에 세워진 불망(不忘)의 비석이다
첫댓글잘 읽었습니다. 시인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배울점이 더 많다고 생각되는 자랑스러운 경상도 사나이 이었지요. 그의 산문을 읽어보면 龍이와 紛伊가 나오는데 옛날 안동지방 아이들 이름이었지요. 내 이종사촌형도 본향은 하회류가 이지만 어릴때도(육이오 나기전) 서울 돈암동서 자랐는데 집에서 부른 兒名이 龍이 였지요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시인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배울점이 더 많다고 생각되는 자랑스러운 경상도 사나이 이었지요. 그의 산문을 읽어보면 龍이와 紛伊가 나오는데 옛날 안동지방 아이들 이름이었지요. 내 이종사촌형도 본향은 하회류가 이지만 어릴때도(육이오 나기전) 서울 돈암동서 자랐는데 집에서 부른 兒名이 龍이 였지요